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유니폼/ 검은 유토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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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유니폼

모든 괴로움의 역사에 해박한 부처는 말했다. 고통은 명료한 빛을 안겨준다고. 부처에게 고통은 삶의 첫 번째 원칙이었다. 우리도 가끔 잘못된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나름대로의 치료법도 가졌다. 고통은 삶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인 탓이라는 지혜도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가스실에서 죽은 아이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에이즈 보균자로 태어나거나, 배 안에 갇혀 친구끼리 눈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서로 지켜본 열일곱 살에게도.

사랑하는 이를 잃고 영혼이 바스러진 사람에게 가해지는 그 뒤의 잔인한 순환을 헤아린다면, 하나마나한 낙관으론 부축할 수 없다는 걸 알테다. 납득하지 못할 고통은 이전 삶의 카르마라거나, 모든 건 신이 의도하신 바라는 말은 구경꾼이 주절대는 소리의 무심한 반영일 뿐이다. 어떤 아픔도 긍정의 힘으로 승화할 수 있다는 이상한 얘기는 다시는 친구의 소식을 듣지 못하게 된 아이에게 꺼내선 안 된다. 사는 것은 고통받기 위한 것, 살아남는 것은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란 말은 니체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철학은 유익하되 치통 하나 치료하지 못 하는 걸. 그날을 꺼내기 위해선 그 고통의 뿌리까지 온전히 느껴야 마땅할 것이다.

퍼부어진 고통은 한 번에 끝나지 않는다. 목숨을 소환할 작정인 듯 자비 없는 길에 그를 던지고 으깨버린다. 절대로 오지 않을 희망은 죽음보다 가혹하게 주저앉힌다. 18세기, 고바야시 잇사는 “이슬의 이 세계는 이슬의 세계”라고 압축했다. “그리고 아직, 그리고 아직…” 마지못해 이어지는 확신은 슬픈 하이쿠에 묻혔다. 고통은 삶의 진실. 비영구성은 우리의 집. 상실은 세상의 법칙. 누구도 삶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쉽기를 기대하지도 않는다. 희생자적인 문화 속에선 하나하나가 다 피해자라서. 그러나 상호의존 기반 문화 속에서 개인의 고통은 모든 이의 것이 된다.

몇 년 전, 쓰나미가 도쿄 북쪽, 수천의 삶을 앗아갔을 때, 애통해하는 목소리는 다른 도시에서 더 크게 울렸다. 애도하는 사람들은 학위를 딴 이름난 철학자들이 아니었다. 라틴어인지 그리스어인지, 고통은 열정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어원을 따지면 ‘고통’의 반대는 ‘무관심’이다. 달라이 라마가 이시노마키의 한 어촌을 방문했을 때, 묘비는 미친 각도로 기울어져 있었고, 학교와 주택단지는 돌무더기와 같았다. 그가 주민 몇백 명과, 파란 학교 유니폼을 입은 채 고아로 살아남은 아이 세 명에게 일일이 안부를 물을 때 모두가 흐느꼈다. “마음을 바꾸세요, 용기를 내세요.” 슬픔 가운데 빛의 언어가 이어졌다. “타인을 돕고 열심히 사세요. 그것이 죽음에게 보일 수 있는 최고의 가치예요.” 뒤돌아서서 그가 닦은 눈물은 지금이, 잇사가 말한 “그리고 아직”의 세계라는 사실을 쓰라리게 상기시켰다.

인간은 역경을 마스터한 척할 만큼 충분히 강하지 않다. 그는 함께 있는 것 말고는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나, 그들이 혼자가 아니란 걸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이시노마키에 가야 했다. 32세의 어느 오후, 중국군과 티베트인 간의 분쟁을 막기 위해 라싸의 가족과 친구와 강아지와 헤어져 52년간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릴 자격이 있을 것이다.

가끔 가장 적게 이해되는 것들이 가장 깊은 가치를 지닌다. 사랑이 모두에게 가르쳐준 게 그것 아닌가. 리노(라는 이탈리아 친구)가 보낸 메일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국처럼 작은 나라에서 300명 넘게 잃는 게 얼마나 큰 비극인지 난 이해할 수 있어. 무엇도, 그 누구도 그들의 영혼을 돌려주지 못하지만, 앞으로 최소한 무엇인가, 그리고 반드시 변해야 해.”

검은 유토피아

보수적인 주장은, 시민의 정체성은 국가가 아닌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된다고 우긴다. 그러나 종종 국가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다. 시민사회는 목적, 국가는 이를 보호하는 수단으로서. 그러나 아무리 도덕성이나 존엄성에 관해 목소릴 높이고, 헌법이 허용한다고 믿어도 이젠 다 알아버렸다. 대한민국은 오스트리아가 아니란 걸. 너무나 예의 바르고 너무나 달콤하고 너무나 조심스러운 나라. 집단적 책임감을 강조함으로써 성인됨을 인정받는 나라. 철저한 목격자 보호 프로그램에 의해 가동되는 나라. 좀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앞으론 어떨지 방심하지 않고 감지하는 나라. 무료하지도 무식하지도 무정하지도 않은 나라. 이웃 사랑이 재산이며, 개방성과 친절이 연료인 나라…가 될 수 없다는 걸.

모든 사회문제가 해결된 유토피아는 없다. 다들 나라를 사랑하는 만큼 경멸할 것이다. 그래도 미개하니 어쩌니 하는 소릴 들으면 항변하고 싶어진다. 그런 나를 발견할 때, 정치적인 게 약간은, 개인적 문제임을 깨닫는다. 그러나 지금 남은 건 벽돌 대신 압축판으로 만든 모조품의 나라라는 현실. 우리가 사는 곳과 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은 다 사라졌다는 확신.

윤리의 시대는 드라마틱하다. 위대한 지도자가 있고, 훌륭한 책이 아름다운 연설과 섞이고,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 속에 진군가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산업과 인본주의, 학문과 정서 사이의 침투력이 최하인 나라. 의무 태만으로서의 독선, 매일의 삶에 가장 염려되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무시, 타인의 책임으로만 이루어진 의무가 외려 자랑인 나라. 국가를 결속시키는 내부 깊숙한 힘이 전무한 나라…에서라면 동정심으로 달래 주는 겁 많은 지인에게만 겨우 기댈 수 있을 것이다.

봄이 지나간다. 너무나 길었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봄. 영원히 숨을 누그러뜨릴 수 없는 봄. 매 순간 감상적인 생각이 든다. 검은 바다에 절여져 물고기의 먹이가 된다 해도, 시간을 거슬러 그날로 돌아가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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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편집장] 2001년부터 GQ KOREA 편집장을 맡고 있음. 잡지를 통해 문화와 스타일을 다루어온 그 시간 동안, 정작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지 허무하게 깨닫게 됨. 그래도 잡지 만드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해보지 않은 ‘여타의 것’들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