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나의 거리엔 주인공만 있다

드라마 <유나의 거리>가 이제 막 절반 정도 지났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배역들은 모두가 주연으로 보일 만큼 캐릭터와 연기가 뚜렷하다. 열여섯 명의 배우에 대한 감상평으로 이 드라마를 열렬히 지지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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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강나 / 김옥빈
김옥빈의 연기는 전형적이지 않다. 목소리부터 그렇다. 여배우가 저음으로 발성할 땐 신뢰를 얻곤 하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제일 낮은 편이고, 어절과 어절 사이가 툭툭 끊긴다. 그녀가 “됐어, 이년아”라고 하면, 그대로 믿고 싶을 정도다. 그 뿐 아니라, 양주 스트레이트 잔을 입에 털어 넣을 땐 입술을 제대로 벌리고, 발로 때릴 땐 제대로 ‘사커킥’을 보여준다. 여배우가 알고 있는 사실을 거리낌 없이 연기로 표현하는 것을 과연 용기라고 불러야 할까? 확실한 건 그런 용기를 드라마에서 ‘20대 여배우’를 통해 목격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창만 / 이희준
어쩌면 창만은 가장 재미없는 캐릭터다. 인정 많고, 착하며, 판단이 빠르지만 약삭빠르진 않다. 좋은 건 다 갖춘 인물. 평생 살면서 한 명쯤은 본 것 같지만, 막상 주변에서 비슷한 사람을 찾긴 쉽지 않다. 만약 실제로 있다면, 드라마와 같이 모두에게 사랑받을 ‘사람’이다. 이희준은 그런 사람을 연기한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성이 좋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어떤 식으로 대답하고, 손을 모으고, 눈을 마주치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해답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실제 이희준이 궁금해진다.

미김선 / 서유정
미선이 매 신마다 나왔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다리는 이유는 그녀의 완전한 순수성과 패션 때문이다. 한참 연하인 민규와의 연애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눕히고, 전쟁보다 평화를 지켜야하는 이유를 민규가 동원 훈련에 갔기 때문이라고 말할 땐, 사랑밖에 모르는 투명한 여자를 발견한다. 민규에게 맞아 얼굴에 피멍이 들어도 마찬가지. 그 모습이 <그대 그리고 나>에서부터 박제된 서유정의 얼굴과 그녀가 입은 ‘패셔너블’ 한 옷을 통해 완벽해진다.

한다영 / 신소율
다영이 창만과 함께 영화를 보면서 머리를 기대며 말한다. “혹시 내 손 잡고 싶으면 잡아도 되요. 깊이 생각할 것 없어요.” 그녀의 푼수 연기는 사랑스럽다. 부담스럽지 않다. 어쩌면 그동안 신소율이 보여준 모습 중 가장 대체 불가능한 모습이 아닐까? 재미있는 건 계모인 홍여사와의 대화다. 이 둘은 어떤 면으로든 친아버지인 한만복보다 친밀해 보인다. 다영이 보여주는 스물세살의 설익은 어른스러움은 서른 살 진짜 신소율의 모습을 통과하고 있다.

한만복 / 이문식
창만이 화합의 울타리라면 만복은 갈등의 축이다. 그의 ‘화’는 콤플렉스다. 만복을 움직이는 힘. 부자이지만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 한동안 이문식은 순박하거나 정반대로 지독한, 극단에 있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가 많았다. 어느 쪽이든 ‘내적 갈등’을 품고 있었다. 그가 만복을 연기할 땐 오직 미간을 찌푸리며 좁은 등압선 바람으로 환기시킨다. 맞바람이다.

홍여사 / 김희정
서브 플롯엔 홍여사가 있다. 그녀는 계모지만 다영의 존중을 받고, 첩이지만 만복이 제일 의지하는 인물이며, 동생 계팔의 유일한 버팀목이자, 다세대 주택의 진짜 주인 역할을 한다. 덕분에 홍여사는 누군가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볼 때가 많다. 하지만 불안이 증폭되지는 않는다. 김희정의 연기도 연기지만, 얼굴 때문이 아닐까? 동그란 눈과, 도톰한 입술이 우아하다.

홍계팔 / 조희봉
과거 안내상이 주로 도맡아 했던 찌질한 연기를 이번엔 조희봉이 맡았다. 그가 숨을 들이마시며 대사 준비를 할 때 너무 ‘연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팔은 눈치도 없고, 능력도 전혀 없는 캐릭터다. 창피한 것도 모른 채 잘 때가 없을 땐 “나 여기서 자야 돼”라며 일단 눕고 본다. 계팔도 그런 계팔이 싫다. 그러니 어떤 행동이나 대사를 뱉을 때마다 한 템포 머뭇거릴 수밖에. 때론 동정을 요구하는 캐릭터가 제일 미울 때가 있는데, 그는 보호하고 싶다.

