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역할 수 없는

새삼 이름을 물었다. “얼굴 용 구슬 림. 어려서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예쁘장한 여자애 이름 같진 않으니까요.” 김용림은 예쁘장한 여자애로부터 일찌감치 독립했다. 그러고는 김용림이 아니면 신도 대신할 수 없는 연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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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저는 원을 풀었습니다.
저는 감정이 복잡했어요.

저만 좋았던 거예요?
그게 아니라, 이런 촬영은 처음이라서. 음, 장미희 같은 후배가 이런 걸 찍잖아요. 볼 때마다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겠구나. 저한테 이런 기회가 올 줄은 몰랐죠. 당연히 호기심도 생기고 잘해야겠다는 의욕도 생겼지만, 모든 걸 망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까 두 번째 장면 찍을 땐 음악을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서, 어머 내가 왜 눈물이 나지? 이러면 안 되는데. 행복했달까, 감격했달까, 그런 부분이 좀 있었어요.

그러셨군요. 아까 음악은 영화 ‘2046’의 OST였습니다. 눈물 연기를 부탁드린 건 아니었는데, 눈가가 젖어 있으시더라고요.
기대하셨던 것만큼은 못 미치겠지만, 저로서는 잊지 못할 순간이었어요.

선생님 이름, 한자가 어떻게 되세요?
얼굴 용, 구슬 림. 얼굴 용자가 돌림자인데 어려서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 이름을 좋아하진 않았어요. 수연이라든가, 그런 예쁘장한 여자애 이름 같진 않잖아요. 상대에게 빨리 전해지지 않는 이름이라 배우로서 섭섭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이름이 좋아지신 건 언제쯤인가요?
사십 대가 되어서야 좋아진 것 같아요. 워낙 젊어서부터 노역을 많이 하다 보니, 나이에 대한 감각도 조금 달라요. 제가 스물여섯에 결혼하고, 서른에 ‘세종대왕’ 나오는 드라마를 했는데, 거기서 제 남편이 세종대왕이고 저는 세종대왕 엄마였어요.

원경왕후요?
하하, 맞아요. 그 순간은 참 속상했죠. 역할은 탐이 났지만, 남편의 엄마라니. 사극이니까 대사가 “어마마마, 소자는 어쩌구” 그러잖아요. 자꾸 카메라맨들이 웃어서 진행이 안 됐어요.

머리에 첩지 꽂고 모란 병풍 앞에 앉아 있는 김용림은 왠지 익숙하네요. 둥근 얼굴이 정말 떡하니 화면을 채웠죠.
맞아요, 사극을 참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저는 항상 중전 이상을 했어요.

하하.
보료 위에 앉은 중전이나 대왕대비, 주로 그런 역할을 했죠. 머리가 크고 얼굴이 넓어서 요즘 미인형은 아니지만, 옛날엔 이 얼굴 때문에 덕이라면 덕을 봤죠. 근데 그때는 너 나 할 것 없이 노역을 많이 했어요. 선배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노역이 싫지 않았어요. 일찌감치 분수를 알았던 것 같아요. 제가 여자 주인공 얼굴이 아니라는 걸요. 그러다 보니 이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것 같아요.

고향은 서울, 서울 여자시죠.
네, 대대손손 종로구에서 살아왔어요. 말하자면 사대문 안 여자예요. 훈정동이 본적이고, 육이오 이후엔 명륜동으로 이사했죠.

정말 ‘거역할 수 없는’ 동네네요. 서울이 가장 예뻤을 때를 기억하세요?
글쎄요, 여유가 없었던 걸까요? 맨날 스튜디오 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요. 그래도 생각나는 건, 창경원에 밤 벚꽃놀이 갔을 때. 그땐 창경원이라고 불렀어요. 그리고 비원도 기억에 남아 있죠.

뼛속까지 궁궐의 기운이….
사극을 많이 해서 그런가? 봄에 창경원에서 버찌를 따먹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은 2014년 봄입니다. 선생님껜 일흔네 번째 봄이고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방영 중입니다.
네, 김수현 씨 작품이죠.

그 누구보다 김용림이 보입니다.
출연 결정 하자마자 대본 네 권을 받았는데, 당장 이명증이 왔어요. 귀에서 막 북치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대사가 너무 많으니까.

김수현 드라마니까 예상은 하셨을 텐데요.
제가 성격이 완벽주의가 되어놔서, 작품도 절대 두 개를 동시에 해본 적이 없어요. 어쩌다 <마마도>도 하고 있는 상황이라. 침을 얼마나 맞았는지.

