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그대, 사사키 아타루

사사키 아타루에게서 철학자를 발견하라는 건 생선에서 풀냄새를 맡으라는 요구 같다. 힙합 뮤지션의 풍모를 지닌 탓일까? 혹시 사람들이 철학자, 어쩌면 책을 읽는 사람은 젊지 않다고 정해둔 건 아닐까? 그의 말에 따르면, 책처럼 젊고 어린 장르는 젊고 진취적인 사람이 읽는 게 마땅하다. 책을 읽은 게 아니라 “책을 읽고야 말았다”고 말하는, “알아버리면 미쳐버리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면 책을 읽었다고 할 수 없다는, 사사키 아타루를 서울에서 만났다.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일본은 물론 국내에서도 화제가 된 책이다. 책을 철저히 읽는 것만으로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허세에 가깝게 들리는 이야기를 루터, 마호메트, 니체, 도스토옙스키, 프로이트, 라캉, 버지니아 울프를 돌파해서 설득했다. 한국의 독서공동체 길담서원의 초청으로 이뤄진 이번 강연회에서 그 생각의 유달리 큰 파장과 진폭을 육성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날, 그를 붙잡고 물었다.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첫머리에서, 책을 읽으면서 점점 정보를 차단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스포츠나 미술관 관람, 텔레비전 시청 등을 그만두었다고요. 그중에서도 음악에 대해선 “듣는 것을 그만두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지만”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패션을 보면 당신의 취향이 어땠는지 알겠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제 주변에 재능 있는 뮤지션이 아주 많았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래퍼인 라임스터와 2002년 한일 월드컵 주제가 ‘Let’s Get Together Now’를 작곡한 가와구치 다이스케가 제 가장 친한 친구들입니다. 음악을 좋아하지만 그런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음악에 대해 어중간한 태도를 취할 수 없습니다. 또 하나는, 어떤 의미에서 저는 결코 음악을 버린 게 아니라는 거죠. 철학을 하고 소설을 쓰지만, 소설이든 철학이든 반드시 문체라는 게 발생하는데요, 노래가 있고 랩이 있고 시 낭송이 있다면, 그 사이에는 ‘그러데이션’이 존재합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음악인지 그 경계를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특히 힙합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철학과 소설, 시와 음악이라는 것을 하나의 흐름으로, 하나의 세상으로 해석합니다. 음악을 버린 게 아니에요.

음악 하는 친구들은 당신의 책을 읽고 뭐라고 하던가요? 신기한 점이 있습니다. 제가 쓴 논문이나 소설 모두 문체가 난해하다는 얘길 자주 듣습니다. 특히나 전문적인 비평가들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음악가들은 제 문장을 술술 읽어나갑니다. 뿐만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나 독서에 취미가 없는 사람들까지도 제 논문을 오히려 쉽게 읽어나갑니다. 소설과 철학 논문을 쓴다는 건 고리타분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안에는 리듬이나 플로, 멜로디가 살아 있습니다. 음악을 들을 줄 아는 사람은, 그 세계에 들어왔을 때 쉽게 문체에 적응하고, 쉽게 읽어나가는 경험을 합니다.

<야전과 영원>이 나왔을 때 당신이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이 “도대체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느냐”라고 들었습니다. 당신의 충격적인 등장을 반증하는 반응이지요. 당신은 책을 읽었다고 답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히려 음악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음악의 구체적인 행위인 디제잉이나 이런 건 그만두었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에 투입했습니다. 차단했다기보다 ‘시프트’ 했습니다.

독서는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건 책을 내는 데까지 이릅니다. 목적이나 동기가 있었나요? 책을 쓰기 위해 읽는다는 목적의식을 가져도 책을 읽으면서 목적이 변합니다. 책을 읽기 전과 읽은 후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독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음악도 수많은 명반을 듣다 보면 어느 순간 귀가 완전히 열리는 경험을 합니다.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도구나 재료로 생각하더라도 책이 정신과 육체에 반응하면서 자신을 일으켜 세웁니다. 자신을 바꿉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쓸 차례가 옵니다. 독서 행위를 통해서 처음에는 목적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미아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아로 있다 보면 문득 ‘아, 내가 쓸 차례구나’ 싶습니다. 연애와 마찬가지입니다. 예컨대, 누군가 2016년 2월에 애를 낳으려고 애인을 만들고 몇 개월째 섹스를 하자, 이런 생각을 하는 인간이 있다면 때려줘야 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한 이성에게 끌려, 잘 지내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을 보내고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기쁜 일도 겪으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아, 그때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텐데.’ ‘아,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그건 그녀가 나쁘지 않았나.’ 이렇게 고민하는 와중에 아이가 생깁니다. 만약 부모가 철저한 계획하에 나를 낳았다면 그건 정말 싫지 않나요?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려는 생각을 놓고, 우연한 만남이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목적 없이 떠도는 과정에도 삶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또 즐겁고요.

