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을 향한 시선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가 양분하는 시선詩選의 구도는 여전히 공고하다. 하지만 시가 그렇듯이, 튼튼하고 안전한 것이 시선의 미덕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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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격 있는 시선은 출판사의 정체성과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창비’와 ‘문지’는 사실상 그들만의 고유한 시선을 통해서 성장해왔으며, 출판사의 대내외적 정체성을 만들어낸 정신적 배경이었다.

1975년 신경림의 <농무>로 시작된 창비시선은, 2014년 3월말 372번째로 황학주 시집을 출간했다. 문지시선은 1978년 황동규의 시집을 시작으로 2011년 400번째 시집을 출간했으며, 2014년 4월 현재 449권에 이른다. 창비시선의 대표적인 시인은 신경림, 고은, 김남주, 백무산. 문지시선은 이성복, 황지우, 최승자, 기형도가 떠오른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지성적 흐름을 대표하는 두 측면이 곧 두 시선이었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시대 변화에 따라 창비시선과 문지시선의 희비는 다소 엇갈렸다. 한 시대의 시적 영웅이 김남주에서 기형도로 바뀌는 흐름과도 일면 맞닿아 있다. 현실 참여적 문학을 주도하던 창비시선의 대중적 영향력 약화는 창비출판사 자체의 담론적 위상을 흔들만큼 파급력이 컸다. 위기를 겪은 1990년대 중반 이후 창비시선의 상당수는 ‘자연주의(전원주의)’나 ‘휴머니티에 기초한 서정시’ 경향으로 채워졌다.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측면은 있었지만,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을 정확히 포착하거나 견인했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웠다. 자기방어적이라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적어도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창비시선이 담론적으로든 대중적으로든 영향력 있는 신인을 별로 배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문학사적 사실에 해당한다. 특히 2000년대 초중반 한국 시의 미적 쇄신 국면에서 창비시선은 보다 곤혹스러웠다. 하지만 현재 창비시선은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이전의 ‘침체기’에 비해 활력을 찾았다고 볼 만한 국면에 있다. 정통 창비 진영의 노력 외에도 2000년대 중반 수혈된 좀 다른 미적 계열의 시인들, 예컨대 이장욱과 진은영 같은 시인을 시선 편집위원으로 참여시킨 것이 주요했다. 지금 창비시선은 현실참여적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하고 담론적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실험적이고 감각적인 언어예술을 추구하던 문지시선의 위상은 이에 비해 굳건히 지속되었다. 시대의 정치적, 문화적 흐름이 문지시선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문지시선이 자기 정체성과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온 부분 역시 평가할 만하다. 문지시선의 위상은 당대의 시인들이 가장 포함되고 싶은 시선이라는 차원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지시선 역시 다양한 도전과 비판에 직면했다. 대체로 이 비판의 핵심은 문지시선의 ‘귀족화’ ‘보수화’로 인해 좀 더 전위적인 감각이나 시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2000년대에는 전통적 권위에 안주하면서 문지시선의 정신에 걸맞은 문제적 신인 발굴에는 인색한 반면, 이미 ‘대중성’이 확인된 안전한 시인들을 사후적으로 영입한다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창비, 문지와는 다른 제3의 노선을 내세우며 등장한 출판사 문학동네는 즉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문학동네 역시 문학동네 시선을 꾸렸다. 그러나 최초의 문학동네 시선은 최근 50호를 발간한 그 시선이 아니다. 문학동네는 상대적으로 소설과 외국소설 번역에 많은 공을 들였다. 문학동네 시선은 제대로 자리를 잡기도 전에 시선 출간을 중단했다가, 2008년에 현재 시리즈를 기획해 1호부터 다시 시작하는 재출간의 부침을 겪었다. 창비시선과 문지 시선의 완강한 틈바구니에서 미적 지향이 상대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시집 시장의 제3의 길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시선에 각별한 애착을 지닌 출판사 내부 편집자(시인 김민정)가 등장해 새로운 시선을 50권까지 이끌었다는 점에서 장기적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시선의 성격은 아직 모호한 데가 있다. 처녀시집이 별로 없으며, 문학동네 출신 시인이 많지 않다는 것이 모호함의 핵심이다. 시선의 성공 여부는 명확한 방향성과 더불어 창조적 잠재성을 지닌 신인을 발굴해 그를 출판사의 대표 시인으로 만들수 있느냐에 달렸다. 현시점에서 문학동네 시선의 성공 여부를 선뜻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다.

이런 차원에서 2000년대 ‘시의 귀환’을 가능하게 한 문예중앙시선을 언급하는 일은 억지스럽지 않다. 우리 시대의 가장 문제적인 시인 중 하나가 된 황병승과 가장 인기 있는 시인 중 한 사람인 김경주, 매우 도발적이고 개성적인 김민정의 첫 시집이 모두 여기에서 나왔다. 역시 문제적인 조연호의 시집이 출간되었으며, 이러한 시선의 출간을 통해 계간 <문예중앙>은 2000년대 중반 한국문학의 새로운 문학담론을 주도한 가장 논쟁적인 잡지일 수 있었고, 영향력 있는 평론가들을 배출하고 성장시켰다. 그러나 모출판사의 복잡한 사정으로 2008년 계간 <문예중앙>이 휴간되면서 문예중앙시선은 44권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문예중앙시선은 야심 있는 출판사라면 여전히 참조할 만한 사례다.

민음사의 ‘민음의 시’도 빼놓을 수 없다. 민음사시선은 1986년 고은의 시집으로 시작해 올 2월 201호 손미의 시집에 이르렀다. 적잖은 이력이다. 그러나 김영승, 장정일을 배출하고 최승호의 첫 시집 <대설주의보>이 나왔던 민음사를 생각해보면, 이후의 민음사시선이 그리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 출판사의 ‘브랜드 파워’에 비해 1990년대 중반 이후의 민음사시선은 시장에서 다소 어정쩡한 위치를 점했다. 민음사가 소설에 좀 더 집중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대적 감수성의 변화에 출판사가 어떤 노선을 택하는가에 관한 내부 원칙이 본질적이다. 원칙 설정의 문제는 민음사가 소유한 시문학상인 김수영문학상을 다소 애매하게 운영하는 방식에서도 감지된다. 그러나 민음사시선에는 200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눈에 띄는 장점과 장래가 기대되는 면이 엿보인다. 민음사의 문학계간지 <세계의 문학> 신인상 출신 시인들의 시가 나쁘지 않으며, 그들이 낸 처녀시집이 상대적으로 눈에 띈다. 또한 황인찬 같은 경우는 현대문학 출신 신인이지만 첫 시집은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2000년대 이후 출간된 처녀시집 가운데 가장 좋은 시집 중 하나였던 <구관조 씻기기>.

민음사시선은 최근에 새로운 변화를 시도했다. 시선의 얼굴인 하얀색 하드커버 표지에 색을 입혔다. 북돋워줄 만한 의욕이다. 다만 출판사들에 주문하고 싶은 것은 책표지의 변화 이상으로 예각화된 색깔과 지향을 드러내는 선택과 결단이다. 어차피 시집은 자본화가 어려운 장르다. 출판사들이 정체성과 이미지를 여기에서 찾고자 한다면 상품으로서의 매력이 아닌 정신의 전위와 품격을 갖춰야 한다. 단호한 자기 분야가 필요한 장르가 시이듯이, 시인선 또한 마찬가지다. 문화생태계와 정신의 지형도에서, 이것은 편협하거나 배타적인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