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

한예리가 붉게 피었다.

재킷, 셔츠, 팬츠, 팔찌 SAINT LAURENT 반지 DIOR.
코트 BALENCIAGA 팬츠 SAINT LAURENT.
스웨터, 셔츠 GUCCI 스커트 MIU MIU.
셔츠 SAINT LAURENT

단편영화 < 기린과 아프리카 >에서 한예리는 왜 우는지 모르는 채 울었다. 처음 우는 법을 배운 여자처럼. 무슨 생각을 하며 눈물을 흘렸는진 정작 그녀도 모른다. 까만 재처럼 울었다. 이 장면에서 한예리는 인생을 협박하듯, 다신 지을 수 없는 표정으로 응고되었다. 하지만 최근 개봉한 영화 < 해무 >에서 한예리가 연기한 홍매는 더 이상 날것도, 감출 줄 모르는 소녀도 아닌, 끝 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둡고 이해하기 힘든 여자였다. 홍매는 그칠 줄 모르던 감정이 모두 증발 한 오후 세 시 같았다. 한예리가 촬영을 위해 지하 스튜디오로 내려왔다. 스스로 계단 위 공기를 데워 그 위를 조심스레 밟고 있는 것처럼.

커피 마실래요? 아니요. 따뜻한 차가 좋겠어요.

아침에 일어나서 뭐 먹었어요? 바나나 먹었어요. 일찍 일어나는 편은 아니에요. 일곱 시간 이 상은 자요. 못 자면 예민해지니까. 힘들면 화가 나니까.

화도 내요? 사람 좋단 얘기 많이 들었는데, 근데 마냥 착하게 사는 게 피곤하진 않아요? 화를 내면 누군가는 “한예리 변했다”고 할까 겁나요.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결국 나예요.

노래도 했던데요? 목소리만 들렸어요. < 연우의 여름 >이란 단막극에 출연하면서 불렀어요. 노래하는 역이라서. 예기치 않게 음원을 가진 배우가 됐죠. 무용을 하면서 음악을 많이 들어요. 귀로 듣고 몸으로 표현하는 훈련을 받아서 듣는 게 자연스러워요. 게다가 음악 없는 영화는 상상하기 힘들잖아요.

무슨 음악 들어요? 요즘은 영국 가수 샘 스미스 앨범을 들어요. 클래식이나 국악도 듣고요.

국악? 가야금산조, 대금산조, 시나위를 좋아해요.

다른 건요? 다들 좋아할 것 같은데, 하울의 움직이는 성, 원령공주, 이웃집 토토로의 애니매이션 OST.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발매한 OST는 정말 대단해요. 현대무용 배울 땐 영화 < 트레인 스포팅 > OST를 들으면서 몸을 풀었어요. 이 음악은 비트가 반복적으로 쓰이는데, 속도를 높여서 몸의 에너지를 서서히 증폭시키기에 좋아요. 비트가 서서히 발전하는 음악은 영화에서도 많이 쓰죠.

한국무용은 전승 춤이 있지 않아요? 사사 받고, 이수 받고 하죠. 살풀이, 태평무 다 배우긴 했지만 이수자나 전수자가 되었다면 아마 배우는 못했겠죠. 한 가지 춤을 내려 받는 건 그 집안 사람이 된다고들 표현하는데, 교육도 엄격하고 해야 할 일이 많아요. 집안사람이 됐다면 자유로운 춤을 출 순 없었을 거예요.

배우는 어떻게 하게 됐어요? 김민숙 감독이 춤을 가르쳐줄 사람을 찾기에 돕다가 오디션을 봤어요. 김민숙 감독 졸업작품에 출연하게 된 거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연기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 기린과 아프리카 >를 촬영했어요. 모든 장면마다 김민숙 감독이 주인공의 감정에 대해 차분하고 다정하게 설명했어요.

지금까지 몇 편의 영화에 출연했어요? 스무 편이 되려나? 단편영화를 많이 찍었어요. 글쎄요 편수는 정말 잘 모르겠어요.

많은데요. 단편영화는 두 시간 만에도 촬영하고, 하루 만에도 완성하니까. 좀 다르죠.

어떤 영화가 기억나요? 아무래도 < 기린과 아프리카 >. 그때 제 모습이나 에너지가 지금과는 많 이 달라요. 살아 있는 느낌, 날것 같은 떨림, 딱 한 번만 보여줄 수 있는 연기 같아서요.

모르는 사람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요? 무용한다고 했죠. 연기는 서른까지만 할 생각이었거든요. 서른이 넘으면 더 진지하게 무용을 하려고 했어요. 그래야 인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마냥 좋은 건 서른까지만 하자고 결심했었죠.

