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너의 뒤에서

2014.07.14GQ

시집 뒤에는 어김없이 비평이 붙는다. 사람들의 해석을 제한한다는 지적과 비평이 아닌 ‘주례사’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비평 뒤에 숨겨진 입장을, 문학평론가가 말한다.

Book판형

시집 해설을 쓰는 비평가와 시인의 관계를 출판사가 매개된 ‘마케팅 거래’의 일종으로 보는 냉소적 시각이 있다. 세상을 늘 음모론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의 관점만은 아니라는 걸 안다. 대체로 격앙된 어투의 이 얘기들을 듣다 보면, 시집 해설을 쓰는 비평가들은 부정적 관행이 된 ‘악의 평범성’에 중독된 일상인처럼 보인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그것은 이제 그다지 창의적인 비판이 아니다. 냉소적 시각으로 제도를 ‘바깥에서’ 품평하기는 쉽지만, 그 제도 내부를 ‘살며’ ‘싸우기’는 어렵다. 대체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우가 많으며, 결과론적 사고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이 말하기 좋아하고, 또 말하기 쉬운 것은 실패의 사례이며, 부정적인 사례다. 비평에도 실패는 있다. 그러나 이 실패는 장사치의 음험한 의도를 숨긴 공모와 거래만 있는건 아니다. 비판적 논자들은 보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모종의 창의적인 고투에서 불가피한 ‘과정의 실패’도 적지 않다. 하지만 더 엄밀히 얘기해야겠다. 시집 해설도 하나의 비평이라면, 그리고 비평도 문학이라면, 문학이 성공한다는 것은 과연 가당한 일인가.

시집 해설에 대한 볼멘소리에는 몇 가지 갈래가 있다. 언급한 것처럼 냉소적으로, 출판사 마케팅이라고 보는 관점이 아닌 좀 더 예술적이고 철학적인 맥락에서 해석에 반대하는 경우. 수잔 손택이 “모든 해석은 반역”이라고 말한 입장 말이다. 이 관점에 따르면, 작품의 생기를 하나의 시각으로 고정시키고 왜곡시키는 해석은 작품을 축소하고 의미를 교란시키는 일이다. 그렇다면 작품과 물리적으로 붙어 있는 해설은 작품에 직접적인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작품의 자유를 억압하며 더더욱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냉소적인 차원의 비판이든 손택 유형의 해석학적 비판이든, 작품의 가능성을 의미 있는 것으로 개방하고 확장한 사례에 대해서는 언제나 언급을 꺼린다. 시집 해설에 대한 수많은 비판은, 실제로는 부정적 사례만을 선별적으로 보고 가하는 비난인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손택 유형의 해석에 대한 비판에도 할 말은 있다. 오늘날 비평을 쓰는 어떠한 비평가, 그러니까 시집 해설을 쓰는 비평가도 마찬가지인데, 자기 자신의 해설이 하나의 비평이지 모든 비평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철학적으로 니체 이후에, 비평적으로 대단한 성공을 거둔 롤랑 바르트 이후에, 비평이라는 행위는 하나의 관점을 가진 행위이며, 동시에 고유한 저자가 사라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사후적이며 개방적인 대화의 일종이 되었다. 양식 있는 비평가라면 최초의 비평을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비평이 답을 내놓았다거나 텍스트에 대해 해석적 특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아가서는 작품에 의지하여, 작품과 대화하고 협업하면서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작품을 쓰고 있는 저자라는 인식을 가진 비평가가 적지 않다.

시집 뒤에 붙은 해설 역시 하나의 비평이라고 이해하는 독자들의 선의를 역으로 요구하고 싶다. 비평 역시 문학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다. 비평은 어떤 부수적인 위치를 점하는 문학의 보조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문학의 한 장르다. 다만 비평이 지닌 매우 특수한 존재 형식은 늘 어떤 작품에 대해 시간적으로뒤에 온다는 것이며, 특정한 작품 곁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 대한 시간적 후 순위와 작품의 곁에 위치한다는 한계는 비평이 부수적이거나 보조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작품과 나란히 연대하는, 비평의 특이한 존재 형식에 대한 이해여야 한다. 시집 뒤에 붙는 해설은 시집의 보조물이 아니라 시집의 곁에서 나란히 연대하는 ‘최초의 비평’이다. 모든 존재는 상황이 존재 조건이 된다. 특정 작품과 최초의 연대를 맺는 비평은 그 고유한 비평적 상황을 비평의 존재 조건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여기에서 역시 냉소적인 논자들은 이 조건을 해설 비평의 옴짝달싹할 수 없는 속박이라고 주장한다. 특정 시집에 부가된 해설이 어떻게 자유로운 비평을 할 수 있느냐는 비판이다. 과찬으로 뒤범벅된, 비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글이 과연 비평이냐는 불만은 타당하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이 해설 비평의 운명이 단순히 속박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런 냉소가 보지 못하는 것은 해설을 쓰는 비평가와 시인 사이에 형성된 관계의 진상, 고유한 관계의 실존이다.

