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술에 그 신발

술 한잔 하러 가는 길엔 이 신발을 신는다.

TOM FORD

싸고 맛있는 와인을 아는 사람을 좋아한다. 고급 와인을 주문할 때 거만하지 않고 싼 와인을 시킬 때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더 좋다. 밤이 짧아지는 계절엔 앉으나 서나 화이트 와인 생각만 난다. 비슷한 가격대라면 프랑스 와인보다는 미국이나 이탈리아 산이 훨씬 맛있다. 피에몬테 지방의 작은 와이너리 스카리올라에서 나오는 샤도네이는 소박하고 청순한 맛, 깨끗한 향, 아름다운 수작업 라벨 때문에 홀딱 반했다. 이맘때면 박스로 사다 놓고 생각날 때마다 꺼내 마신다. 한 병에 4만원 정도니까 꽤 과감하게 살 수 있다. 구운 생선이나 치즈와 함께 마시면 최고. 유부초밥이나 김밥과도 꽤 잘 어울린다. 톰 포드의 스웨이드 로퍼는 와인을 배우지도 가르치지도 않고, 지나친 격식이나 긴장 없이 그저 맛있게 마시는 남자에게 어울린다. 버뮤다 팬츠에 회색 티셔츠를 입고 이 신발을 신은 저녁엔, 약속 없이도 일단 나가보는 게 좋겠다. 강지영

GUCCI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구찌의 상아색 가죽 스니커즈와 꼭 닮았다. 맑고 청순한 색만이 아니다. 딱 봐도 빼어난 소재를 사용한 흔적, 뭐 하나 거슬리는 거 없이 말끔하게 뻗은 자태가 그렇다. 봄인지 여름인지 도통 구분이 힘들만큼 후끈한 날씨가 계속되는데, 얼음처럼 시원한 생막걸리를 어떻게 찾지 않을 수 있나. 언양의 맑은 물과 누룩, 햅쌀로 빚은 복순도가 손막걸리는 막걸리계의 샴페인으로도 이름이 높다. 흔드는 대신 뚜껑을 돌렸다 닫길 서너번 반복하면 보글보글 탄산이 쭉 올라오는데, 그 과정을 보고 있자면, 흡사 서양화 속 뽀얀 여자 속살을 훔쳐보는 것처럼 조마조마해진다. 부드럽고 소중하게 다뤄줘야지. 말간 신발도 막걸리도. 김경민

HERMÈS

멕시코야말로 도피의 클리셰. 국경에선 빈 트렁크를 열 때조차 배가 따끔거린다. 경계를 넘자마자 느껴지는 해방감, 뭐든 환상적인 게 보일 것 같은 망상. 몸을 주체할 수 없는 날은 테킬라를 마신다. 뭘 마셨든 테킬라로 틀면 돌이킬 수 없다. 테킬라가 목을 탈 때마다 쇳소리와 옆집 여자의 신경질, 그리고 소주의 탄식이 뒤섞인 요상한 소리가 목청을 뒤집는다. 취할수록 기이해지고, 음악이라도 흐르면 머리가 등을 치듯 고개를 꺾는다. 패트론은 좀 다르다. 완전하게 흐트러지지만 지저분해지진 않는다. 달콤하고 부드러워 있는 힘을 다해 목으로 흘릴 필요도 없고, 겉멋 든 소금도 필요 없다. 처음 마셨던 날, 입 안에 무지개가 뜨고 불꽃이 터진다고 장황하게 떠들었지만 익숙해지니 낮이고 밤이고 땀에 젖어 마시고만 싶다. 흐트러지고 싶은 날이면 에르메스의 에스파드류를 꺾어 신고 패트론만 찾게 된다. 오충환

AURORA SHOES

뜨거운 태양, 하면 생각나는 것들. 맨발. 리넨 수트. 속옷용 티셔츠와 자글자글 구겨진 스탠드 칼라 셔츠. 선글라스와 콧등 사이에 맺힌 땀방울. 그리고 가죽 샌들. 이탈리아의 남쪽 어딘가, 파라솔 사이로 햇볕이 들이닥치는 테라스에 앉아서, 후끈한 에스프레소 도피오를 주문한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따위는 어차피 메뉴에도 없다. 그리고 아말피의 태양처럼 끝도 없이 풍요롭게 음식을 주문한다. 폭포 같은 파스타, 들판 같은 스테이크를 먹고 산맥 같은 머랭 케이크를 또 먹는다. 리조토 한 톨도 더 먹을 수 없을 것 같은 순간, 마침내 리몬첼로 한 잔을 마실 때다. 끈적한 노란 액체를 쭉 들이키면, 정수리가 저릿하고 두 눈은 살짝 초점을 잃는다. 발바닥까지 땀이 나도 신이 나는 여름이 온다. 이끼색 오로라 슈즈의 뽀얀 인솔 위로, 시커먼 발자국이 진하게 남을 것이다. 박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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