이런 말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언제부턴가 김수현 드라마 1회만큼 불편한 드라마도 없다는 생각을 해요. 뭔가 불안하달까요? 느낌은커녕 대사 쳐내기 바쁜 젊은 배우들, 거기에 ‘선생님급’ 배우들은 “나 김수현 드라마 어떻게 하는지 알거든?” 하는 식으로 과장된
연기를 하죠.

그런 것까지 보시는구나. 저 지금 소름 끼쳐요. 김수현 씨도 똑같은 얘기를 했거든요.

드레스는 키옥, 팔찌와 반지는 AA 지반, 뱀 모양 반지는 21드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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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결혼하는 여자> 첫 회에서는 김용림이 “2층, 4층 관리비 아직도 안 들어왔던데 홍 소장 뭐 하는 사람이야? 어?” 하는 대목에서야 ‘됐다’ 싶었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정말 책임감과 사명감을 느끼게 되네요. 인사치레며 여러 격려를 들어봤지만, 이래서 배우를 하는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선생님도 김용림의 연기를 보시죠?
아으, 만족 못하죠. 맨날 부족하고, 부끄러워요. 녹화할 땐 됐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하는데, 방송으로 보면 늘 잘못한 게 보여요. 왜 저기서 눈을 저렇게 떴지? 손을 왜 저렇게 했지? 왜 쳐다봤지? 안 쳐다봤어야 더 살았을 텐데.

오늘도 작품 읽기를 하고 오셨죠?
김수현 씨 작품만 유일하게 대본 읽는 시간이 있어요. 정말 잘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다 지적을 당하죠. 김수현 씨만의 말투도 있어서 꽤 해봤다는 저도 몇 번씩 읽어야 파악이 되기도 하고요. 요즘 아이들은 한국말인데도 뜻을 몰라요. 그리고 아동어를 많이 써요. “그래서어~, 이래서어~” 하면서 끊죠. 그러면 김수현 씨는 질색을 하죠. 한 호흡에 붙여라. 그러니 연습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죠.

배우로서 김수현 드라마를 한다는 고유한 기분이 있을까요?
우선은 기분이 좋아요. 좋은 작품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드라마는 작품이 첫째, 둘째가 배우, 그 다음이 연출이라고 봐요. 그래서 김수현 씨 작품이라면 우선 기분이 좋죠. 물론 걱정도 크죠. 김수현 씨는 천재예요. 제가 같은 또래인데, 그 여자는 안 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없어요. 젊은 애들 하는 거 다 하죠. 뒤처진 적이 없어요. 항상 앞서가죠.

세상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해요. 겁 없는 사람과 겁먹은 사람. 겁 없는 사람들이 뭔가를 바꾸고 이루는 거겠죠.
저도 겁이 없다면 없는 쪽이었는데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나 보다, 하는 부분도 생겨요. 밸리댄스 배우려고 벼른 지 8년 됐는데 딸아이가 “엄마 지금 나이가 몇인데?” 하면, 그런가 싶기도 하니까요.

무시하세요.
하하, 스포츠댄스도 배우고 싶더라고요.

무엇보다 김용림의 연기를 보면 발성에 놀랍니다. 혼잣말을 해도 토씨 하나 다 알아듣겠고, 큰 소리를 내면 태산이 무너져라 울리죠.
그건 전적으로 연극을 했기 때문이에요. 요즘 아이들은 발성은 그만두고 발음도 정확치가 않죠. 웃는 연기를 못하잖아요. 대본에 “깔깔깔” 웃으라고 쓰여 있는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우는 연기보다 웃는 연기가 더 어려운 거거든요. 무대를 한번 걸어만 가봐도 달라질 텐데.

충고하시는 편인가요?
저는 성질이 못됐어요. 견디질 못해요. 근데 좀 버릇이 없달까, 싸가지가 없달까, 그런 애들한텐 아예 관심 자체를 안 두죠. 선후배 관계에도 크게 의미를 안 둬요. 말하자면 고두심까지를 후배라고 생각해요, 그 아래로는 후배라는 생각 안 해요. 지들도 선배라고 생각 안 할 거예요. 부딪히기 싫어서 홈드라마를 안 하겠다는 애들도 있으니까요

1962년 기사를 하나 찾아보니, “극에서는 말괄량이를 맡지만, 실제로는 얌전하고 건전하답니다” 하셨더라고요. 네, 말괄량이 역할 많이 했죠. 라디오에서는 여자 주인공도 제법 했고요. 아주 도회적인 현대 여성이었죠.

그렇게 시작하셔서 이제 50년이 넘었죠. 모든 순간을 다 보진 못했지만 나름대로 기념하고 싶은 배우 김용림의 모습을 세 장면으로 뽑아봤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87년 <사랑과 야망>입니다.
어떤 장면이에요? 태수를 때리는 장면인가?

