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작가

사건과 사고는 말과 글로 쏟아진다. 기사가, 작품이 르포라는 이름으로 관찰자인 ‘우리’에게 도착한다. 하지만 르포 작가는 그들만이 아니다.

Culture판형

사람은 이야기하는 존재다. 하지만 이야기는 다같은 이야기가 아니어서, 수많은 결을 지녔다. 사람이 일상에서 하는 이야기는 어떤 장르에 가까울까. 선택지를 줄여 기사, 르포, 소설 중에서 고른다면? 거친 구분이겠지만 기사가 사실을, 르포가 사실인 진실을, 소설이 진실인 허구를 다룬다면, 사람들 대부분은 서툴지만 꾸준한 르포 작가에 가깝다.

차마 받아들이기 힘든 사고로, ‘우리’는 난데없이 ‘서사적 잔해’가 되어버렸다. 부서진 말과 무너진 삶을 복원하는 데, 기사의 사실은 너무 가까워 오히려 상처를 키우고, 소설의 지혜는 아직 도래하지 않아 체념을 부른다. 상처 입은 이야기꾼인 우리가 삶을 지탱하고 살아내는 일은 각자 자신의 르포를 써내려가는 일과 다르지 않게 되었다.

르포는 자아의 서사적 안정뿐만 아니라 공감의 확산을 통한 사회의 변화까지를 과제로 떠안은 장르다. 하지만 사실이 보도된다고 대중의 관심을 받는 게 아니고, 관심을 받는다고 제대로 이해되는 건 아니다. 또 제대로 이해된다고 원하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도 없다. 사실이 알려지면, 진실이 밝혀지면, 사람들이 바라는 변화가 생길 것이라는 낙관은 사라졌다. 사실은 냉소 앞에서, 진실은 현실 앞에서 속절없이 무력한 세상이다.

게다가 사람들은 이제 사실과 진실에 지친 시대를 살고 있다. 매체가 매개한 형태로 사실을 체험하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어떤 고통에 기울일 수 있는 주의에는 한계가 있다. 사람들이 어떤 현장을 바라볼지는 고통의 서열과 진실의 위계에 따라 결정된다. 생생하지만 멀리 있는 고통의 이미지는 근접성과 거리감을 동시에 갖게 하고, 쏟아지는 사실에 계속 노출되다 보면 고통의 이미지는 정서적인 과부하를 준다. 너무 많은 사실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아무런 행동도 취하기 어렵게 내파됐다. 르포는 공감의 확산을 기대하면서 만들어지지만 사람들은 이미 공감 피로로 지쳤다.

르포가 세상의 주목을 끌기 위한 경쟁은 갈수록 심해진다. 사람들의 관심을 부르기 위해 더욱 자극적인 방식을 찾는다. 진실의 자리는 선정성과 외설성이 차지한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혹은 알 권리를 위해서라는 허울 좋은 변명을 앞세우며.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만 세상의 냉담과 대중의 냉소가 깨지고, ‘저기 어딘가’의 고통이 ‘여기 이곳으로’ 불려온다면 끔찍하다. 세상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 어떤 이미지라도 제한 없이 허용된다면, 그들은 자책을 유도하고 죄책감을 부추기는 비통 장사를 하는 셈이다.

공감의 확산과 사회의 변화를 가져오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상관없다는 실용적인 비윤리를 힘주어 말하겠지만, 고통의 사적이고 내밀한 현장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것은 포르노와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슬픔과 공포와 비참함을 무분별하게 상세히 세상에 드러내는 일은 고통에 관한 인간의 속살을 노출하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일상의 르포를 쓰는 사람들의 과제는 공감의 확산보다는 품위를 지키면서 진실을 밝히는 것, 수치를 가하지 않으면서 상처를 보듬는 것, 모욕을 주지 않으면서 고통에 다가서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러기에 이곳은 이미 넘칠 만큼의 가십 사회이고, 서로가 서로의 흠결을 잡으려는 약점의 민주주의 사회다.

일상의 르포가 절제된 품위를 지켜낸다고 해도 금세 더 큰 장벽을 만난다. 일반 시민이 만들어내는 르포의 다양성이 재난 이후의 삶의 다양성을 방증하기에, 일상적 르포의 다양성은 사회의 복원을 위해 지켜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실에선 다양하게 획일적인 르포가 노골적으로 강요된다. 사람들이 쓰는 르포는 사실의 무게와 진실의 깊이에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동시에 사회의 정서를 움직이는 지배적인 방식과 공감의 형식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정서와 공감의 형식을 획일적으로 지정하고, 그 정서와 공감의 표현만 수준별로 다양하게 허용하는 분위기가 존재한다. 심지어 그 정서나 공감과 다른 방식은 올바르지 않다는 폭력적 잣대까지도 동원된다.