해설 비평은 정치권력의 명령으로 작품 앞에 호출되지 않는다. 지금 한국 출판계에서 시집 해설은 대부분 시인 스스로가 문학적 연대감과 우정을 나누는 비평가나 동료 작가에게 청탁한다. 비평가는 권력에 의한 ‘소환’이 아닌, 시인에게 ‘초대’ 받는 위치에 있다. 시집 해설을 쓰는 비평가는 몇 년을 고독하게 최선을 다해 정성껏 차린 음식의 향연에 초대되는 첫 번째 손님이다. 권력과 자본과 명예와 소소한 인간적 삶의 양지로부터 자발적 유폐를 감행한 이 잔치로의 초대는, 성대하든 소박하든 그 자체로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다. 최초의 손님은 이 잔치의 음식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초대받은 손님 앞에 놓인 음식은 예상보다 맛있을 수 있으며, 예상만큼 맛있을 수도 있고, 예상보다 맛이 덜할 수도 있다. 시집 비평을 쓰는 비평가의 영광과 곤혹은 최초의 손님이라는 특수한 존재 상황에서 나온다. 장터를 지나다가 처음 들른 익명의 가게 음식을 맛보고는 무심히 한마디 던지고 사라지는 소비자의 위치가 아니다. 최초의 초대 손님, 게다가 문학적 우정을 나누었단 이유로 초대된 손님은 가능한 최선의 맛을 지각하고 그 노고를 치하할 상황에 놓인다.

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 최초의 초대 손님은 적어도 그 시집에 관한 한 세상에서 가장 큰 호의를 기대하는 손님일 수 있다. 이걸 공모라고 폄하하거나 냉소할 필요가 있을까. 혼신의 노고를 다한 한 권의 시집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적극적인 독자 한 명은 기대할 권리가, 시인에게는 있을 것이다. 반대로 한 권의 시집에 대한 적극적인 옹호자가 된다는 것은 정치계의 협잡과는 다르다. 문학의 공간에서, 이것은 거래가 아닌 무형의 선의다. 세상에는 무형의 선의를 거래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일이다. 늘 최악을 상정한 채로 어떤 제도의 운영을 회피하는 것은 그것대로 딱한 일이다. 비평가는 선의의 공간에서 선의를 아름답게 꽃피우기 위해 애쓸 뿐이다.

이 선의의 초대가 아니었다면 자칫 맛도 모르고 사라졌을 시집이 적지 않았다. 1989년도에 출간된 기형도의 첫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 <입속의 검은 잎>에는 김현의 해설이 붙었다. 시집의 출간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젊은 시인의 어둡고 투명한 감성은 김현의 비평이 없었다면 묻혔을 것이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이라는 김현의 해설을 통해 이 빈방의 체험이 세상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영혼의 감각으로 개방됐다. 1990년대의 아이콘이었던 이원의 첫 시집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에는 이원의 스승이었던 시인 오규원이 해설을 붙였다. “거리에 버려져 있는 비닐봉지”를 포착한 것은 이원의 시적 감각이지만, 그 비닐봉지에 일상적 시간의 의미가 붙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은 해설가였다. 그리고 80년대와 다른 90년대 일상의 의미는 시집의 이미지들과 연대한 해설과 ‘더불어’ 세상에 알려졌다.

2000년대에 불현듯 출현한 김근의 신화적 기괴와 송승환의 도시 사물 세계의 건조를 극단적인 기호로 드러내는 추상을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첫 시집이 기술시대 ‘리얼’의 회귀라는 사실을 가르쳐준 것은 황현산이 쓴 시집 해설이었다. 현재 가장 문제적인 시인들인 김행숙과 황병승을 바로 알아본 사람은 드물었다. 그들의 첫 시집에 붙은 이장욱의 ‘해설 이후’였다. 김행숙의 귀신들, 여자들, 아이들과 황병승의 자궁을 가진 남자가 2000년대의 중요한 문학적 증후로 인식된 데는 이장욱의 사후적 해석이 개방한 의미론적 공간이 있었다.

냉소가 동반된 해설 무용론은 오히려 논리적 역설은 아닐까. 어떤 해설가도 자신이 유일하거나 최선의 손님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첫 손님은 잔치를 깨뜨릴까 조심스러울 뿐이다. 첫 손님이 경우에 따라 맘에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에디터
    글 / 함돈균(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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