수돗가에서 찬물로 씻으려는 아들 태수(이덕화) 옆에 뜨거운 물을 찜통째 갖다 주고 얼른 돌아서는 장면입니다. 얼음장처럼 냉정하던 어머니의 숨겨진 마음이 슬쩍 담긴 장면이지요.
그런 장면을 기억해주시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과 야망>은 제 대표작이라고 생각해요.

드레스는 키옥, 팔찌와 반지는 AA 지반, 뱀 모양 반지는 21드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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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새풀>(제1회 MBC <연기대상>에서 김용림에게 대상을 안긴 작품)이 아니고요?
달라요. <억새풀>로 상은 많이 탔지만, 상과는 관계없는 애정으로서 <사랑과 야망>을 정말 제 대표작이라고 생각해요. 김수현 씨가 그때 세 작품을 꼭 쓰겠다고 했어요.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그리고 ‘사랑과 인생’ , <인생은 아름다워>가 바로 그 ‘사랑과 인생’이에요. 저는 세 작품 모두에 출연했으니 복이 많은 배우지요.

두 번째는 1999년 <청춘의 덫> 14회, 김무생, 정영숙, 김용림 세 사람이 응접실에 삼각구도로 앉아 대화하는 장면이에요. 그 장면이 마냥 좋아서 실은 휴대전화에 영상을 갖고 다녀요. 보여드릴까요?
어머나! (…) 저는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이었는데, 제가 여기 있네요.

모르겠어요. 이 장면을 볼 때마다, 이게 진짜 드라마라는 생각, 이게 진짜 연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세 배우는 움직임도 없지요. 그저 앉아서 말을 주고 받는 것뿐입니다만, 이런 호흡과 긴장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어요. 요즘 잘한다는 어떤 배우들이 그 나이가 되면 할 수 있을까요? 오직 그때 뿐인 것, 그때라서 빛나는 것도 아름답지만, 무엇보다 역사가 있어야 하죠. 이런 장면을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제가 고맙습니다. 뭐라고 말이 안 나오네요.

제가 기념하고 싶은 김용림의 세 번째 장면은 2010년 <인생은 아름다워> 첫 회, 송악산 언덕에 앉아 노래하시는 장면입니다.
송민도 씨 노래죠. ‘서귀포 사랑’. 그때 그걸 부르면서 참 많이 울었어요. 저도 영원히 기억할 장면이에요. 찍고 나서 김수현 씨한테 말했어요. 수현 씨는 국보니까 절대 늙지 말라고, 건강하게 작품 오래 쓰라고. 그랬더니 수현 씨가 “서로 그럽시다” 하더라고요.

암요, 그러셔야죠. 자, 50년 넘게 드라마를 해온 배우 김용림에게 요즘 드라마 환경에 대해 여쭤볼까요? 세상은 훨씬 좋아졌다는데요.
드라마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죠. 저는요, 전작제가 전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보고,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현실이 힘들다고 하지만, 일단 해 붙이면 못할 것도 없다고 봐요. 탤런트협회나 노조가 강력하지 못해서 못 밀고 가는 거예요. 쪽대본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정말 화가 나요. 배우가 기계예요? 대사를 외우기만 하면 되나요? 뿐만 아니라 전작제가 되면 여러 문제가 사라질 거예요. 개런티 문제며, 시청률 따라 드라마 흐름을 바꾸고, 중도하차를 시키고 그런 문제가 없을 거예요. 방송국이 당장 눈앞의 돈만 벌려고 하는 태도만 바꾼다면 모든 게 좋아질 거예요.

얼마 전 배우들의 연이은 하차 때문에 말이 많았던 임성한 작가의 작품에도 출연하셨죠?
두 작품 했죠. <인어아가씨>랑 <왕꽃선녀님>. 글쎄요, 개인적으로는 참 획기적인 작품이었어요. 근엄하고 점잖은 어른 역할만 했던 제가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했으니까요. 사미자와 동갑인데, 제가 사미자 씨 며느리였잖아요. 그걸 하면서 뭔가를 깼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뭔가를 깨는 것, 그런 경험이라면 또 어떤 작품을 꼽으시겠어요?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겠죠. 송창의 씨만 믿고 시작했는데, 3주 찍고 나니까 뭔가 연기를 반만 하고 마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그 속으로 확 뒤집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저 자신에게 막 짜증이 났어요. 네가 뭐가 잘났냐, 왜 시트콤을 부정하냐, 자문자답을 하기 시작했죠. 일단 하기로 했으면 고쟁이 벗어 붙이고 해야지 지금 네 꼴이 뭐냐. 그때부터 조금 자신감이 생겼어요. 마음이 젊어졌달까요? 고정관념은 정말 불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죠.