아직 한국에 번역된 책은 없지만, 소설에 대해서도 당신은 소설 쓸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사실 당신은 소설처럼 극적인 구조를 가진 비평을 쓴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설은 정반대라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 차이가 발생했을까요? 다음 한 줄을 뭘 쓸지 모르는 상태에서 한 행 한 행 쓰다 보니까 소설이 되었습니다. 저만이 가진 특별한 방법이 아닙니다. 위대한 작가들이 다 시험해봤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논문에는 명백한 룰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조건을 클리어해 나가면서 씁니다. 하드 밥과 프리재즈의 차이 정도라고 하면 어떨까요. 코드 진행이 정해져 있는 게 하드 밥이라면, 소설은 프리재즈인 거죠. 하지만 재즈라는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논문을 위대한 뮤지션의 이름에 빗대는 것에 조금 두려움은 있는데요, 소설이 50년대의 마일즈 데이비스라면, 소설은 알버트 아일러나 세실 테일러일 수 있겠네요.

스스로는 소설과 철학의 경계를 두지 않는군요. 하나의 룰을 지킨다 안 지킨다 정도의 차이만 있습니다. 제가 쓴 소설 중에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품이 있는데 그 소설 속에서 어떤 여성이 파울 첼란에 관한 논문을 씁니다.(사사키 아타루의 책 제목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파울 첼란의 시에서 따왔다.) 액자 구조 속에서 크게 구별하지 않는 것이죠. 소설에 여주인공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었고, 그 여주인공이 논문을 쓰는 것도 ‘아, 이 여자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라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하하. 하지만 확실하지 않거나 애매한 것을 쓰진 않습니다. 제가 쓰는 논문과 동떨어져 있거나 사변적인 것이 아니에요. 이 사회와 연관된 이야기들입니다.

어제 당신 강연을 듣고 친구들과 이런 농담을 했습니다. 한국의 철학자들은 다 LA 메탈을 하는 것 같은데, 당신은 펑크를 한다고요. 간결하지만 전투적인 문체를 구사하며, 쾌락보다는 충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요. 선동가로 불리기에 당신이 모든 문제에서 강조하는 역설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어쨌든 사람들은 선동만 기억하곤 합니다. 하하. 일본에서도 그런 평가를 듣곤 하는데, 사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작가와 래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사키의 평론은 그야말로 정론”이라고요. 처음에는 그 서론에 놀라지만, 진지하게 글을 대하다 보면 매우 당연한 이야기고 그야말로 정론이라는 걸 안다고요. 선동과는 무관한 이야기라는 겁니다. 덧붙여 펑크Punk도 좋긴 하지만 제 분야는 훵크Funk입니다. 하하. 제가 좋아하는 힙합이 처음 시작했을 때 아무런 차별 없이 음악적 가치를 인정해준 사람들은 펑크 로커들이었기 때문에 그건 아주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도발적인 책의 인상과 달리 강연에서 보니 너무 잘 웃던데요? 어쩌면 약간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얼굴이 원래 이렇게 타고나서 어쩔 수 없습니다. 니체는 “웃음이 가장 커다란 감정”이라고 이야기했고, 알랭(에밀 샤르티에)은 “미소만이 철학자에게 어울리는 유일한 표정”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저 화나면 무서워요.

