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랑 하고 싶어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금 당장 함께 작품을 할 수 있다면 누구랑 하겠습니까? 배우, 영화감독, 영화 제작자, 드라마 작가가 밝히는 아주 사적인 고백.

Film판형

배우 윤여정 ▷ 안성기
만약 멜로 영화를 찍는다면, 상대역으로 누가 좋을까? 난 젊은 남자 배우와 멜로 영화를 하겠다는 허망한 꿈은 꾸고 싶지 않다. 배우끼리 서로 느낌을 공유하고, 같이 느끼면서 찍는 영화였으면 좋겠다. 일단 뭔가 통하려면 나이가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안성기와 함께 연기하고 싶다. 사람들은 안성기가 나보다 나이가 훨씬 적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나도 그의 나이를 전혀 몰랐지만 최근에 그의 나이가 나와 얼마 차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러니 멜로 영화를 한다면 꼭 그와 함께 출연하고 싶다. 안성기의 연기가 아주 빼어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관리를 잘한 배우다. 잘 늙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안성기는 배우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그와 함께라면 전혀 새로우면서 괜찮은 멜로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다.

영화감독 박훈정 ▷ 양조위
딱 한 배우를 마음대로 캐스팅할 수 있다면 양조위를 꼽고 싶다. 그를 흠모하는 감독이 얼마나 많을까? 사실 상투적인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정말 함께 영화를 찍을 수 있다면 오랫동안 갈망하는 배우를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 양조위여야 하는 이유도 상투적이다. 그는 대체 불가능한 배우다. 수많은 배우의 연기를 봐도 그는 오직 그뿐이다. 양조위가 연기한 어떤 캐릭터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할 수 없다. 예상조차 불가능하다. 그의 눈빛은 땅을 파고든다.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인데 계속 말을 하고 있다. 왕가위가 예전에 이렇게 말했었나? 얼굴만으로 모든 걸 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라고. <비정성시>에서 그는 말 못하는 벙어리 역할을 하지만 계속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과연 연기는 선천적인 것일까? 양조위의 연기를 보면 배우란 결국 타고나야 하는 것 같다. 양조위는 연기하지 않는다. 역설적이지만 그가 출연한 수많은 연기를 봐도 그가 힘주어 연기한다고 느낀 적이 없다. 그런 자연스러움이 어떻게 가능한지를 생각하다 보니 새삼 셀 수도 없이 많은 홍콩 TV 시리즈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그는 이제 한국 나이로 쉰넷이지만 나이에 비해 (물론 어리지 않지만) 다른 배우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한 배우다. 그런 걸 보면 연기라는 건 재능만으로도 쉽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 흥미로운 일이 생긴다.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 안에서 그 캐릭터들이 어떻게 변할지 나도 모른다. 결말이 궁금해서 시나리오 쓰는 일을 멈추지 못한다. 만약 양조위가 연기하는 캐릭터를 만들고 시나리오를 쓴다면 어떨까? 확실한 건 쓰는 내내 불안할 것 같다. 만약 갑자기 양조위 캐스팅이 취소된다면 그 캐릭터는 어떤 배우도 연기할 수 없을 테니까.

