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 VS. 21세기 청춘

아무렇지도 않게 과거를 버리는 곳에서 미래는 무슨 놈의 미래.

Culture판형

일각에서 대중문화 관련해 ‘90년대’ 얘기가 부쩍 잦다. 그때가 좋았다는 식으로 부풀리는 게 기본 골격인데, 지금을 한탄하며 “우리 땐 안 그랬다”는 ‘꼰대’ 풍 성토도 다분하다. 그땐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은? 수수께끼 맞히듯 가벼이 넘어가지진 않는다.

확실히 90년대엔 대중문화와 그것을 둘러싼 담론의 ‘어화둥둥’이 있었다. 새로 생긴 ‘문화’ 잡지만 몇 종이었나? 뭔가 박 터지듯(대박이라는 표현도 없이) 한바탕 쏟아져 나왔으니, 서점, 극장, 음반점, 텔레비전 앞이 골고루 북적 거렸다. 주류 음악은 주류 음악대로 잘 팔렸고, 소수의 매니아를 위한 음악은 소수의 매니아 음악대로 활기를 띠었다. 심지어 불법 복제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도 불야성이었다. 검열이 가위질한 영화의 온전한 판본을 보려는 사람들로 대학교 노천극장은 얼마나 빽빽했었나. 적어도 그만큼은 풍성했다. 여기서 비약. 과연 남한의 90년대는 대중문화의 마지막 황금기였을까?

얼추 그런 것도 같다. 노래 한 곡 듣는 일, 영화 한 편 보는 일, 처음 접한 이름을 알아가는 일, 좀처럼 층을 이루며 쌓지 않는 요즘은 들뜬 분위기와는 달리 지루하기 일쑤다. 보존하며 갈고 닦기보다, 죄다 부수고 새로 짓는 것만을 지독히도 선호하는 이곳에서는 대중문화 역시 트렌드라는 망토를 두른 유령으로나 존재하기 십상이다. 더구나 21세기의 유령은 속도가 빠르다. 어떤 노래를 처음 들었다면, 1분 만에 뮤지션에 대한 파악이 가능하다. 10분이면 계보를 읊고, 20분이면 비평적 관점을 획득하며, 30분이면 친구가 되기도(페이스북에서요청을 수락한다면) 한다. 비교해서, 90년대의 30분은 어땠을까? 그땐 그저 음악을 듣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을 ‘개인적 시간’이라 해보자. 개인이 대중문화를 경험하고 판단해 저장하는 시간. 90년대 ‘개인적 시간’의 길이는 대체로 깊이와 밀도를 담보하려는 노력으로서 지향점이 있었다. 잘난 사람 잘난 대로 잘난 척할 수 있는 맞춤한 체계, 90년대는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이었다.

21세기가 되자, ‘개인적 시간’을 ‘인증’이 대체하기 시작했다. 영화 포스터를 블로그에 올리는 동시에 그 영화를 본 사람이 되고, 책 표지를 찍기만 해도 그 책을 읽은 사람이 된다. 못난 사람 못난 대로 살지 않고 얼마든 잘난 척할 수 있는 놀이. 대중문화는 끼리끼리 선택하고 경험하고 결정하는 놀이터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존의 ‘개인적 시간’이 지향했던 밀도나 깊이나 애착이라는 문제에서, 달라진 대중은 그런 지향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무시하는 쪽으로만 힘을 썼다. 다름을 인정하자니 배알이 꼴리는, 끌어내려서라도 이쪽에 맞추려는, 같은 구호를 외쳐야 직성이 풀리는, ‘다수’의 띠를 두른 대중은 더 이상 관객이나 감상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고객님’으로 전면에 나타났다.

‘고객님’의 논리는 확고하다. 우리 돈 주고 우리가 즐기는데 어떻게 우리 마음에 안 들 수 있나? 시청자 게시판에는 극본을 바꾸라고 소리치고, 마음에 안 드는 영화엔 환불을 요청한다. 수요가 그렇게 나오자 공급이 알아서 태도를 바꿨다. “네 고객님, 이 영화는 감독이 지 맘대로 만든 게 아니고, 고객님 입맛에 맞도록 만드신 영화세요.” (이 해괴한 높임법의 유행은 달라진 대중을 모시려다 일어난 해프닝일 것이다.)

