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해.” / 애도의 방식

피곤하다는 말이 과시와 핑계로 이어지면서 희생, 봉사, 헌신의 의미는 완전히 김이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 피곤해 죽겠다고 노래를 4절까지 지어 불러도 아무도 신경 쓸 수 없다.

E.L.

“피곤해.”

누군가에게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어볼 때마다, 제일 먼저 듣는 말. 언제나 같은 말. 하긴 사는 게 얼마나 피곤하면 그 옛날 전도서 기자도 “세상이 다 피곤해.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 눈은 아무리 봐도 본 것 같지 않고, 귀는 줄창 들어도 아쉬울 뿐이야”라고 적었지. 사실 지구부터 이미 피곤하다고. 지지하는 것도 없이 허공에 뜬 채 매일 시속 108000킬로미터로 공전하고 1660킬로미터로 자전하며 미친 듯 뺑뺑이를 돌고 있잖아.

허세든 진정이든 삶의 모토야 필요하다 하겠지만, 어떤 사람에겐 자기가 요새 얼마나 피곤한지 들려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어 뵌다. 그렇지만 피곤을 봇짐 풀 듯하는 것만큼 참아주기 어려운 게 또 뭐냔 말이야? 만나자마자 피곤하단 얘기부터 꺼내는 입을 보면 마음은 두 개로 나뉜다. “와, 목소리부터 완전 갔네. 얼마나 죽도록 일했으면.” 아니면 “아, 또 시작이다. 진짜 누가 더 피곤한지 함 해볼래?”

친구에게 요즘 좀 어떠냐고 물어보면 “응. 난 괜찮아. 관심 가져줘서 고마워”라고 답하던 시절이 있긴 있었다. 자기는 하나도 안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피곤을 스스로에게만 남겨두던 시절이. 그러나 모두가 잘나서 도대체가 피곤한 이런 시절엔, 잘난 중 최고인 사람도 종국엔 ‘디폴트’되어 피곤하다고 실토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어쩌다 누구 사무실에 들렀는데, 그가 보자마자 추저분한 손가락으로 결막염인 듯 붉고 척척한 눈에서 타조 알보다 큰 눈꼽을 떼며 악관절이 나갈 듯 하품을 하면 이자가 뭘 말하고 싶은지 감이 확 온다. “내가 이렇게 피곤한데도 일 잘하고 인정받는다는 게 믿어져?” 이거, 이거! 게다가 식어 빠진 벤티 사이즈 라테를 후루룩 비우곤 한참 일하는 후배를 불러 “냉장고에서 레드불 갖고 와. 밤샜더니 피곤해서 안 되겠다. 없음 편의점에서 사 와. 아, 돈 준다니까?” 이 지랄을 하면, 이치는 필시 하는 일도 없으면서 실적은 이스트처럼 부풀리는 두꺼비 종자구나, 싶다.

사람들은 확실히 피곤을 방어기제나 고생의 대리인, 가장 당당한 (변명 아닌) ‘설명’으로 사용한다. 다크 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만화 같은 피로가 위압적이도록 높은 지위를 상징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회사에서 밤샘 야근을 하건 말건 누가 신경 쓴다고? 홍송 껍질 같은 피부, 지방이 사발처럼 반원을 그리는 눈밑, 학처럼 구부러진 목조차 아침에 게으르고 석양에 바쁜 이의 고소한 숙명으로 보인다.

피곤하다는 말이 과시와 핑계로 이어지면서 희생, 봉사, 헌신의 의미는 완전히 김이 빠지고 말았다. 그러니 피곤해 죽겠다고 노래를 4절까지 지어 불러도 아무도 신경 쓸 수 없다. 다들 자기만큼 피곤한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애도의 방식

대부분의 우리는 증명해야 할 것이 많은 삶을 산다. 만족하고 만족시켜야 한다는 강박 아래 고군분투한다. 삶은 우화가 아니고 중독은 근거가 아니므로.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다면 타인이 가진 희망은 어떤 종류의 것이란 말인가.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이 죽고 나자 그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되었다. 알게 된 것들은 그를 더 존중하게 만든다고 믿었다. 그런데 곧바로 그의 시신이 아파트 블록을 떠나는 사진이 떴다. 그가 욕실 바닥에서 주사기 바늘을 꽂은 채 발견되었다는 가십도 광속으로 이어졌다. 슬픔보다 사적인 건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철저히 새로운 것. 그러나 가십 세상에선 알려진 사람의 죽음만큼 즉각적으로 공유되는 사안도 없다.

한 사람의 종말을 두고 사람들이 얼마나 무례해지는지는 보고도 믿기 힘들다. 화장실에서 발견된 엘비스부터 입에 권총을 겨눈 헤밍웨이, 욕조에 얼굴을 담근 휘트니까지, 죽음의 무작위한 패턴이 얼마나 황폐한지 자다가도 소스라칠 정도인데, 그들의 마지막 순간은 업적 대신 클럽에서 드잡이 하거나, 토사물 위로 엎어진 일 정도로 ‘처리’된다. 하지만 티끌 만 한 예의라도 있다면 죽은 친구를 발견한 누구라도 바로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어선 인스타그램에 올리진 않을 것이다.

해파리도 아는 소리지만, 명성이 만족을 주진 않는다. 할리우드는 성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었겠으나, 호프만에겐 증명할 무엇이 더 있었을까. 그런데 러셀 크로가 아무리 여호와가 택한 한 사람, 노아라고 해도 그가 한때 좌절한 록가수였다는 걸 알고 나면 질투가 살짝 걷히고 만만한 연민이 몽글거릴 것이다.

어떤 유명한 사람은 자기를 수식하는 부풀려진 품사를 못 견뎌한다. ‘최고’ ‘국민’ ‘전설’…. 사람들이 아는 건 그의 복제뿐. 스스로도 아니라는 걸 안다. 톰 크루즈라면야 자기가 뭐가 되고 싶은지 알 것이다. 어쩜 예수?

뷔페처럼 잔뜩 차려진 명성은 나의 표준이 아니다. 당신의 기준도 아니다. “이쁘다” 소리만 듣는 사람에겐 모든 숭배가 사라진 어느 아침이 테러처럼 급습할 것이다. 마침내 뒷목을 잡고 쓰러진 뒤, 그가 쓰레기에다 사기꾼, 뒷다마 도사, 얍삽한 뻥쟁이 새끼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그 때야 비로소 날숨 같은 안도를 최후의 선물로 받게 될 것이다.

* 추신
3월호 창간 13주년 기념호에 큰 실수가 있었습니다. ‘NO. 157’이 있어야 할 책등에 ‘NO. 156’이 인쇄되고 말았습니다. 황망하고 당혹스러워 찾을 말이 없습니다. 만회할 수 없겠으나, 이 페이지에 원래 사이즈대로 ‘NO. 157’을 마련해두었습니다. 지난 호 ‘NO. 156’ 자리에 붙여두시면 어떠실런지요? 번거롭게 해드려 참 미안합니다. 오랜 친구의 실수를 이번만 붕대로 싸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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