진짜 배우라고 느낀 건 어떤 영화부터예요? < 해무 >. 이 영화는 긴 호흡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홍매를 정말 좋아하게 됐는지도 몰라요. 배역에 애착을 갖게 되면서 ‘여배우란 수식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된 건가?’란 생각도 한 것 같아요.

< 해무 >, < 기린과 아프리카 >에서 꼭 봐줬으면 하는 장면 있어요? < 기린과 아프리카 >에서 이별을 앞두고 눈물을 흘려요. 그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요. 지금도 ‘내가 왜 그렇게 울었을까?’ 생각해요. 굉장히 짧지만 그 표정을 오랫동안 기억해줬으면 해요. < 해무 >는 홍매의 발목과 발 그리고 신발이요. 이 여자가 다 숨기고, 가리고 있지만 유일하게 보여주는 부분이에요. 발목만 나 오는데 정말 섹시해요. 동식과의 관계에서 신발이 중요한 역할도 하고. 어쩌면 지나칠 수 있는 해석이지만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어요.

홍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가 많아요. < 해무 >는 홍매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았죠. 조 금 더 친절했으면 단순하고 확실했겠죠.

요즘 촬영하고 있어요? 아니요. 9월에 있을 공연 연습하고 있어요. 타이틀은 ‘설령, 아프더라도’예요. 1장은 황순원 작가의 소설 ‘소나기’를 모티브로 성장과 이별에 관해 얘기해요. 소나기처럼 짧은 사랑의 순간에 대한 거죠. 2장은 굿-Good인데 사람의 인생에 고저가 있고 아픔이 있더라도 끝까지 가야 한다는, 결국 둘 다 아픔에 관한 이야기예요. 굿의 모티브를 가져와서 형태, 음악, 오브제마다 한국적인 느낌이 강해요. 1장은 보기에 편하고, 2장은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굿에서 가져온 반복적인 비트 때문에 현재적이면서도 생경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아름다움’이란 말을 들으면 뭐가 떠올라요? 아름다움이란 말에선 향기가 나요. ‘예쁘다’와는 전혀 다른 말이죠. 서양란과 동양란의 차이랄까? 서양란은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고, 동양란은 작지만 자연스럽고 가늘고 강인한 느낌이에요. 동양란 꽃은 작아서 향이 없을 것 같지만 실제론 향이 강렬하고 그윽해요.

평소에 어떤 영화를 봐요? 가리진 않아요. 박수치고 소리 지를 수 있는 < 어벤져스 >도 봤고, 스 튜디오 지브리의 < 이웃집 토토로 >를 보고 울기도 하고, < 본 슈프리머시 >를 보고 ‘아, 이런 게 액션이지’ 하기도 해요. 그리고 주성치 영화를 좋아해요.

<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 봤어요? 짐 자무쉬 감독 진짜 좋아해요. 틸다 스윈튼 도 좋아하고요.

어떤 여배우를 좋아해요? 틸다 스윈튼, 예쁘기까지 한 아름다운 배우라고 생각해요. 줄리엣 비노쉬 그리고 샤를로트 갱스부르, 나탈리 포트만이요. 좋아하는 배우는 정말 많아요.

질투는요? 질투는 남자 배우에게 느껴요. 남자 배우가 좋은 역할 받을 때, 저 역할은 좋은 여배 우가 해도 잘할 수 있는데 싶어서요.

예를 들면? 말 안 할래요.

여행 좋아해요? 파리엔 한 번도 못 가봤는데 ‘디저트’를 먹으러 가고 싶어요. 그리고 박물관도 가고. 루브르 박물관 정말 가보고 싶어요. 세계적인 유산들이 모여 있어 슬프기도 하겠지만 그렇더라도 보고 싶은 마음이에요.

술 좋아해요? 네. 소주. 영화를 하면 스태프와 마시는 경우가 많아요. 어디서든 사올 수 있는 소주가 가장 좋죠.

어느 동네 살아요? 꾸준히 월계동에 살고 있어요. 산과 시내가 있어요. 왕복 7킬로미터 벚꽃길 이 있어서 봄에 오면 좋을 거예요.

인터뷰하면 꼭 받는 질문 있어요? “어떤 배우가 되고 싶어요?”라고들 묻고, 전 “좋은 사람, 좋은 배우가 되겠다”라고 말해요. 항상.

드레스, 니트 톱, 스카프 PRADA 슈즈 GUCCI.
스웨터 J.W. ANDERSON 팔찌 MAISON MARTIN MARGIE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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