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유명해지고 싶어요?

누구나 기꺼이 유명해지길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가 제멋대로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는 부끄러움이라는 말조차 부끄럽다.

Society판형

누군가의 이름이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오르내렸다. 한 달을 단위로 이름을 노출하는 에디터로 일하다 보니 당연히, 직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익숙한 이름이 눈에 띌 때도 있다. 가끔은 놀리듯이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오, 실시간 1위 경축” 하는 식으로. 그게 뭐 대단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보낼 수 있는 문자다. 대답도 건조하다. “그러게, 정 기자는 잘 지내요?” 이런 식이다.

하지만 메시지는 무던하되 모니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사냥터 같았다. 알려진 이름은 공공재였다. 따르는 유명세가 냉혹했다. 과연 대단하고 폭력적이었다. 읽는 것만으로 머리가 저릿했다. 얼굴이 뜨거워졌다. 이 증오의 에너지는 대체 어디서 온 거지?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는데도 그게 권리인 듯한, 말도 아닌 말들이 범람했다. 누군가는 “유명해져서 얻을 수 있는 게 더 많으니 이해하고 참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어른인 척.

미디어는 유명한 이름을 조리돌리듯 쓴다. 이유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장사’가 되기 때문이다. 트래픽은 요즘 미디어가 비로소 돈을 벌 수 있는 판이다. 유명한 이름을 언급하거나, 깎아내리거나, 조롱하는 식으로 쓰는 기사는 굳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 이미 ‘기자의 양심’, ‘기사의 조건’ 같은 말은 순진무구하게 여겨지는 시장이 됐다. 매체가 많아도 너무 많고,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기사가 연이어 달리는 건 포털 사이트의 익숙하고 지루한 풍경이다. 그런 매체에 그런 기자…. 왜 그 이름이 ‘급상승’했는지에 대한 기사는 황사처럼 매캐하다. 더러는 어떤 여자가 (심지어 몇 년 전에) 가슴골을 노출했다거나, 망사옷을 입었다거나, 수영장에 들어갔다 나오는 순간의 사진 같은 것들이 이어지기도 한다. 지금 몇몇 인터넷 매체 기자들이 미쳐 있는 건 그런 사진과 유명한 이름이다. 그런데 그 판에 기꺼이 투신하는 개인들도 있다. 그것만이 뭔가 이뤄줄 것 같아서.

그러니 연예인이야말로 10대의 가장 명확한 목표가 되었다. 그들이야말로 개인이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하고 반짝이는 증거라서다. 공부해서 출세하는 시대는 끝났다. 고시에 합격한다고 행복할 것 같지도 않다. 회사가 보장할 수 있는 시간도 길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누군가에게 무대만은 평등해 보일 수 있다. 재능은 환산할 수 없으니 불확실하고, 무던히 노력하면 뭔가 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런 환상을 심어주는 데는 어른들이 능하다. 방송은 짧은 시간 자기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편처럼 보인다. 그래서 ‘리얼리티’와 ‘서바이벌’은 여전히 유효하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희비극, 오디션 프로그램은 누군가 유명인으로 거듭나는 넓은 문으로서 열려 있다. 생존은 어렵되 참여는 그렇지 않다.

주창윤 서울여대 교수의 책 <허기사회>에 따르면, 2009년 <슈퍼스타 K1>의 지원자 수는 72만 명이었다. 이후 급증했다. 2010년에는 1백34만, 2011년에는 1백96만, 2012년에는 2백8만명이었다. 단 한 명의 우승자를 뽑는 오디션에 지원한 사람의 숫자다. 모두가 진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것 나름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수치다.

일부는 장난 혹은 나들이 삼아, 아니면 한바탕 놀아보고 싶거나 웃기고 싶어 지원했을 것 이다. 주창윤은 이렇게 설명했다. “<슈퍼스타 K4>의 참가자가 2백만 명을 넘었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 사이에 낮은 수준의 분열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프로이트가 말하는 ‘2차적 나르시시즘’으로 이상적 자아에 대한 사랑과 좌절을 의미한다.” 설명은 이어졌다. “외부 세계로 사랑을 발산하지 못한다는 것은 일상적 자아(실제 ‘나’)와 이상적 자아(스타 꿈꾸기) 사이의 거리와 좌절 때문이다.”

