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로 적은 문학

한글로 쓴다. 하지만 문학이 한글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문학은 현실을 글로 잘 옮긴 가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학은 한글로 한글을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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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공부 안 한 학생도 최초의 한글 소설이 <홍길동전>이라는 것쯤은 안다. 모름지기 교과서에서 제일 먼저 외워야 할 것은 ‘최초’니까. ‘최초’를 외우고 ‘한글’은 건너뛰는 게 ‘위상’을 ‘언어’보다 우선하는 한국 문학교육의 속내라고 하면 지나칠까? 다만 1997년, <홍길동전>보다 약한 세기 앞선 한글언해 필사본 <설공찬전>이 발견되었을 때 선생과 학생이 예외없이 떠올렸을 질문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이제 최초의 한글 소설이 <설공찬전>이라고 외워야(가르쳐야) 하나?”

소설가 고종석은 2007년 <한국일보>에 게재한 칼럼 ‘한글 소설이라는 허깨비’를 통해, <홍길동전>이든 <설공찬전>이든 ‘한글’ 소설이 아니라 ‘한국어’ 소설이 옳다고 지적한다. “우리는 어떤 문자로 ‘표기’하거나 ‘전사’할 수는 있지만, ‘창작’하거나 ‘번역’할 수는 없다. 적어도 표준적 언어 사용에 따르면 그렇다. 텍스트를 짜는 것은 문자가 아니라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의 표현(한글로 창작한다)은 ‘한국어로 창작한다’거나 ‘한국어로 번역한다’로 고쳐야 할 테다.” <변신>의 독일어판을 번역한 한국어판까지 한글 소설이라고 부를 작정이 아니라면, 한글 소설은 부정확한 개념이다. 비유컨대 노가 아니라 노를 부리는 기술이 배를 나아가게 한다. 한국 사람은 한글이 아니라 한국어로 생각한다.

한국어로 생각한다는 것은 최소한 고대 신 라어로부터 이어지는 계통 안에서 생각한다는 것이지만, 한글로 쓴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백 년 전에 만든 문자, 갑오개혁의 언문일치운동을 기점으로 하는 1백 년 가량의 역사의 현대 문자로 적는 것이다. 시인 이성복의 말대로 시가 “뿌리를 먹어야 하는 고구마처럼, 말의 뿌리를 취하는 것”이고, “언표 불가능한 데 가장 가까이 닿는 말”이라면, 문학은 한글보다는 한국어와 관계될 것이다. 한 시대와 계급에 얽매여서 읽고 배운 말이 아니라 하나의 땅에서 대대로 나고 자란 사람이 듣고 익히면서 입에 붙어 있는 말. 이성복은 이어서 말했다. “진짜 문법은 책이 아니라 우리 입에 있어요.”

물론 한글의 한계를 지적할 수도 있을 것 이다. 너무 광대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발생하는 한계를 한계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이르는 독특하고 현란한 쓰기 규칙, 정확한 배경을 모르는 채 쓰고는 있는데 예외는 더 많은 음운과 통사 규칙, 너무 많아서 감각에 따를 수밖에 없는 어휘(그럼에도 쓸 만한 우리말 유의어 사전이 나온 게 채 5년이 되지 않았다) 등등. 문학가들은 ‘굳이’ 문제 삼자면 서술형 어미 ‘다’가 곤란하다고 했다. 이성복은 말했다. “모든 문장을 ‘다’로 끝내니까 각운이 없죠.” 소설가 배수아가 같은 뜻을 다르게 표현했다. “모든 문장의 마지막 어쿠스틱이 똑같은 거죠. 또 우리말에서 ‘다’ 앞에 받침으로 붙는 쌍시옷 때문에 소리가 너무 억세고요.” 한글에 대한 의견인 줄 알았더니, 사실 그들은 한국어에 관해 말했다.

“리듬 다음에 깨달음이 따라와요.” 이성복이 말했다. 제아무리 의미 전달을 목적으로 삼아 쓴 글이더라도 ‘리듬’을 가진다. 한국어의 근원과 가능성을 최대한 담아내고자 하는 한국어 문학은 적극적으로 리듬의 마법에 기댄다. ‘리듬’은 어디에서 나올까. 숙련된 음악가에게 ‘그만의 그루브’가 있다고 말하듯이, 자신이 갈고 닦고 써온 모국어가 아니라면 뭘까.

