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산책로 <1>

좋은 계절에 열세 명의 남자가 열세 갈래 길로 서울을 산책했다. 언제 어떻게 왜 그 길을 걷는지, 단정하게도 전했다. 산책은 도시와 개인이 맺는 호젓한 유대. 그들이 걸을 때, 서울은 어쩐지 멋진 도시가 된다.

01 서순라길 조선시대 순라군들이 야간에 순찰을 돌던 길. 그래서 그런지 밤길도 운치있다. 02 잔술집 종묘 주변에 노인들이 몰리면서 생겨났다. 막걸리며 소주를 한 잔씩 계산하며 마신다. 탁자도 있긴 하지만 대개는 서서 몇 가지 반찬 안주를 집어먹는다. 03 세운상가 곧 철거될 예정이지만 아직은 들어가서 볼 수 있다. 04 마약김밥 모녀김밥에서 파는 김밥에 붙인 별명이 이젠 아예 장르가 되었다. 손가락만 한 길이의 김밥에 겨자 소스를 찍어 얇게 썬 단무지와 함께 먹는다. 05 을지면옥 공구가게들이 즐비한 거리에 갑자기 나타나는 냉면집. 서울에서 평양냉면을 얘기할 떄 빠지지 않는 집이다. 이 집만의 독특한 소스에 찍어 먹는 편육도 인기다. 06 필동해물 1971년 개업. ‘모듬해물’을 시키면 쑥갓 위에 별의별 해물을 수북하게 담은 접시가 나온다.

창덕궁에서 필동까지 일요일 오후,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서순라길로 들어선다. 어귀에 화단이 있는데, 철쭉 무더기가 어쩐지 좀 촌스럽다. 나라면 여기에 무엇을 어떻게 심었을지 잠시 생각한다. 왼쪽으로는 높은 담장이 있고, 오른쪽으로는 귀금속 상점과 공업사, 선술집과 식당이 줄줄이다. 순라길이라는 홍어삼합집이 괜찮다는 얘길 들었지만 즐길 줄 모르므로 매번 지나친다. 종묘 정문쯤에 다다르면 뚱순네 같은, 잔술을 파는 집이 몇 있다. 종묘에 모이는 노인들이 만들어낸 독특한 낮술 방식이다. 막걸리 한 잔에 1천원, 몇 가지 반찬 안주를 젓가락으로 집어먹는다. 뚱순네 옆에 있던 정읍커피에서 1천원짜리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낙이 있었는데, 얼마 전 없어졌다. 대신 뚱순네 앞에서 ‘뚱순이’ 아줌마와 할아버지들이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다. 종로에 이르러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운상가다. 번쩍거리는 조명이 즐비하지만, 뭔가 농축된 듯 어두운 길, 상가 화장실에 들어가 길게 소변을 봐도 풀리지 않는 어둠이다. 청계천은 어둡지 않고 밝다. 세운교를 건너기 전 광장시장에 들러 마약김밥을 먹을지 잠시 고민. 세운교를 건너며 버드나무를 본다. 형광빛 새잎이 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짙푸르다. 자귀는 아직이지만 곧 솜털 같은 꽃을 피울 것이다. 다리 건너 공구상가엔 재미삼아 살게 많다. 볼트집에서 볼트를 사고, 자석집에서 자석을 산다. 복권집에 들러 복권도 산다. 을지면옥에서 냉면을 먹고 나와 충무로역 쪽으로 걷는다.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한 편 본다. 보고 나올 때쯤 극장 앞에서 누군가와 만날 약속을 잡는다. 그 사람과 필동해물에 들러 모둠해물 한 접시와 소주를 시킨다. 먹고, 자러 간다. 전기철(원예가, ‘식물의 취향’)

 

 

01 아차산 생태공원 공원에서부터 둘레길을 걷는다. ‘아차산 명품 소나무 1호’에서 바라보는 용마산이 꽤 괜찮다. 02 뚝섬유원지 자전거를 빌릴 수 있어서 시작을 이곳에서 할 때도 있다. 강변을 따라 페달을 밟다보면 쉽게 천호대교에 도착한다. 03 테크노마트 하늘정원 하늘정원에선 바람을 온전히 맞을 수 있다. 어떨 때는 야경보다 낮이 좋다.