당신의 흥미로운 태도 중 하나는 모든 예술을 책과 동일선상에서 비교한다는 점입니다. 어제 강연에서는 음악과 비교해 책이 얼마나 젊은 장르인지 얘기했습니다. ‘GQ KOREA’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최종적인 메시지입니다만, 정말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몇 번이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음악은 7만년에서 8만 년의 역사를 가졌고 춤은 그보다도 오래됐습니다. 인류가 문자라는 매체를 가진 지는 불과 5천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글을 읽고 쓰고 다루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 문학이라든가 모든 문자를 다루는 예술은 아직 젊고 어립니다. 요즘 사람들은 문학이나 철학이라고 하면 일단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하고, 음악이나 패션이 신선하다고 생각하는데 연도를 따져보면 음악과 패션이야말로 문학과 철학보다 훨씬 오래됐습니다. 패션은 인류가 태어나면서부터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음악과 패션을 좋아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어쩌면 그건 보수적인 것이며, 음악과 옷을 좋아하는 그 자신도 전통적인 인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디자인이나 음악 같은 낡은 걸 다루는 주변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잃은 적은 없습니다만, 문자라는 젊고 참신한 것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태도 또한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멀리하는 세태에 대해 지적하면서 “메시의 드리블이 난해한 건 이해하면서 책이 난해한 건 참지 못한다”고 했지요. 흥미로운 비교인데요. 당신은 사람들이 축구보다 책을 사랑할 날이 올 거라고 믿는 걸까 싶은 의문도 듭니다. 책을 대할 때 중요한 것은 모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들 책이 어려우면 화부터 먼저 냅니다. 자기가 열등하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이해합니다. 안다는 것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말하자면 안다는 건 나의 지식으로 이 책을 지배하겠다는, 권력욕의 행위입니다. 다시 연애에 비유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이해하는 것은 물론 중요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파트너가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할지 무슨 행동을 할지 전부 예측할 수 있게 되어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한 세월이 길더라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남아 있는 사람이야말로 사랑하기에 마땅한 상대입니다. 음악이나 회화는 처음 봤을 때 뭔지 잘 몰라도 몇 번 되풀이해 보면서, 연애 상대는 미처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에 매력을 느끼면서 책은 이해할 수 없다고 화부터 내는 태도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끌리는 데가 있는, 그 감각이 책을 읽을 때도 매우 중요합니다.

책 읽는 사람이 비약적으로 줄어들자 출판계가 그 손실을 지탱하기 위해 내놓은 대안은 ‘대중적인 인문학’입니다. 인문학이니까 뭔가 심오한 걸 알려준다는 환상을 주는데 읽기는 편하지요. 고전을 근거로 상담을 해주는 책이 그 한 예일 것입니다. 당신은 이것이 사람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 사태보다는 낫다고 보나요?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정말 많은 책이 팔렸습니다. 아무리 난해한 책이라도, 미국이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그렇습니다. 놀랍게도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발레리나 릴케의 전집을 일본에서 살 수 있었습니다. 적국의 책을요. 물론 한일의 우정을 파기한 우매한 군국주의자들은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겠죠. 하지만 미국이든 유럽이든 일본이든 이런 책을 읽기를 원했던 건 확실합니다. 당신이 전쟁터에 나갈 때 책 한 권을 들고 가야 한다면 어떤 책을 가져갈 건가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상황에서 지금 나오는 그런 책을 들고 갈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정말 구원이나 치유가 필요한 지옥 같은 상황에 처하면 절대 그렇게 얄팍한 책을 들고 가지 않습니다. 책은 전쟁에 강합니다. USB도 전원도 없는 세계에서도, 물에 젖거나 흙이 묻어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시대에 진정한 위기가 찾아왔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젊은 사람이든 늙은 사람이든 정말로 심오한 철학과 문학을 찾는다고 믿고 이것은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한 명은 전쟁에 못 데려가지만 사랑하는 책 한 권은 데려갈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사상가’라는 분류가 없습니다. 그렇게 불리는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만 일본과는 개념이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우선 자기 이론을 가진 사람이 드뭅니다. 동서양 이론에 관한 충실한 전달자로서의 철학자는 많이 있지만요. 전달자로서의 철학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일단 그들은 충실하지 않습니다. 오리지널을 전달하는 사람은 절대로 ‘오리지널’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자신을 표현하려면 절대로 타인의 말에 몸을 맡기고, 정중하고 또 정중하게 읽고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파괴해야 합니다. 자신이 부서진 폐허 속에서 일어서는 것이 오리지널리티입니다. 동서양 철학을 카피해서 데이터를 모으는 것.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고, 제대로 읽지 않아서 생기는 일입니다. 전달만 하는 사람은 절대로 원전을 받아들인 사람이 아닙니다. 받아들인 사람은 그런 일을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한 대중적인 철학자가 “너는 네가 말한 대로 살고 있느냐”는 비판을 듣자 이렇게 반박합니다. 철학자는 옳은 말을 할 뿐이라고요. 철학자는 그것의 실천에 관해서는 책임이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그런 시시하고 별볼일 없는 인간들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재일한국인에 대한 반대 데모를 반대하는 데모가 있었습니다. 저도 거기 참여했는데요, 나온 사람은 어떤 사상가와 저, 단 두 명이었습니다. 입만 산 일본인이 너무 많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부분의 유명한 사상가는 그런 데 오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선보인 강연에서 라캉의 거울이론을 들어 나와 내가 속한 전체를 혼동하는 자아에 관해 말했습니다. 극우적인 한일 양국, 또 양국의 관계에 대한 메시지였는데요, 가장 먼저 생각난 게 얼마 전 한국에서도 논란이 됐던, 김연아를 이용한 광고, “너는 대한민국이다”였습니다. 아, 그건 좀 이야기하기 어렵겠는데요. 그러니까 김연아라는 표상에 대해서, 한국에서의 위상에 대해서 제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현재 상황이라는 걸 존중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이야기하는 건 피하고 싶어요.