조금 확실한 설명이 이렇게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회에서 ‘이상적 자아(스타)’에 대한 자기 동일시 욕망은 과도함을 넘어서있다. (중략) <슈퍼스타 K>에서 보이는 참여 현상은 개인들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자존감이 무너졌다는 것을 함축한다. 마치 과식 환자의 내면에 무기력증이 있는 것처럼.”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건 민주주의, 뭐라도 팔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건 자본주의다. 그 둘이 미디어에서 결합한 결과는 달콤하고 잔인하며, 가끔 민망하기까지 하다.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숫자가 곧 권력인 가장 일상적인 창이 됐다. 자기가 가진 것에 약간의 기술과 성의를 보태면 제한적으로나마 이름을 알릴 수 있다. 대중을 상대로 스스로 벌이는 오디션, ‘파워 트위터러’나 ‘파워 블로거’나 방식은 다르지 않다. 그들의 성의와 유익함을 부정할 순 없다. 하지만 판 자체가 혼탁하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순 없다. 거기서, 유명해지기 위해 자주 쓰이는 방법은 ‘권위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트래픽이 필요한 기자들이 즐겨 쓰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 기자들만 그러는 것도 아니다. 이름을 알리고 싶은 누구라도, 유명한 누군가를 ‘디스’하는 식으로 덩달아 유명해질 수 있다.

최근 카뮈의 <이방인> 번역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도 그런 식이었다. 김영서라는 필명의 번역가가 카뮈 권위자로 알려진 김화영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의 번역을 ‘오역 투성이’라며 공격하고 나섰다. 그의 이름이 필명이라는 것, 그 출판사에서 지낸 고사가 “옛 <이방인>을 폐기하고자” 기원했던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면서 논쟁에는 불이 붙었다. 논쟁과 자극은 그대로 두고, 그렇게 자극적인 방법으로 이름을 알린 세움출판사의 <이방인>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많이 팔렸다는 뜻이다.

잘 정돈된 말과 글에는 세상을 정의하고 정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지금도 유효한 힘이 (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시대, 유명한 사람은 공인된 매체와 영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시대, 말이 말을 낳는 시대, 미디어가 미디어를 복사해 옮기는 시대다. “글이 제일 싸다”고, 기자들끼리는 이런 말을 자조적으로 한다. 하지만 그 싸디싼 말과 글에 24시간 접속해 있는 대중의 시대…. 말 같지 않은 말이라도, 그걸 그대로 받아 적은 글에 마땅한 실체가 없어도, 심지어 사실이 아니라도 괜찮은 사례는 지천에 널려 있다. 노출은 과할수록, 자극은 강할수록, 수치는 높을수록 좋다. 그런 채 뻔뻔하게 돌아다니면서 유명한 척, 영향력인 척한다.

이런 식의 피로에도 억지로 익숙해져야 하는 걸까? 이것조차 오래된 얘기인가? 이젠 뭐라도 팔아야 해서? 그래야 잘살 수 있어서? 잘 팔리면 좋다. 부끄러움이야말로 부끄럽다. 뻔뻔함이야말로 지금 살아남는 데 필요한 유일한 미덕같다. 이거야말로 증명이 필요 없는 공식 아닐까? 유명해지면 더 잘 팔릴 것이다. ‘저명著名’과 ‘유명有名’을 구분하려는 시도조차 무색한데…. 과연, 유명하고 저명한 앤디 워홀은 말했다. “미래에는 누구나 14분 안에 유명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 ‘미래’가 지금인가 싶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일단 유명해져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줄 것이다.”

어떤 날 밤, 보컬 트레이너 겸 작곡가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와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친구는 연습을 충분히 해오지 않은 아이를 다그치는 중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하면 가수로서 오래갈 수 없다”는 요지의 충고였다. 연습생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말했다고 했다. “괜찮아요. 나중에 인터넷 쇼핑몰 같은 거 차리면 되죠. 일단 방송에 몇 번 나가서 유명해지면 돼요. 전 큰 욕심 없어요.” 그거야말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잘 알면서도, 엄연한 선생으로서, 친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