광진구 횡단 작업실이 생기기 전엔 광진도서관에서 작업을 많이 했다. 도서관은 언제나 책을 꺼내 볼 수 있으니 시나리오를 쓰기엔 최적의 장소다. 답답해지면 아차산 생태공원으로 향한다. 고구려 역사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고구려정이 나오는데 그 앞 바위에 앉아 서울을 보거나, 파도 같은 바위를 감상한다. 쭉 내려오면 일명 워커힐 산책로까지 다다른다. 봄에는 사람이 많으니 피하는 편이다. 쉬다 걷다를 반복하다가 테크노마트에 갈 때도 있다. 영화를 보지 않고 하늘정원에서 잠실철교를 바라본다. 정리할 생각이 남았으면 강변을 따라 뚝섬유원지까지 걷는다. 이렇게 오래 걸으면 생각 같은 건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웬만해선 카페 같은 덴 들르지 않는다. 박훈정(영화감독)

 

 

01 나무 버드나무, 은행나무, 메타세쿼이아가 자라고 있는데 사실 어떤 종류의 녹음이라도 좋다. 02 물고기 징검다리에, 다리에 사람들이 물고기를 보려고 몰려 있다. 거기 껴서 한 번씩 본다. 03 갈대밭 가을에 2미터가 넘게 자란 갈대밭이 장관이다.

양재천변, 계절과 자연 수업이 없는 날, 집 앞의 양재천에 나간다. 점심 먹고 정오에서~1시경이다. 양재천변에 앉아 점심을 먹는 회사원들과 마주치곤 한다. 지금 연재 중인 ‘담바고의 문화사’나 다른 논문 주제들을 천변을 따라 거닐며 생각한다. 꼭 그러지 않더라도 충청도 청양에서 나고 자라, 살아서 움직이고 계절이 바뀌는 자연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하다. 미도아파트 앞에서 시작해 건너편에 적십자혈액원이 보이는 지점까지 걷는다.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 걸리는 거리다. 양재천은 서울 시내 다른 하천과 달리 냇물을 직선화시키지 않은 곳이 많다. 인적이 드문 숲으로, 나무에 가려진 냇물을 따라가보곤 한다. 봄이나 여름에 가면 시원해서 더욱 좋다. 안대회(한문학자)

 

 

01 호미화방 미술이란 말로도 다 담을 수 없는, 그리거나 만들기 위한 모든 것이 있다. 빨간 로고는 70년대, 한 홍대 대학원생이 디자인했다. 02 킨노토리카라 일본 관서지방에서 왔다. 다리나 날개가 아니라 닭가슴살만 튀겨 판다. 03 매거진 랜드 일본 서적의 입고가 빠르다. 과월호는 파격 할인. 구독을 대신 신청해주기도 한다. 04 절두산 순교 성지 ‘절두’는 ‘머리를 잘랐다’는 뜻이다. 1866년, 흥선대원군은 이곳에서 수많은 천주교 신자를 처형했다. 1967년, 같은 자리에 기념관, 성당, 공원이 들어섰다. 05 퍼블리크 프랑스 밀가루로 프랑스빵을 만든다. 디저트인 에클레르의 인기가 특히 좋다.