다른 질문. 그럼 수준은? 대중에게 ‘수준’은 제법 민감한 단어다. 모면책으로는 일단 우기는 화법이 있다. “내가 좋으면 그게 최고지!” 아니, 그렇지 않다. 아사다 마오를 좋아한다고 아사다 마오가 최고가 되는 건 아니다. 대번 항변이 온다. “취향이니 존중해달라.” 물론 존중한다. 하지만 존중의 문제만은 아니다. 엄연한 사실의 문제다. 아무리 케니 지를 좋아하는 취향을 존중해도, 케니 지가 마일스 데이비스와 같은 수준이라 말할 수 있나? 취향이나 아름다움에 우열이 없다는 생각은 그것을 애호하고 연마하려는 스스로를 향할 땐 몰라도, 밖으로 향하는 주장이 되는 순간, 빤히 보이는 밑천을 감추려는 알량한 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톡톡 튀는 개성’을 무기로 ‘나는 나’라고 내세우던 90년대의 행진과는 달리, 21세기는 ‘대세’를 따르며 ‘대박’을 꿈꾼다. 어차피 죄다 트렌드의 농간이라지만, 90년대엔 그 트렌드로부터 개인이 개인일 수 있는 여건이 성립되기도 했다. 지금은 ‘대세’를 따르지 않으면 곧장 ‘따’로 몰릴 판. 집단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대중은 저 높은 곳이 아니라, 여보란 듯 더 많은 곳을 택한다. 다르다고 주장하면 놀림감으로나 삼는다. ‘사차원’이라는 명명을 보라. 누군가를 ‘사차원’으로 분류하는 기저는, 우리는 ‘다수’라는 간편한 안심이다. ‘손발이 오그라든다’느니 ‘허세를 떤다’느니 하는 유행어도 결국 뭔가를 깎아내리려는 의도다. 정작 무엇이 허세를 떠는 것이고 무엇이 드높은 이상을 말하는 건지 구분하지 않는다. 능력도 관심도 없기 때문이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90년대 풍요로운 대중문화를 종횡무진 누리며 ‘나는 나’라고 생각했던 20세기 소년, 그리고 수많은 콘텐츠 사이를 방황하다 결국 사람 몰리는 곳을 찾아간 21세기 청춘. 두 사람이 만난다. 그런데 20세기 소년은 21세기 청춘에게 연신 묻는다. “아프지? 아프지 않니? 아플 거야.” 그러거나 말거나 21세기 청춘은 저희끼리 논다. 노는 척이라도 한다. 20세기 소년은 저희끼리 못 논다. “그때가 좋았지” 죽은 자식 불알 만지듯 할 뿐, 그들만의 문화적 경험을 역사로 세우지 못한다. 그저 눈치를 보다가 안 끼워준다고 토라져 “우리 땐 안 그랬다”는 소리나 흘린다. ‘찌질이 열폭한다’는 말은 이럴 때 참 유용하게도 쓰일 판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은 얼마 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촬영현장에서 스텝들이 하는 말. “140자로 영화평을 쓰는 개새끼들은 도대체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어.”’ 이 멘션은 일각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가장 흥미로운 건 이른바 <키노> 세대의 반응이었다. 그중 8할은 누구보다 노골적으로 정성일을 ‘씹었다’. “언제적 정성일이냐, 아직도 이런 소리 하냐, 평론가들이 이러니까 영화평론이 망한 거지….” 보느니 참담했다. 어차피 팩트를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님에도, 철저한 부정으로 일관했다. 그 부정은 무엇을 향한 걸까? 영화를 전공한 후배는 이렇게 말했다. “정성일이 지금 어디 교수이기만 했어도 저랬을까 싶어요. 비열하고 저열해요. 최소한의 우정도 없어요.” 20세기 소년은 또 다른 20세기 소년에 대한 신뢰를, 원래 그런 게 있기나 했냐 듯이 상실해버렸다. 같이 놀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기회만 있으면 서로를 밟고 싶어 안달이다. 이유는 뻔하다. 모두 실패했다. 모두 돈이 없다. 아무도 ‘갑’이 되지 못했다.

좀 더 약삭빠른 부류도 있다. 잇속에 밝고 아양떨기엔 도가 텄다. “반가워요 21세기 청춘님, 전 당신 편입니다. 제가 좀 동안이죠? 아이돌 노래도 잘 알아요. 젊게 살거든요. 힐링이나 멘토 필요하세요? 당신의 얘기를 들어드릴게요. 그리고 당신의 얘기를 대신 해드릴게요. 편하게 형이라고 부를래요? (고객님?)” 여기는 과거를 버리는 나라. 어쩌다 남은 건 박제로 만든 뒤 후진 이름표를 단다. 곧 김추자가 새 앨범을 낸다. 과연 이곳의 20세기 소년과 21세기 청춘은 그 앨범을 사이에 두고 어떻게 만날까? 역사라고는 없는데 유난히 미래라는 말은 횡행하는 이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