‘서사적 잔해’에서 복원되기 위해서는 피해자, 가해자, 관찰자의 르포가 모두 필요하다. 아직 말을 되찾지 못한 피해자의 르포도, 계속 부인否認의 말을 앞세울 가해자의 르포도, 자신이 느끼는 만큼의 거리감을 드러낼 관찰자의 르포도. 사고의 해결을 위해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르포가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사회의 복원을 위해서는 관찰자, 목격자, 구경꾼, 방관자들의 르포에도 주목해야 한다.

관찰자의 르포라면 한나 아렌트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가 잡지 <뉴요커>의 특파원으로 나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수년에 걸쳐 써낸 르포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중에서도 ‘말투’에 주목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으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출간 후 몇 년 동안 각계에서 엄청난 비난과 반발에 부딪혔다. 그런데 아렌트가 비난을 받은 것은 그가 말한 내용보다는 오히려 그 말투 때문이었다. 왕복 서한을 통해 아렌트가 “유대인에 대한 사랑을 결여하고 있다”고 비판한 게르숌 숄렘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당신의 책에 대해 비판적인 것은 거기에 있는 매정함, 이 책이 우리들 인생의 가장 민감한 부분을 다룰 때 취하고 있는, 때때로 거의 조롱에 가까운 악의에 찬 말투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아렌트는 답한다. “슬픔은, 내 생각으로는 설령 어떤 종류의 행동이나 태도의 가장 깊은 곳에 감추어진 동기가 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입 밖으로 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치에서의 ‘마음’의 역할을 나는 전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렌트가 유지하는 ‘말투’는 이 시대 르포의 과제와도 연결된다. 공감을 통한 변화만을 욕심낸다면 개인의 말투는 지우고 공감의 확산을 위해 애쓰는 게 낫겠지만, 해당 문제와 공감 구조를 동시에 바꾸려고 한다면 개개의 말투를 통한 르포의 다양성이 중요하다. 물론 이 말투를 공동성 안에서 다룬다면 매너와 예의의 차원으로 축소된다. 하지만 말투는 공동성을 깨는 태도이자 방식으로서, 공동성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시도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엄존하고 있는 공동성의 르포를 써내려갈지, 아직 도래하지 않은 공공성의 르포를 만들어갈지의 문제. 르포의 과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듣고 싶은 내용’을 ‘우리가 듣고 싶지 않은 말투’로 말하는 태도를 허용해야 한다.

소수의 훈련된 기자들이 사람들이 발 딛을 사실을 걸러낼 것이고, 소수의 섬세한 작가들이 우리가 미처 못 본 진실들을 조명해나갈 것이다. 또 소수의 전문적인 르포 작가가 사람들이 일상에서 기울인 서툰 노력 이상의 르포 작품을 만들어내겠지만, 그전까지 진실한 사실에 다가서는 것은 순전히 ‘우리’의 몫이고 그 총량이 이 사회가 갖게 될 르포의 현실이다. 산 자의 ‘살고 있는’ 삶까지도 쉽게 모욕해오던 한국의 르포적 현실에서, 과연 죽은 자의 ‘살아 있는’ 삶의 기품을 지켜주고 모욕하지 않는 애도의 르포는 가능할까.

공식적인 최고 존엄의 서사는 그야말로 참담했다. 심지어 공감을 팔아 어떻게 피해자의 자리마저 뺏어가는지(“저도 부모님을 다 흉탄에 잃어서”) 지켜봐야 했다. 정말 어찌할 수 없는 낙담이 앞서지만, 우리가 이미 망했다면 그럼에도 이 바닥에서 시작해야 한다. 아니, 그렇게 하는 것 말고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분노도 슬픔도 감추고 자신의 르포를 써서 퍼뜨려야 한다.

그 르포에서 실종자는 희생자로, 구조자는 탈출자로, 생존자는 목격자로 자리매김되기를 바란다. 목격자를 생존자라는 수동적인 피해자의 위치에 가두지 말고,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되찾을 때까지 돌보고 기다린 후, 그들이 목격자로서 증언하는 능동적 자리 역시 마련되길 바란다. 들리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을 희생자의 증언도 함께.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하나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도 마을 같은 서사가 필요하다. 죽음은 결코 하나의 집합 사건이 아니라 언제나 유일한 개별 사건이다. 그들의 상처에 의해 기꺼이 상처를 입는, 일상의 르포들이 기품 있는 말투로 다채롭게 만들어지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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