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올 가을과 겨울의 열 가지

2014.10.02강지영

정물처럼 우아한 삶을 위한, 고요한 물건 10.

SALVATORE FERRAGAMO / Calf & Suede Blouson 마시밀리아노 지오르네티가 만든 살바토레 페라가모의 옷에는 요즘 패션에선 참 보기 드문 덕목, 즉 상식과 기본이 있다. 이 브랜드는 좋은 옷은 디자이너의 유명세나 유명인 마케팅이 아닌 소재와 재단이 먼저라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또 믿는다. 페라가모의 스웨이드 블루종은 우선 코코아색깔 질 좋은 스웨이드를 과감하게 잘라 호방하게 썼다. 카프 스킨으로 햄라인과 포켓을 정리하고 윗주머니의 모양을 슬쩍 비튼 것 말고는 다른 조잡한 장식은 없다. 오늘을 위해 오래전에 미리 만들어 둔 옷처럼 정성스럽고 품위 있는 것 역시 이 블루종을 입고 싶은 백만 가지 이유 중 하나다.

GARRETT LEIGHT / Brooks, Hampton, Kinston 개럿 라이트 캘리포니아 옵티컬은 요즘 가장 잘 하는 안경과 선글라스 브랜드다. 눈에 띄고 손이 가는 건 알고 보면 전부 개럿 라이트였다는 얘기는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4대째 캘리포니아에서 살고 있는 라이트 집안의 건강한 아들 개럿은 베니스 비치에서 와일드하게 자랐다. 바다와 서핑, 햇빛과 여름은 그에겐 피부처럼 밀착되어 있고, 안경과 선글라스계의 또 다른 상징인 올리버 피플을 만든 부모의 영향으로 제대로 된 물건을 볼 줄도, 만들 줄도 안다. 그러니 개럿 라이트는 무조건 믿어도 좋다.

SMYTHSON / Panama Notebook 스마이슨의 파나마 노트북은 사소한 일도 기록하고 싶게 만든다. 창백하고 얇은 종이에 푸른 잉크를 똑똑 떨어뜨리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적고 싶은 가을. 128장의 초경량 하늘색 종이를 단단하게 묶어 부드러운 램스킨 커버를 씌운 이 작고 고상한 공책엔 뭐라도 어서 더 적고 싶어진다. 문고본보다 작은 크기라 가방에든 코트 주머니에든 넣고 다니기 좋고, 접거나 말아놓아도 모양이 망가지지 않아 보관도 아주 쉽다. 표지 색깔은 여러 가지, 정면의 글귀도 이것저것 많지만 Live, Love, Laugh로 골랐다.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는 것 같아서.

DIOR HOMME / Straight Jean 모두들 충동적인 척, 계획적으로 청바지를 찢던 시절이 있었다. 발목의 실밥은 점점 더 길게 나부끼고 무릎의 구멍은 끝도 없이 커졌다. 그러나 찬바람이 불면서 그 모든 게 시들해지고 급기야는 민망해졌다. 최근 교태 없이 얌전한 청바지를 찾으려는 자들이 입을 모아 찬양하는 진이 바로 디올 옴므 스트레이트 진이다. 다섯 개의 주머니, 버튼 플라이, 단순한 리벳과 로고 장식이 없는 뒷포켓. 워싱이 각별히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이 청바지의 이름을 다 적으면 디올 옴므 스트레이트 진 디보티드 트리트먼트. 얼마나 공들여 만들었으면 헌신적인 보살핌이란 이름을 지었을까. 덕분에 색깔 하나는 끝내주게 멋지다.

Hermès / Le Bain 누군가에게서 드물게 좋은 향을 발견했다면, 그리고 그 향이 어떤 브랜드로도 짐작되지 않는다면. 그건 향수보다는 샤워젤이나 오일 같은 보디 제품일 확률이 높다. 비누나 샴푸는 향수처럼 훅 치고 들어오는 대신 천천히, 부드럽게 타인의 신경에 스며든다. 에르메스의 르 뱅 컬렉션은 이렇듯 은유적이고 가벼운 방식으로 향을 즐기는 기쁨을 얘기한다. 다양한 향과 시리즈로 구성되는 에르메스 르 뱅의 콜로뉴 컬렉션과 자뎅 컬렉션 중에서 특히 권하고 싶은 건 오 드 나르시스 블루. 깊은 숲의 나무 향과 들판의 수선화 향이 정교하게 섞였는데, 이건 향기라기보다는 차라리 촉감에 가깝다.

