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이기호의 반성문 <1>

소설가 이기호는 부끄러운 게 많았다. 종이를 내밀지도 않았는데 반성문도 읊었다. 무슨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불편한 마음을 불편하게 간직하는 소설가를 만났다. 소설가가 문학을 대하는, 문장을 적을 때의 낮고 구부정한 자세가 생각났다.

 

광주에서 뵙네요. 오늘은 날이 흐려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 같은데 “광주에는 여전히 어두운 분위기가 있다”고 말한 적이 있죠. 학생들 소설을 보면서 그렇게 느꼈어요. 제가 서울에서도 시간강사로 학생들 소설을 봤잖아요. 걔네들 소설에는 경쾌하고 신선한 부분이 있는데, 여기 친구들의 소설은 굉장히 고전적이에요. 이제 막 스무 살 먹은 친구들이요, 어둡고 우울한 작품, 특히 역사적인 배경을 가진 작품을 써요. 처음엔 되게 당황했죠.

 

첫 수업시간에 자신의 콤플렉스를 소재로 한 자전 소설을 써오라고 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시인 이성복의 말이 있기도 했지만, 문학은 콤플렉스로부터 출발한다고 생각하세요? 제 경험을 바탕으로 가르칠 수밖에 없는데, 제가 공부할 때는 분명히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힘이 됐어요. 하지만 그 숙제를 내는 맥락은, 왜 글을 쓰려고 하는지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해보라는 거예요. 왜 쓰는가에 대한 의식 없이는 분명히 한계가 오거든요. 그렇게 고민하다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요. 자신의 상처, 열등감과 싸우고 그걸 한번 넘어서야 타인의 고통과 상처에 공감하는 능력이 커진다고 봐요.

 

‘이야기꾼’ 이기호라고 불려요. 입담이 좋다거나 이른바 ‘구라’가 있는 작가들에게 붙는 호칭인데 이기호를 그렇게 볼 수 있을까? 이기호가 그런 작가인 것 같진 않아서요. 두 가지 맥락이 있는 것 같아요. 하나는 말씀하신 부분이고, 또 하나는, 소설은 인문학이나 교양과 연관이 깊어서, 읽고 나면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성찰이나 교훈을 주는 차원이 있어요. 그런데 제 소설은 교양소설의 정반대 지점에 있지 않나, 가벼운 이야기를 쓰는 작가라고 비하하는 시선이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으로 드러나지 않나. 두 번째 작품집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이야기꾼이라는 호칭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소설은 어머니 세대들, 학력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이 읽어도 감동을 느끼고 즐거울 수 있다면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세 번째 소설집을 쓰면서 생각이 조금 교정됐죠. 소설가라면, 소설을 이야기로 한정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세 번째 소설집 <김박사는 누구인가>가 나오고 사람들이 “어두워졌다”고 평가하더라고요. 그렇다기 보단 조탁된 거라고 보지만, 하여간 변화가 있었던 거죠. 어떤 변화였는지 생각해봤어요. 지금까지 소설 쓴다고 타인에게 눈을 돌렸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아니라 내 눈에 비친 그들을 보고 있었어요. 어떤 차원에서는, 내 안에 갇혀 쳇바퀴 돌 듯이 계속 내 이야기를 한 거예요. 타인을 바라보는 내 시선을 느끼고, 타인이 타인으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어요. 다만 누군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을 알고 싶고 그리고 싶어서 하는 노력이 전부이지 않을까.

 

‘소설론’의 변화 못지않게 형식적인 변화도 있었어요. 예전에는 소설에 편입되지 못한 형식을 친근해질 때까지 밀어붙이라는 미션을 스스로에게 주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그것도 스스로 반성해보면, 미학적인 부분, 말하자면 형식적인 부분에서 신인은 어쨌든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물론 나름의 논리가 있었죠. 기존에 있던 문장들이 답답했어요. 현실과 괴리되어 있고 치장된 문장이라는 느낌이었죠. ‘우리는 사실 그렇지 않다, 우리의 이야기는.’ 좀 더 날 것의 목소리, 지금 현실에 있는 인물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옮길 수 있는 형식을 찾기 위해 나름대로 고투했어요. 쉽게 읽히는 소설이지만, 상당히 많은 퇴고를 거쳤거든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미학적으로 새로운 걸 추구한 건 맞아도 혁신이나 점핑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치장이 싫어서 이쪽으로 갔는데 또 다른 치장이 된 거죠. 형식적인 변주가 내겐 이제 쉽고, 형식적인 변주가 있기 때문에 내용이 좀 빈약해도 커버해주는 부분이 없지 않아 있었어요. ‘내가 형식에 기대는 이유는 혹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나의 알맹이가 너무 형편없고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습긴 하지만 이런 반성이 요 몇 년 사이에 많았어요. 지금까지는 변칙으로 아웃복서처럼 했는데, 정공법으로 가보자, 힘든 방향으로 가 보자, 했어요.

 

새 장편소설 <차남들의 세계사>는 정말 정공법이더라고요. <차남들의 세계사>를 쓰는 와중에 <김박사는 누구인가>가 나왔는데, 지금까지 얘기한 생각들 때문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몸을 바꾸는 듯했어요. 까놓고 얘기하자면 불안했죠. 사람들이 이제 더 이상 내 소설을 읽지 않을 수도 있고, 이기호의 소설이 다른 작가의 작품들과 가졌던 차이가 없어질 수도 있고요. 이런 불안감이 문장을 쓰는 내내 있었어요. 그걸 모른 척하면서 쓰는 과정이었어요.