일본의 극우적인 상황이 우려스럽습니다만 한국 역시 아무렇지 않게 ‘국가’에 ‘나’를 대입하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회복될 날이 올까 싶습니다. 이미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진정한 우정을 기르기에는 1000년이 걸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1000년이 지나도 양국의 불행한 역사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1001년째 봄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 대척점이라고 말하는, ‘세계인’은 대안일 수 있을까요? 먼저 확실히 해둬야 할 것은 동양과 서양이라는 개념이 서양에서 시작됐다는 전제입니다. 세계화 역시 서양에서 시작됐습니다. 아시아인, 미국인, 아프리카인의 분류는 유럽인이 자기들을 주체로, 나머지를 타자로 칭한 것입니다. 우리를 아시아인이라고 그들 멋대로 부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근본적인 부분을 비판적으로 살펴보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과정 없이 서구가 만들어낸 ‘코스모폴리탄’을 따른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유럽이 만들어낸 찬란한 문화유산이나 사상의 위대함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그것에 대해 비판하지 않는 순간 사상가의 자격도 잃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은 영어교육에 큰 힘을 쏟는 나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어가 ‘공용어’라는 인식이 있는 한편 언어 기반이 달라서 익히기도 쉽지 않은데 꼭 필요한가?, 라는 의심도 있습니다. 번역을 하면 됩니다. 모든 사람이 영어를 해야 한다는 건 제국주의입니다. 번역하고 번역하고 몇 번을 번역하고 또 오역도 하면서 만들어지는 게 문화입니다. 불교 경전은 산스크리트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을 중국이 번역하고 한국이 번역하고 일본이 번역했습니다. 수많은 번역을 거쳐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언어의 한계에 부딪히기 쉬운, 동양의 서양 철학 전공자로서 한계를 느낀 적은 없나요? 벽이 아니라 차이를 공부하고 비판하고 즐거워하는 태도, 차이를 짚어가는 태도가 번역입니다. 저도 끊임없이 번역합니다. 번역을 통해서만이 새로운 문화가 태어납니다. 가장 최근의 저서에서 번역론을 다루었는데, 루터가 성선설을 번역했고 거기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마호메트도 천사와 인간 사이에서 번역을 맡았습니다. 말하자면 타자의 말을 존중하고 그 말을 옮기는 것이 번역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말을 해야 한다는 건 폭력입니다. 외국 사람이 괴물로 보이는 것도 책을 읽으면 해소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 나라의 소설을 한 번만 읽어봐도 그 안에서 웃고 울고 고민하는 똑같은 인간임을 그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번역의 중요성입니다. 차이를 놓아두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한국에서 독서의 미덕은 이 책 저 책을 읽는 것입니다. 하지만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은 “책은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파워풀하게’ 좋아하는 게 뭔지 보여준달까요.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고 싶습니다. 책을 좋아합니까? 일반적인 의미에서는 아닐 겁니다. 계속해서 책을 읽는 타입이 아니거든요. 하지만 이 질문은 이상합니다. 넌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와 같은 질문이니까요. 일반 여성 전체가 얼마나 좋으냐고 물어보면 곤란한 것과 같습니다. 한 사람의 정말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서 묻는다면 당당하게 가장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요. 음반에 비유하면 명반 하나가 아니라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수많은 음반을 가진 인간이 행복하겠죠.

<책과 혁명>의 로버트 단턴은 프랑스 혁명의 동력이 고전이라기보다 수많은 사람의 인식을 뒤흔든 추잡한 금서들이었다고 주장합니다. 애정을 쏟고 반복해서 읽는 책은 꼭 고전이 아니어도 관계없을까요? 저는 지식 사회 건설과 대중문화 양쪽에서 벽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알아두어야 할 건, 지식인이란 지식인을 비판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보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당신의 인생이니 당신이 선택하시오, 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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