ZOO

하고 많은 봄 물건 중, 어쩐지 그 동물이 생각나는 것 4개.

HERMÈS
페도라는 쓰려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쉽게 찾을 수 있는 모자다. 그런데 페도라를 썼을 때 자연스런 멋이 나는 사람을 본 기억은 드물다. 2014 봄여름 컬렉션 여기저기서 페도라를 쓴 모델이 유난히 많았다. 단정한 수트에 쓰기도 하고, 케이블 니트와 반바지 차림에 삐딱하게 쓰기도 했다. 그런데 페도라가 참 기막히게 쓰였구나, 라고 느낀 건 런웨이가 아니라 텔레비전에서다. 얼마 전 열린 그래미 어워드 시상식에서 파렐 윌리엄스가 봉긋하게 솟은 페도라를 썼는데, 똘망똘망한 눈과 긴 속눈썹, 밀크 초콜릿색 피부가 꼭 낙타처럼 귀여웠다. ‘겟 럭키’를 흥겹게 부르며 썼던 페도라는 비비안 웨스트우드였지만, 이번 봄 유행 색이기도 한 청량한 파란색 페도라를 대신 권한다. 우리 피부색엔 이게 더 잘 어울린다.김경민

HARLEY OF SCOTLAND
몇 년 전, 10여 년 동안 키운 강아지 ‘비키’가 죽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10주년 기념호를 펼쳐 정우성이 품에 안고 있는 미니핀 ‘비키’를 찾아본다. 그때마다 다짐했다. 어떤 애완동물도 다시는 집 안에 들이지 않겠다고. 며칠 전엔 한밤중에 동네 골목을 차로 지나가다 방황하는 비어디드 콜리 한 마리를 발견했다. 문득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얘가 길을 잃은 건가? 이러다 차에 치이면 어쩌지? 일단 안전하게 내 차에 태울까? 모든 우려는 섣부르기만 했다. 게다가 코너 뒤엔 멀쩡한 강아지 주인이 있었다. 강아지를 키우기엔 돈도, 시간도, 맞이할 마음의 준비도 안 되어 있었다. 비어디드 콜리를 키우는 대신, 당분간 쉐기 독 스웨터를 입는 것으로 서운함을 견디는 수밖에. 박태일

SAINT LAURENT PARIS
가방 이름을 정확히 외우거나 또박또박 발음할 자신도 의지도 없다. 뭔가 결핍된 듯 눈을 희번덕거리며 물건을 찾아 헤매는 것도 싫고. 그래서 얼추 내 마음과 닮았거나 동경하는 걸 즐긴다. 겉멋만 잔뜩 든 건 줘도 싫다. 요 며칠, 정글에 사는 코끼리가 거대한 몸을 고요하게 움직이는 모습만 상상했다.
몇 년 전 다큐멘터리에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욕심을 내거나 시끄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어 그저 아름다웠다. 우연히 크기가 적당한 검정색 가방을 봤다. 멀리서 보니 차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거대한 몸을 이끌고 시간을 지내는 정글의 코끼리 같기도 했다. 게다가 어디에 둬도 거슬릴 것 같지 않았다. 브랜드 이름이 읽기 힘들 만큼 작게 쓰여 있었으니까. 오충환

BALENCIAGA
검정색 신발에 대한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애정이 있다. 세단과 블레이저, 소파와 전화기는 역시 블랙이어야 한다는 믿음과 같은 맥락이다. 별 장식 없이 매끈한 게 예뻐 보여서 슬립 온과 첼시 부츠에 각별히 마음이 간다. 짤막한 바지를 입고 양말 자랑이나 하는 게 시시해 보일 무렵부터 첼시 부츠가 좋아졌는데, 발렌시아가에서 새로 나온 페이턴트 첼시 부츠를 보고는 완전히 반했다. 왁스를 먹여서 잘 닦아놓은 롤스로이스 같기도 하고 방금 물에서 나온 물개 같기도 한, 섹시하고도 귀여운 용모. 물개를 보면 이마를 짚어보고 싶듯,
이 부츠를 보면 부드럽게 발등을 만져보고 싶다. 참, 동물원에서 공놀이를 하는 건 물개가 아니고 캘리포니아 강치다.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강치는 공놀이 대신 보리차를 마시고 하이라이트 담배를 피웠지만.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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