 

<차남들의 세계사>는 벌써 무수한 작품이 나와 있는 전두환과 그의 시기를 다뤄요. 소재부터 정면승부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이 소설의 마침표를 못 찍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제일 컸던 작품이고요.

 

몇 년 전에 에서 ‘작가론’을 청탁 드린 적이 있죠? 다시 읽어보니 이런 문장이 있더라고요. “작가는 각자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세 명의 아이를 돌보는 것도 지구를 지키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고, 피하기보다 그걸 감내하면서 소설을 쓰겠다는 얘기였어요. 제게 주어진 환경이고, 그걸 외면하는 건 난센스라는 거죠. 모든 작가의 차이는 각자의 진실을 마주하면서 나오는 것 같아요. 제가 지금 광주라는 낯선 고장에 내려와 있다는 것도 저의 진실일 수 있어요. 삶의 토대에 대한 얘기예요. 예전에는 그게 전부라고, 그게 윤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몇 년 전이었잖아요? 지금은….

 

아마도 제가 드리려는 말 같은데, 그 글에 이런 문장이 있었죠. “지구를 지키면서도 쪽팔려하지 않고, 다시 지구를 지키는 소설을 쓰는 것.” 예전에는 지구를 지키는 게 가정을 수호한다는 뉘앙스였다면, <차남들의 세계사>를 읽고 보니 공적인 부분에 대해 말하는 듯했어요. 맞아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에게 억압적으로 부여된 도덕 체계보다는 개인의 법칙에 따라 각자의 윤리를 지켜나가는 게 진실로 향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계속 그러다 보니까 어떠냐면, 허무주의랄까요? 세상에 의미가 없고, 자기만 잘살면 되고, 자기 앞가림만 잘하면 된다는 거요. 예전엔 없지 않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요즘 들어 자꾸 사회적인 현상과 사건을 접하면서 고민에 빠져요. 과연 내가 세운 윤리만 잘 지키고 살아가면 이 세계는 그럭저럭 살 만한 세상이던가, 혹은 그런 삶을 써내려 가는 것이 과연 이 시대에 합당한가. 단순히 그럴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각자의 진실도 있지만, 어쩌면 우리가 공통적으로 바라보는, 들춰내야 할 진실도 분명히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작가는 굉장히 모순적인 존재가 될 수도 있어요. 자기 자신의 진실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면서 공적인 진실을 챙기는 거니까. 저는 학교 선생으로 월급 꼬박꼬박 받고, 아이 세 명 키우고, 아직 대출금은 있지만 아파트와 차도 있어요. 어렵고 아픈 사람들과 공감한다면서 자기는 자기 것 다 챙기는 이 모순과 이 괴리가 문장을 쓸 때 너무 힘들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할 것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 생각하는 요즘이에요.

 

소설가로서의 공적인 책임감이 더 커진 건가요? 책임감까지는 모르겠어요. 좀 부끄러운데요. 글을 쓸 때의 마음가짐과 생활의 마음가짐이 달라요. 우리나라 공교육과 사교육 시스템에 대해 비판적인 신문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 막 쓰고 나서 우리 아이 초등학교 입학시키려는데 학교가 좀 멀더라고요. 그래도 뭐 다녀야지 했는데, 동네 사람들이 저쪽에 있는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라고 하더라고요. 혼자 막 엄청 갈등했어요. 결국 추첨에서 떨어져서 가지는 못했지만요. 칼럼뿐만이 아니에요. 제 소설에는 대부분 사회 바깥의 사람들, 바보들이 나와요. 하지만 저는 세속적인 가치를 충실하게 따르면서 살아왔죠. 아주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격차를 느끼지 못했던 시절은 전업 작가 시절이었어요. 직장을 안 갖고 오로지 글로만 먹고살았으니까요. 늘 부족했고, 늘 사회적으로 비주류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직장 잡고 나니까 해이해져서 애도 세 명이나 낳고. 하하.

 

<차남들의 세계사>에서는 ‘소설가’가 대놓고 개입해요. 대표적인 게 ‘이것을 들어보아라’ 하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거죠. 어떤 기사에서는 그 부분이 독자의 참여를 유도하는 거라던데, 공감의 효과가 크게 느껴지긴 했어요. 공감도 있었고요. 처음의 아주 솔직한 의도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러운 상황들이 벌어지는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가 소설을 읽는 과정을 한번 봐라, 너희들, 이것을 들을 때 턱을 괴고 들어보아라, 커피를 한 잔 마시고 들어보아라. 담배를 한 대 피우고 들어보아라. 사실 맨 마지막에 한 문장을 넣으려다가 안 넣었죠. ‘너희들이 커피 마시고 담배 피우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한 사람은 30년을 쫓겨다녔다’는 식의 문장. 우리는 타인의 고통과 상처를 바라볼 때, 어쩔 수 없이 한 걸음 거리를 두려고 해요. 그래야 안전하다고 느끼니까요. 어쩌면 우리가 소설을 대하는 심정은, 아, 고통스럽다! 하지만 난 안전해, 인지도 몰라요. 지금 우리가 너무 편안한 건 고통에 둔감해져서는 아닌가 하는 질문이 내면에 있었어요. 약간 독자를 조롱하려고, 아니 독자의 허위를 얘기하고 싶었죠. 조금 더 가까이 와서 들어보라는 맥락도 있었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