이것도 고정관념일까요? 김용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잖아요. 근엄하고 위압적이고 무섭고 주로 그렇죠.
<세 번 결혼하는 여자>에서도 그런 이미지의 악역이죠. 김수현 씨가 그러더라고요. “고약한 역이야. 아주 나빠.” 저는 그건 상관없다고 했어요. 나쁜 역할은 없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그 인물을 나쁘게 썼다면 배우는 나쁜 역할을 잘 연기해야 하는 거죠. 연기를 나쁘게 하라는 뜻이 아니잖아요.

요즘은 악역이 갑자기 개과천선하는 경우도 자주 봐요. 너무 캐릭터를 소홀하게 다룬달까요? 작가가 인물을 책임지지 못하는 거죠. ‘만화적’이라는 말로 면피하면서요.
사람이 변한다지만, 근본은 안 변한다고 봐요.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최 여사’도 마찬가지예요. 사람이니까 생각과 감정을 복합적으로 느끼죠. 반성도 하고요. 하지만 하루아침에 사람이 완전히 달라질 수는 없잖아요. 그럴 수는 없죠.

그렇게 인물이 입체적일 때 매력이 생기는 걸 텐데, 요즘엔 배우의 얼굴 자체에서 입체가 사라지고 있죠.
정말 안타까워요. 너무 지나쳐요. ‘배우 이전에 여자’라는 식으로 너무 쉽게 배우를 내려놓죠. 코도 똑같고 눈도 똑같아요. 나이가 좀 있는 배우들도 팔자주름 지운다고 뭘 막 넣잖아요. 구강구조에 변화가 오면 발음이 안 되는데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한번 당긴다고 영원히 당겨지나요? 영원히 당겨지는 거라면 저도 하겠어요. 영원하지 않으니까 또 고치고 또 고치고 그러잖아요. 점점 모르는 얼굴이 되어가고요.

김용림의 얼굴은 순수 자연 그대로죠? 바위처럼요.
하하, 정말 요만큼도 손 안 대고,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저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자랑은 아니지만, 얼굴을 지키고 싶어요. 주름이야 당연히 싫죠. 하지만 얼굴에 명암이 있어야죠. 풍선처럼 팽팽한 얼굴에 무슨 표정이 생겨요. 내가 꼭 옳다는 건 아니지만요.

무엇보다 자신을 아는 게 중요하죠. 내가 김용림이라는 걸 안다는 것, 그래서 그걸 아끼며 지킨다는 것. 김용림의 얼굴은 김용림만의 것이죠. 그러니 ‘이 역할은 김용림밖에 못한다’는 최고의 평을 들으시죠.
내 얼굴로 내 연기를 했다는 확신은 있어요. 자신감도 있고요. 그리고 노력하는 거죠. 저는 정말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것 같네요.

오늘은 끝도 시작도 아닐 겁니다. 그저 진행 중이에요. 김용림의 연기가 한 번도 끝나지 않았던 것처럼요.
어깨가 무겁네요.

힘을 내세요 선생님.
그러고 보면 저는 슬럼프라는 것도 느껴보지 못했는데 요즘 들어 우울한 느낌이 들기는 해요. 제가 해도 되는 엄마 역할을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하는 걸 보면서 특히 그래요. 이렇게 배우를 조로시키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죠. 제가 그 역할을 못 맡아 질투가 나서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배우의 층이 두꺼워야죠. 그게 저력이 되는 건데.

역사가 되고요.
저는 욕심은 없어요. 이제까지 안 해본 특별한 역할을 해보고 싶다거나, 새로운 도전을 막 해봐야겠다거나, 활개치며 달려가는 나이는 아니에요. 끝까지 좋은 배우이고 싶다는 거, 그거 하나예요. 김용림도 나이 먹더니 별수 없더라는 얘기는 듣지 말아야 한다는 그거 하나죠. 저는 죽음에 대해서도 무대에서 죽고 싶다거나, 방송현장에서 죽고 싶다거나 그런 말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워요. 대사 하나는 잘 외우는 김용림인데, 대사 NG를 자꾸 내면 얼마나 자존심이 상할까 그것뿐이에요.

요즘 NG 자꾸 내세요?
아니요. 안 내요.

사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녀는 고이는 눈물을 연신 티슈로 찍어냈다. 말을 흐리는 법은 없었다. 상대에게 보이려는 눈물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연기를 특별하게 기억해주어 고맙다고 인사했지만, 그건 도리어 김용림이라는 이름과 얼굴을 지킨 배우 자신을 향하는 게 마땅했다. 진정 자신을 알며 아끼는 한 사람의 배우가 그렇게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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