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표절이냐, 참조냐,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로다

2014.04.14GQ

지금 음악 시장에서 표절만 한 딜레마도 없다. 그보단 무엇을 어떻게 참조했느냐를 살벼봐야 한다.Media판형새로운 노래가 나온다. 곧장 표절 논란이 따라 붙는다. 유튜브만 켜면 온 세상 노래를 다 들을 수 있는 요즘 음악 소비자들은 표절 시비를 거는 일을 놀이처럼 여기는 듯하다. “이 곡은 어떤 곡을 베꼈다”고 주장하는 일이 “나 음악 좀 많이 들어”와 비슷하게 들린달까.

그런데 과연 그런 시비가 뮤지션에게 치명적인가? 놀랍게도 표절 시비에 휘말린 작곡가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곡 작업은 물론 TV에 나오며(박진영), 라디오를 진행한다(프라이머리). 역설적이지만 되레 유명해진다는 점에서 유리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러니까, 표절 시비가 차라리 홍보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는 시대다. 신보 음원 유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과 별 차이 없어 보인다. 음원 유출이 큰 사건처럼 보이던 때가 있었다. 음반을 팔아야 하는데, 노래가 미리 공개되면 소비자들이 음반을 살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제는 어차피 음반이 안 팔린다. 유출 관련 뉴스는 홍보 효과에 더 가깝다.

막상 표절은 친고죄다. 고소당하기 전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8마디 이상 유사하면 표절”은 90년대에 통용되던 얘기였다. 지금은 걸핏하면 표절을 지적하고, 대수롭지 않게 방어한다. 그저 가만히 있는 방법도 쓴다. 그러면 다른 노래가 시비에 휩싸인다. 요즘 음악 시장은 실시간 차트를 사용할 만큼 회전율이 빠르다.

그러니까, 지금 음악은 명품 가방처럼 소비되고 있다. 진짜인가, 가짜인가. 음악은 브랜드가 달린 물건이 아니니, 진짜와 가짜를 명백히 가릴 수 없는데도 말이다. 물론 어디서도 들어본 적 없는, 구별하자면 ‘진짜’일 노래는 표절일 확률이 없다는 점에서 깨끗하다. 그런데 깨끗하다고 다 좋은 노래라는 보장은 없다. 진짜인가 가짜인가가 모든 가치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될 때, 다른 가치는 제대로 평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행을 따르거나 기존 곡을 참조하지 않은 채 자기만의 음악을 만드는 것은 미덕일 수 있다. 미덕일 뿐, 의무라 볼 순 없다.

표절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표절과 참조를 구별할 필요를 말하려는 것이다. 참조하다 보면 표절이 생길 수도 있지만, 참조 자체를 전부 표절로 몰 수는 없다. 그리고 작곡가들이 그저 노래를 쉽게 만들려고 다른 곡을 참조하는 일은 드물다. 그보다는 지금 뜨거운 음악을 지나치기 어려워서다. 동시대성에 대한 욕심이랄까? 또한 작곡가가 원래 좋아하던 음악들이 신곡에 묻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욕심과 취향의 영역마저 단죄의 대상이 된다면, “곡을 쓸 때 남 노래는 안 듣는다”는 문희준 식의 황당한 자부심이 정당화된다. 2000년대 초 문희준은 표절 논란이 생겼을 때 “곡 만들기 전에 노래를 듣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까지 성실한 뮤지션인가? 글쎄. 음악가가 음악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게으름이거나, 더 보태면 직무유기가 아니고 과연 뭘까? 모든 참조를 부정하기 보다, 어떻게 참조했느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YG엔터테인먼트와 SM엔터테인먼트는 상대적으로 표절 논란에서 자유로운 편이다. 그리고 두 회사가 다른 음악을 참조하는 방식은 꽤 달라 보인다. SM은 유행과 별 상관없이 하고 싶은 걸 해 붙이는 식이다. 악기나 소리를 쓰는 방식에서 결코 당대에 뒤떨어지지 않지만, YG처럼 참조의 대상, ‘레퍼런스’를 확고히 드러내진 않는다. 반면 YG의 결과물에선 여러 해외 뮤지션의 이름이 떠오른다. 그리고 유행의 최전선으로서 ‘레퍼런스’를 과시한다. 동시대의 음악을 참조할 때 시간은 중요한 요소다. “한국에서 처음”이라서가 아니라, 음악이든 패션이든 지금의 것을 곧바로 해낸다는 점이 YG의 강한 무기다.