BELGIAN SHOES / Mr. Casual 벨지안 슈즈는 벨기에 농부들이 신던 펠트 슬리퍼를 모티브로 만들었다. 거친 땅 위에 종일 서 있던 농부들의 신발이니 편한 건 물론, 견고하고 가뿐하다. 3백 년 전통의 벨기에 스튜디오에서 섬세한 수작업으로 만드는 이 신발은 안쪽에 봉제선이 없어 신는 순간 어리둥절할 만큼 편하다. 양탄자 위에 캐시미어 양말을 신고 서 있는 기분이 이럴까. 벨지안 슈즈가 유명해지면서 다이아몬드 뱀프와 작은 리본 장식은 이제 흔해졌지만 특유의 안락함은 다른 신발은 흉내도 못 낸다. 오리지널의 가치란 이런 것. 참, 벨지안 슈즈는 평소보다 반 치수 작게 신어야 예쁘다.

SAINT LAURENT / Lynx Broche 생로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에디 슬리먼 특유의 태도를 좋아한다. 사실 생로랑은 그 태도 하나로 모든 얘기가 끝난다. 다른 사람은 상관없고 내가 좋아하는 게 결국 맞다는 자신감. 사자와 거미 브로치도 비슷한 맥락이다. 턱시도 라펠에 꽂아도, 타이핀 대신 써도 나만 멋지면 그뿐. 실제로 이 브로치는 보석 반지나 금 팔찌보다 훨씬 강력한 인상을 남긴다. 사자 브로치는 매트 스털링 실버, 거미는 실버와 오닉스로 만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는 호기심 어린 얼굴은 그래봤자 결국 남이다. 에디 슬리먼은 패션은 순수하게 개인의 취향 문제라는 걸 다시 깨닫게 한다.

BOTTEGA VENETA / Wool Hat 보테가 베네타의 울 소재 모자는 멀티 컬러 딥 다이 울 햇과 브론즈 울 햇, 두 종류. 멀티 컬러는 이름 그대로 염색을 몇 번 거쳐 세 가지 색깔을 고루 섞었는데, 핵심은 부드럽게 번진 듯한 효과다. 수채 물감이 자연스럽게 퍼지듯 색깔을 만드는 건 염색 장인들의 몫. 브론즈 울 햇은 갈색 고급 울 원사로 촘촘하게 짠다. 보기엔 틈이라곤 없이 짜인 것 같아도 써보면 이마를 쓰다듬는 여자의 손처럼 다정해서 조이거나 팽팽하지 않다. 밀도는 있으나 휘파람처럼 유연하고 여유롭다. 얼마만큼 접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모자의 형태 또한 흥미롭고.

LOUIS VUiTTON / Alpinist Boots 여행을 좋아하는 킴 존스가 올 가을 겨울을 위해 오랫동안 생각한 곳은 남아메리카 대륙이다. 그의 남아메리카에 대한 애정은, 알파카와 캐시미어처럼 따뜻한 소재를 아낌없이 쓰고 그곳의 자연이 지닌 포도주색, 푸른색, 갈색을 듬뿍 넣은 컬렉션만 봐도 가늠할 수 있다. 알피니스트 부츠는 이번 루이 비통 컬렉션을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 느낌표다. 러버 소재로 꼼꼼하게 만든 아웃솔은 빗길 눈길에서도 미끄럽지 않고, 신통한 마이크로 인터솔은 신발의 무게를 확 줄였다. 이 신발을 신어보면 튼튼하고도 가볍다는, 도무지 의심스러운 말을 비로소 믿게 된다.

BALENCIAGA / Grid Coin Wallet & Single Card 알렉산더 왕의 발렌시아가는 프랑스의 탐미주의에 미국식 실용주의를 더한 독특한 면모가 있다. 이전에 비해 훨씬 캐주얼해진 발렌시아가를 볼 때마다 ‘엘리건트’란 빗장으로 굳게 닫아놓은 엘리제풍 궁전에서 알렉산더 왕이 긴 생머리를 찰랑이며 뛰쳐나오는 장면이 연상되고, 그 모습이 참 철부지 같기도, 때론 용감해 보이기도 한다. 송아지 가죽에 올록볼록한 엠보싱을 넣어서 고무처럼 만든 그리드 라인은 새로운 발렌시아가의 표식이다. 발렌시아가에선 매 시즌 그 계절의 색깔을 담은 액세서리를 만드는데, 올가을의 색은 빙하의 중심부에서 힌트를 얻은 블루 글라시에로 택했다.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이신구
    어시스턴트
    백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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