문학에서는 모국어에 관한 완고한 의견이 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문학은 모국어 안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성복은 “시에서 번역되고 남은 게 시”라고 말했다. 소설가 배수아는 독일어로 대화하고, 독일어로 쓰고, 독일어를 한국어로 번역할 수 있지만 창작할 때는 “(모국어인)한국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두 개의 언어를 모국어로 가진 이중언어 구사자가 아닌 한 예외는 드물다. <홍길동전>이나 <설공찬전>을 한글 소설이라고 쓸 수는 없어도 국문 소설이라고 쓸 수는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고종석은 앞의 칼럼에서 썼다. “‘국문 소설’이라는 개념은, ‘한글 소설’과 달리, 성립할 수 있다. ‘국문’은 ‘한글’과 달리, 텍스트를 가리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한문 소설/국문 소설’은 개념화할 수 있는 대립이다. 물론, 거기서 ‘국문’이 한글이라는 문자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텍스트)를 가리킨다는 전제 아래서 말이다.” 모국어인 한국어는 아직 가능성만 제기 된 일본어와의 관련성, 충분한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알타이어족 가설을 제외한다면 고립어에 속한다. 친족 관계로 밝혀진 언어가 없다는 뜻이다. 한국어는 전 세계 모든 고립어를 합친 것보다 많은 사람이 사용하는, 그러나 한반도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다.

뭔가가 멀다고 말하려면 가까운 게 필요하다. 또 뭔가가 오래됐다고 말하려면 오래되지 않은 것을 규정해야 한다. 한국어 문학은 어느 쪽으로도 만족할 만한 비교 대상을 찾아, 어렴풋하게나마 그 성격을 규정하는 것조차 어렵다. 공간의 축에서는 친족 관계의 다른 언어가 없고, 시간의 축에서는 전하는 문학작품도 적을 뿐더러 해석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한글 창제 이전까지 한국어를 적는 가장 진보적인 방식은 6세기경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이두였다. 19세기까지 명맥을 유지한, 한 자의 음과 뜻을 빌려 적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훈민정음 후서에 나오는 정인지의 말에 따르면, 이두는 “말을 적는 데 만에 하나도 제대로 전달 하지 못했다.” 이두로 적은 문학 작품을 본다고 해도 해석은 수십 가지로 나올 테다.

그럼에도 이성복은 <삼대목>을 보고 싶다고 했다. <삼국사기>에서 책의 존재만 전하는, 신라시대의 향가를 수집한 한국 최초의 노래집이다. 한국어 시의 원형이 담겨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니까 일본의 4세기부터 8세기까지, 천황부터 서민에 이르는 수많은 인물이 부른 4 천5백여 수의 노래가 담긴 <만엽집>을 한국에 서는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학적, 정신적 고향을 다른 나라의 노래에서 어림짐작해볼 수 밖에 없는 사태다. 이성복은 꼭 해석이 중요하 다고 여기지는 않는 듯했다. “옛날 사람들의 표정, 웃는 모습을 한번 보고 싶은 거죠.” 한글이 아닌 한국어의 표정.

다만 한국어의 고유성을, 한국어 문학에 관한 한국어의 절대적인 영향력으로 환원할 수는 없다. 최근 들어 정정된 언어결정론의 시각 이거니와 “모국어를 뛰어넘는 언어의 보편문법”을 말하는 언어학자이자 인지과학자 스티븐 핑커의 설득력 있는 주장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랗다’에서 파생한 수십 개의 형용사가 있다고 해서 한국 사람들이 특별히 색깔을 예민하게 구분하는 것은 아니며, ‘누리끼리하다’를 치아가 변색된 것처럼 탁한 노란색 이라고 설명하거나, ‘누르스름하다’는 ‘Slightly Yellow’, ‘Yellowish’로 번역할 수 있듯이 한국어로만 수 십 개의 색깔을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설사 더 많이 표현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문화이지 위상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사람들끼리 좀 더 내밀하게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모를까.

한국어는 고유한 만큼 세계에서 당연히 협소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어 문학의 가능성이 한글에 대한 자부심에서 발생한, 순우리말 조어를 새로 만드는 식의 확장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순우리말이라는 작은  테고리에서 허우적대는게 작가의 양식은 아닌 것 같아요.” 배수아는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번역투의 문장이 뭔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배수아처럼 번역투의 문장을 좋아하는 취향도 어엿하게 한 자리를 차지한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사라져가는 우리말을 보존하는 역할도 필요하겠지만, 이성복의 말대로 “문화의 생명은 진보에 있다”. “지금 한민족이 어디 있고, 우리말이 어디 있어요. 한자어들이 육화돼서 토속어와 별 차이 없는걸요. 인터넷 비속어 ‘헐’을 보존하는 게 문화예요.”

그래서, 다들 영어를 배워야 한다는 간단한 결론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일상 문서 해독력 한국인 최하위권(국민일보)”이라는 치욕적인 결과가 나오는 이유는, 영어를 못 해서가 아니라 한국어를 못해서니까. 주변을 조금 돌아보면 상식적인 일이다. 피아노를 잘 치게 된 사람이 기타도 잘 습득할 확률과 피아노와 기타를 함께 시작해서 둘 다 잘 할 확률에 관해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모국어가 완강하게 증명하고 있듯이 사람은 배운 것보다는 몸에 붙은 걸 밀어붙이고 응용하면서 살아간다. 한글은 교육적인 차원에서 강요되지만, 한국어는 누구에게나 자연스럽다. 문학이 대중과 동떨어진 시대, 문학 교육은 먼저 한국어만의 표정을 보여주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