영화감독 송해성 ▷ 송길한
요즘은 시나리오 전문 작가라는 말이 무색하지만, 여전히 좋은 시나리오 작가가 나타나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감독이 직접 책(시나리오)을 쓰는 것도 괜찮지만, 뛰어난 작가의 작품을 받아 연출했을 때 시너지가 생긴다. 감독과 작가의 시각이 충돌할 때 아주 새로운 연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로 송길한 작가의 시나리오를 받아서 영화를 찍고 싶다. 그는 한국영화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니, 제일 앞에 있어야 한다. <짝코>와 <만다라>, <길소뜸>은 그가 쓴 대표적인 영화다. 세 영화를 함께 만든, 임권택 감독이나 정일성 촬영감독에 비해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가 쓴 시나리오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의 작품을 볼 때 마다 시나리오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결국 어떻게 쓰는 것보다 어떤 것을 쓰는지가 더 중요한 걸까? 송길한 작품엔 ‘탐구’가 있다. 지금 영화들은 소재와 플롯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치밀한 구성이나 못 본 소재로 관심을 끌려고 발버둥친다. 주제의식이 선명하거나 캐릭터를 통해 인간을 파내려고 하지 않는다. 송길한 작가의 작품엔 삶이 진공 상태로 쪼그라들어 있기도 하고, 한편으론 역사를 향해 팽창하기도 한다. 오직 인간 탐구로만 채운 영화. 언제나 첫 번째로 꼽는 영화 <짝코>는 그 증거다. 그 영화처럼 플래시백이 완벽한 앙상블을 이루는 영화는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드라마 작가 박상연 ▷ 송중기
내게 드라마를 쓰는 행위는 배우와의 대화다. 드라마는 방영되는 내내 글을 쓰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를 보고 대답하듯이 다음 회를 쓸 때가 많다. 가장 중요한 건 배우가 작가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느냐다. <선덕여왕>을 쓰면서는 내내 고현정 연기와 싸우듯이 글을 썼다. 그녀는 항상 “이 정도는 문제없다”는 듯이 연기해냈다. 그럴 때면 배우를 더욱 밀어붙이고 싶다. 배우의 한계치까지 쓰면 배우는 상상 밖의 연기로 응답한다. 그런 과정이 많을수록 만족스러운 작품이 된다. 최근 작 <뿌리 깊은 나무>에선 한석규 연기에 응답하듯이 써내려갔다. 하지만 초반에는 젊은 이도, 송중기에게서 짜릿한 자극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그의 연기를 짧게 본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처음부터 송중기의 젊은 이도 역할은 4회까지만 계약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처음엔 그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의 곱상하고 여린 외모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송중기는 1화부터 드라마를 집어 삼켰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연기에서 드라마는 폭발했다. 송중기의 연기엔 요즘 젊은 배우에게서 찾기 힘든 에너지가 있다. 그건 마치 1970년대 배우들에게서 볼 법한 남자다운 기운이다. 게다가 서늘하다. 감정적으로 폭발할 때도 이성적인 날이 서 있다.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하고, 아주 영리하게 풀어내는 배우다. 영화 <늑대소년>에서 그의 면모가 잘 드러났지만 아직까지 그의 힘을 10분의 1밖에 보여주지 못한 것 같다. 1년 후면 그가 제대한다. 송중기와 새로운 드라마에서 제대로 된 대화를 하고 싶다.

영화 제작자 이춘연 ▷ 안성기
제작자는 절대로 어떤 한 명의 배우만을 꿈꾸지 않는다. 무조건 그 시대에 가장 화려하고 대중이 좋아하는 배우와 작업하고 싶어 한다. 물론 시나리오에 적합한지가 더 중요하지만. 그래서 내가 어떤 배우를 마음대로 선택한다는 건 당치도 않다. 오직 대중과 영화가 원하는 배우를 캐스팅할 수 있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고 설득하는 위치다. 그럼에도 아주 오랫동안 은근하게 품고 있는 꿈이 있다. 안성기를 ‘원톱’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만들어 1천만 명 관객이 보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그가 어떤 배우인지 연기력이 뛰어난지에 대한 논리 따위는 필요 없다. 이건 아주 지독하리만큼 그가 지켜온 태도에 대한 찬사다. 난 배우 안성기를 존중한다. 어떻게 ‘사람’이 그토록 오랫동안 변함없을 수 있을까? 절제와 배려. 그는 영화를 통해 먹고사는 직업인으로서 영화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과서다. 안성기에게 모범적이라는 말은 지겨울까? 하지만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의 배우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하는 점이 신뢰 말고 또 뭐가 있을까? ‘안 스타’는 그의 태도로서 어떤 스크린도 책임진다.

배우 고아성 ▷ 오달수
좀 늦게 <구타유발자>를 봤다. 영화를 보고나서 오달수 선배의 웃음이 완벽히 남았다. 누런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드러내며 씨익 웃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았다. 이후 그의 팬이 됐다. 오달수 선배의 연기를 볼 때마다 내가 어떻게 연기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한편으론 마냥 넋을 놓고 본다. 팬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관심있는 선배 배우의 연기를 볼 땐 놓치지 않고 습득하고자 노력하지만, 오달수 선배의 연기를 볼 땐 그 끝에 ‘팬심’만 남는다. 그는 항상 한 발짝 떨어져 연기한다. 힘을 쭉 빼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반면 쇼트는 그의 연기로 빈틈을 메운다. <우아한 세계>, <7번방의 선물>, 최근 <변호인>까지 각 영화마다 오달수 선배가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쇼트들이 가득하다. 그가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들도 좋지만 주연으로 출연한 <미운 오리 새끼>도 아낀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추천하고 싶다. 만약 그와 영화로 만나면 어떤 식이 좋을까? 사실 만난 적이 있긴 있다. <괴물>에서 그는 괴물 목소리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