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아는 여자 – 1

2014.09.05GQ

페이지를 넘기며, 언젠가 한 번쯤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만화 속 그 여자 때문에.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이명진

민승아 1990년대 초반, 소년들은 학교에서 만화를 보며 학교생활이 만화 같기를 바랐다. 싸움 잘하고 인기 많은 남자 주인공에 자신을 대입해 예쁜 여학생과 연애하는 상상. 대체로 여자 주인공의 모습은 정해져 있다. 일단 뭐든 길었다. 긴 생머리, 긴 팔, 긴 다리. 그리고 대체로 컸다. 큰 눈, 큰 가슴, 큰 엉덩이.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의 민승아는 소년 만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의 전형적인 생김을 따랐다. 게다가 여리기까지. 좋아하는 남궁건에게 말도 못하고, 쉽게 오해하며, 쉽게 삐치며, 쉽게 운다. 하지만 그녀는 시시하지 않다. 모터사이클을 제대로 몰았으니까. 1권부터 혼다 CBR400을 타고 코너를 돌더니, 마지막 권에선 남궁건을 쫓아가기 위해 야마하 FZR400의 앞바퀴를 번쩍 들어올린다. 그러니까 400cc 스포츠 바이크로 슬라럼과 윌리를 하는 여고생. 어쩌면 민승아는 <어쩐지…저녁>에서 제일 센 캐릭터다. 양승철

 

<럭키짱>, 김성모

마예원 총 87권 중 2권부터 시작된다. 마예원은 주인공 강건마를 좋아한다. 강건마는 별 노력도 안 했지만, 그렇게 됐다. <럭키짱>은 줄곧 직설화법을 사용한다. 마예원을 처음 만난 강건마가 그녀에게 말한다. “마예원… 좋은 이름이야.” 남자들끼리 싸울 땐 이런 언어를 쓴다. “죽는 거다. 왕호.” 등장인물의 90퍼센트 이상이 남자, 대부분이 격투 신인 만화에서 예원은 남자 독자들의 욕망이자, 만화 속 싸움의 발단이다. 맞고 쓰러진 강건마를 위해 기꺼이 치마를 올릴 수 있고, 날아오는 20단 콤보의 열두 번째 킥을 대신 맞아주는 여자. 싸움이 끝나면 요철이 분명한, 그리고 가끔은 가슴과 엉덩이가 과장된 몸으로 강건마에게 안기기도 한다. 마예원은 말수가 적다. 싸움은 말리기보다 지켜보는 쪽. 대사는 대개 짧다. “건마…”, “건마야!” 어쩌면 남자들이 여자에게 듣고 싶은 말은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닐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것. 유지성

 

<진짜 사나이>, 박산하

남희 남희야말로 학원물의 전통적인 헤로인이다. 삼각관계를 겪으며, 싸움을 싫어하지만 결국 남자 주인공 제갈 길에게 마음을 여는. 그러면서 점점 예뻐지기까지 하는. 92년 작 <진짜 사나이>는 당대를 정확하고 발빠르게 그렸다. 싸움 대신 롤러블레이드로 승부를 가리기도 하고, 농구가 유행할 땐 두 권 정도를 농구에 할애하는 낭만도 있었다. 싸움 빼고도 잘하는 게 많은 제갈 길이 그렇듯, 남희도 공부만 잘하는 여자애가 아니었다. 유도장에선 남자들을 메쳤고, 학교의 부당한 권위엔 앞장서 반발했다. 엑스세대 남자는 TV에 많았지만, 걸그룹 같은 것도 없던 그때 남희의 적극성은 몸보다 진한 도발이었다. <진짜 사나이>는 1995년에 끝났다. 3년간 남희는 낡지 않았고, 간혹 사복을 입은 페이지에선 그 계절 가장 예쁜 옷을 입고 있었다. 맘에 드는 그림을 찢어 머리맡에 두기보다, 새로 나오는 책의 모습을 확인하고 싶은, 내일이 궁금한 그런 여자. 유지성

 

<발바리의 추억>, 강철수

주희, 희경, 미스 박, 그리고 그녀. 발바리 김달호는 대학생이다. 청바지에 줄무늬 티셔츠를 입고 구두를 신은, 여자를 만나는 것만이 인생의 목표인 것 같은 남자.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다른 건 다 버릴 수도 있는 80년대 남자다. 1권부터 9권까지 김달호는 몇 명의 여자를 만나는 걸까? 헤아리기 전에, 그 여자들의 둥글고 단정한 얼굴이 먼저 보인다. 누구는 헤프고, 누구는 지성적이며, 누구는 절대로 밤을 허락하지 않을 얼굴들. 김달호가 스물한 살 정도 됐으니, 여자들의 나이 역시 많아야 스물세 살 정도였을까? 나이가 다 무슨 상관일까? 그녀들은 갑자기 티셔츠를 벗거나, 눈을 똑바로 뜨고 안경도 벗지 않은 채 “좋아?” 살짝 처진 눈썹으로 묻는다. 치마 속으로 손을 넣는 김달호를 지긋이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지금은 어떤 만화에서나 거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자연스러움이 그 얼굴에 다 있다. 과감함마저. 정우성

    에디터
    GQ 피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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