넓은 홍대와 토요일 아침 주로 토요일 오전, 아들 연우와 집을 나선다. 주말 아침의 홍대 골목은 고즈넉하기까지 하다. 밤이면 지나다니기도 버거웠을 길목의 호미화방부터 찾는다. 잘 보이는 곳에 진열된 신제품보단 밑에 깔리고, 키가 잘 닿지 않는 곳에 놓인 문구류를 살핀다. 중심에선 밀려났지만, 여전히 반가운 물건들이 곳곳에 있다. 오래전에 품절된 줄만 알았던 연필, 서울을 샅샅이 뒤져도 찾지 못했던 전동 지우개, 연필꽂이에 항상 꽂아두는 샤프 펜…. 부산스러운 가운데, 연우는 프라모델 락카를 신중하게 고른다. 산책이 끝나면, 집에 가서 같이 만든다. 화방에서 나오면 맞은편 닭튀김집 킨노토리카라에 들른다. 머스터드부터 초콜릿까지, 기분대로 소스를 쭉쭉 뿌려 먹는다. 근처 매거진랜드는 해외에서 ‘프리오더’ 중인 잡지를 이미 판매하고 있을 만큼 입고가 빠른 서점이다. 디자인 잡지를 들춰보다 매달 모으는 잡지를 똑같이 산다. 닭튀김이 애피타이저라면, 든든한 요깃거리도 필요하다. 상수역으로 나와 빵집 퍼블리크에서 깜파뉴와 우유식빵을 챙긴다. 닭튀김에도 초콜릿 소스를 뿌려 먹는 연우는 에클레르 쇼콜라를 한 입 베어 문다. 두성 인더페이퍼에선 종이를 만져본다. 슬슬 동네에 사람들이 들어찰 무렵, 앤트러사이트 카페를 기점으로 홍대 인근을 벗어난다. 짐이 좀 늘긴 했지만, 계속 걷는다. 페덱스를 지나면 거기서부터 좁은 2차선 도로다. 차는 여전히 드물고, 걷는 사람은 더더욱 없다. 몇 년 전만 해도 꽤 음침했지만, 이젠 가게들이 조밀하게 들어섰다. 길 끝의 나무 계단은 절두산 천주교 성지까지 이어진다. 한강이 보이는 나무그늘에 앉아 맛있는 빵을 나눠 먹는다. 김기열(‘GQ’ 아트 디렉터)

 

 

01 북악산 오랫동안 통제구역이었다가 성곽길을 중심으로 개방되었다. 백사실계곡에는 도롱뇽과 가재가 산다. 02 경복궁내 박물관 경복궁엔 두 개의 박물관이 있다. 국립고궁 박물관에서는 5월 25일까지 < 아름다운 궁중채화 >전이 열린다. 03 국제갤러리 5월 11일 까지 두 개의 전시가 동시에 열린다. 김홍석 ‘Blue Hours’와 데미언 오르테가의 ‘Reading Landscapes’다.

일요일 아침, 아무도 없는 청와대길 일요일 아침만큼은 그저 혼자서, 한적하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걷고 싶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청와대 사랑채 주변엔 사람이 없다. 국무총리 공관 방향으로 난 야트막한 언덕길. 선글라스를 낀 사복경찰이 가벼운 질문을 할 것이다. 그저 가볍게 대답하면 그만. 이제 사람 한 명 없는, 서울에서 가장 멀끔한 산책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해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걷는 기분이 썩 괜찮다. 경복궁 후문인 신무문으로 들어간다. 집옥재와 건청궁을 지나면 연못이 딸린 향원정이다. 긴 나무의자에 누워 20분쯤 있으면 주말 동안의 온갖 ‘독’이 해독된다. 국립민속박물관 쪽으로 나오면 국제갤러리가 있다. 전시를 보고 12시 전에 집으로 돌아가 점심을 먹는다. 박세훈(청운동 청년)

 

 

01 잠원지구 아이와 공놀이를 자주 하지만 최근엔 연을 자주 날린다. 그럼에도 아이가 제일 좋아하는 건 강아지 쫓기다. 02 구현대아파트 압구정의 터줏대감. 압구정을 떠올릴 때 현대아파트보다 먼저 생각나는 건 많지 않다.

압구정 걸음마 걷는 걸 싫어한다. 하지만 아이는 걸음마를 배우고 있다. 토요일 아침이면 함께 걸음마를 배운다. 구현대아파트에서 나와 단골집 커피트리로 향한다. 그곳의 커피 볶는 냄새는 언제나 식욕을 자극한다. 출출하면 몽돌교자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아이는 어김없이 목마를 태워달라고 한다. 잠원지구까지 일곱 개의 교통안전 반사경이 있는데 내 목 위에서 아이는 “있다, 없다” 놀이를 반복한다. 천천히 잠원 지구에 도착하면 매점에 들러 3천원짜리 비닐축구공을 산다. 미식축구 골대로 공을 집어넣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질렸는지 산책 나온 개를 정신없이 쫓아다닌다. 걷기 싫은 주말이면 아이와 함께 집 근처 구정중학교로 직행한다. 그곳 놀이터엔 아주 작고 예쁜 미끄럼틀이 있다. 양수인(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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