그리고 뮤지션의 취향이 노골적으로 자신의 음악에 묻어나는 경우가 있다. 데뷔 음반을 낸 김아일의 ‘제주도’를 들으면 두 곡이 떠오른다. 그랜드마스터 플래시의 ‘The Message’와 스팬다우 발레의 ‘True’. 김아일은 자신이 좋아하는 뮤지션의 영향이 곡에 드러나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그는 ‘The Message’의 “Don’t push me cause I’m close to the edge”란 구절을 그대로 가져와 뒷 마디에 새로운 가사를 연결해 붙였다. 소리를 다듬은 방식은 80년대 장르인 뉴웨이브, 뉴 로맨틱스와 닮아 있다. 실제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울트라복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울트라복스와 스팬다우 발레는 대표적인 뉴 로맨틱스 뮤지션이다. 견고한 밑바탕을 통해, 참조 대상을 자기 것으로 변형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그의 복장, 뮤직비디오, 가사는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다. 참조의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공부했을때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은 그보다 좀 더 정공법을 택한다. 나얼의 전작 ‘You & Me’는 명백한 필리솔 발라드였다. 목소리는 더 스타일리스틱스의 러셀 톰킨스 주니어 같았다. 브라운 아이드 소울 신보의 ‘Philly Love Song’은 춤추기 좋은 필리솔이다. 제목부터 확고하다. 헤롤드 멜빈 & 더 블루 노츠의 ‘The Love I Lost’가 떠오른다. 이런 흐름을 시리즈로 볼 수도 있다. 그렇게 브라운 아이드 소울은 보컬그룹이 모범으로 삼을 만한 음악에 가까워지고 있다. 나얼을 중심으로 듣고 연구해온 소리를 원본에 가깝게 재현한다. 나얼은 유독 레코드 가게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얼굴이다. ‘진정성’이란 낯 뜨거운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물론 모든 참조가 긍정적이진 않다. 가인의 ‘진실 혹은 대담’의 드럼과 베이스 구성은 로빈 시크의 ‘Blurred Lines’와 흡사하다. ‘Blurred Lines’는 작년 최고의 히트곡이니, 욕심이 났을 터.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진실 혹은 대담’은 ‘Blurred Lines’와 분명히 다르다. 참조하긴 했는데, 소리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는 인상. 작가 지망생들이 기성 작가의 문장을 필서하듯이, 어떤 작곡가들은 기성곡 카피를 연습한다. 특정 질감을 똑같이 따라 만들어내는 훈련인 셈이다. 그래야 참조의 대상 없이도 생각한 소리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 ‘진실 혹은 대담’의 드럼과 베이스는 ‘Blurred Lines’의 단단한 드럼과 베이스와 거리가 있다. 그저 “표절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런 논의는 이어질 수 없다. 참조 방식을 파악하는 일은 과연 그 작곡가가 어떻게 음악을 만들고, 그것이 탄탄한지 흉내만 내는지 가늠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한편 참조의 단골손님이라면 ‘레트로’가 있다. ‘레트로’를 음악성과 동일시하는 착각은 “옛날 것은 다 예쁘다”는 환상과도 같지만, 여전히 시장에서는 유효하다. 날카롭고 정확한 지점없이 그저 오래된 소리를 버무린 곡이 작가주의적 음악으로 탈바꿈한다. 프라이머리가 쓴 ‘I Got C’, 스피카의 ‘You Don’t Love Me’에서 구체적 시대나 뮤지션을 떠올리긴 어렵다. 그보단 가까운 것을 답습하는 것처럼 들린다. 프라이머리가 표절 논란에 휘말린 카로 에메랄드, 스피카의 곡과 시비가 붙은 클래리 브라운 & 더 뱅잉 래킷츠의 곡은 이미 재가공품이다. 발매된지 얼마 안 된 ‘레트로’풍 노래다. 그렇다고 ‘레트로’가 당장 새로워 놓칠 수 없는 동시대적 유행이라 볼 수도 없다. 그렇게 뭔가를 참조한 노래를 재참조하는 데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표절 논란이 거셀 경우, 작곡가는 사과문을 내고 음원을 내리는 식으로 대응한다. 거기까지다. 논란 중에 판매량은 폭증한다. 표절 판결이 나도 솜방망이 처벌이다. 박진영은 김신일과의 소송에서 졌지만, 고작 5천6백93만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진짜를 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래는 다이아몬드가 아니다. 제대로 가릴 수도 없다. 오히려 어떤 곡을 어떻게 참조했는지 따져 보는 것이 음악을 현명하게 소비하는 방법 같다. 무엇을 참조했느냐는 음악가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 그 지점을 파고들 때, 비로소 소비자는 음악가의 진짜 목표를 듣는다.

    에디터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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