끼도 / 정종준
김운경 작가 작품이기에 자연스럽게 <서울 뚝배기>의 주현을 떠올리지만 힘을 빼며 선을 긋는다. “~습니다”로 주방 아주머니에게 말할 때는 귀여운 걸까? 자칫 과장된 설정이나 대사의 강약으로 인상적인 노인을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상을 지우려고 노력하는 것 같다. 그래서 ‘도끼 형님’이 하는 훈계는 오래 들을 수 있다. 11화에서 일장 연설과 ‘다함께 차차차’를 부르는 장면엔 한까지 느껴진다.

칠변복 / 김영웅
칠복은 언제나 밋밋한 모습이다. 그가 경멸하는 계팔과 맞부딪칠 때나 죽고 못 사는 부인 혜숙을 면회 갈 때나, 옥탑방 철거 건으로 만복에게 맡겨달라고 할 때도 ‘오버’하는 법이 없다. 드라마에서 칠복은 제일 현실적인 사람이며, 어떤 일도 수긍하는 캐릭터다. 그런 사람이 감정의 폭이 클 리가 없다. 쉽게 동요하지 않고, 매번 같은 톤이다. 모르긴 몰라도 김영웅은 변칠복이라는 인물이 그래야 한다는 확신이 있는 것 같다.

엄혜숙 / 김은수
혜숙은 남편 칠복과 정말 다르다. 1백만원 벌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크루즈 여행을 하며 드레스를 입고 댄스 파티를 하고 싶다고 말하는 쪽이니까. 그러곤 그 돈을 해결하지 못해 교도소 노역을 갈 때도 혜숙은 항상 먼 꿈을 꾼다. 어쩌면 그건 사람에 대한 기대. 혜숙이 칠복에게 걱정 인형을 사서 이웃들에게 건네주라는 부탁이 노골적인 PPL로 느껴지지 않았던 건 순전히 혜숙을 맡은 김은수의 표정 덕분이다.

김남수 / 강신효
남수는 창만(이희준)과 연적이다. 남수를 연기하는 강신효와 이희준의 얼굴이 함께 ‘투샷’으로 잡힐 때 이상한 긴장이 있다. 그건 수염이 있고, 없고의 차이 때문이 아니다. 이희준의 선명한 눈을 상대하는 강신효의 눈빛 때문이다. 강신효의 시선은 모호하다. 순애와 질투가 섞였을까? 그 눈빛은 손을 다친 상황도 설명한다. 영화 <러시아 소설>에서 시작된 기대가 훨씬 커졌다.

박양순 / 오나라
몇 년 전부터 오나라를 뮤지컬이 아닌 드라마에서 자주 만나는데, 그중에서 양순이 가장 사랑스럽다. 특히 ‘마지못해’서 하는 말과 행동이 그렇다. 그녀가 마지못해 유나에게 다이아가 들어있는 라커룸을 알려주고, 마지못해 유나에게 달호를 끌어들이지 말아달라고 설득할 때, 사람들이 마지못해 뭔가를 할 때의 ‘궁상’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중 제일은 마지못해 돈을 받을 때.

봉달호 / 안내상
달호는 비리로 옷을 벗은 전직 형사다. 드라마에선 줄곧 유나, 남수, 양순과 같은 소매치기와 친하고 남수에게 보도방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경찰이면서 가장 다양하게 나쁜 짓에 걸쳐 있다. 창만을 설득해 민규를 때리게 하는 것도 달호다. 그러니까 이리 보면 깡패고 저리 보면 경찰이어야 한다. 모호한 악인. 안내상은 이미 대사를 뱉기도 전에 얼굴만으로 해결했다.

벤댕이 / 윤용현
벤댕이가 춤선생님을 ‘쫀다’. 폭력적이면서 가열차다. 왜 제일 어려운 걸 알려주지 않느냐, 바로 잘 출 수 있게 해달라는 식이다. 그러더니 가장 어린 여자 선생님을 소개해달라고 한다. 그 풍채 좋은 여자 선생에게 끌려가는 몸의 움직임으로 미워할 수 없는 아저씨를 단박에 정의했다.

현 정 / 이빛나
현정이 유나를 투영하는 역할로 등장하기 때문에 그녀의 대사 하나하나는 유나의 과거다. 그녀가 “언니, 저 진짜 윤아 닮았어요?”라고 물어볼 때, 현정을 연기하는 이빛나의 얼굴과 목소리는 설레면서 맑았다. 그러니까 거친 쪽. 그 떨림 때문에 유나의 과거를 회상하는 신이 많지 않아도 설득되었다. 현정으로 유나가 좀 더 가까워졌다.

윤 지 / 하은설
윤지를 보면 얼마나 캐스팅에 공을 들였는지, 일관성을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유나처럼 선선한 성격으로 앙상블을 받아줘야 하고, 그 양이 꽤 많아 김옥빈과 어울려야 한다. 특히 20화를 넘어가는 시기에 서브 플롯엔 윤지가 계속 등장하니까. 하은설은 새로운 김옥빈의 연기를 그녀만의 방식으로 받아낸다. 그 대응까지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