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권의 책과 썩 오래되지 않은 시간

 

 

01 1989년, 작은 누나 침대에 앉아 이 책을 읽으며 찍은 사진이 아직도 앨범에 꽂혀 있다.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동양편 제3권 <중국동화집>엔 정교한 삽화와 짧은 동화 25편이 있다. 편집위원에는 자그마치 청록파 박목월, 아동문학가 윤석중, 이원수의 이름이 있다.

 

02 1993년엔 거실에 앉아 바흐를 쳤지만 그게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지금은 치고 싶을 때만 피아노 앞에 앉는다. 대신 다른 누군가의 바흐를 훨씬 자주, 더 깊이 듣는다.

 

03 누나가 읽던 <날개>를 서재에서 처음 읽었던 건 1990년 즈음이었을까? 1999년 대학 입학 후에는 <권태>를 외우듯이 읽었다. 그때 누구와 얼마나 자주 즐겁게 어울렸는지와는 별개로, 과연 권태와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04∙05 2000년 초반엔 버지니아 울프와 존 스타인벡, T.S 엘리엇을 좇고 또 좇았다. J.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지금도 마음 가는 대로, 아무 데나 펼쳐서 몇 문단쯤 읽는다. 그러다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이 생각나는 가을밤이라니.

 

06 2001년 즈음 이충걸 편집장의 <해를 등지고 놀다>를 어디선가 읽고, 2007년에 어렵게 구해 간직하고 있다. 마음이 흐릿해질 때마다 이 책에 실린 인터뷰를 읽는다. 여전히 유일하고, 단연 정확하다.

 

07∙08∙09 2002년. 외박을 나올 때마다 “기차에서 읽어” 그러면서 책을 챙겨주는 우직한 선배가 있었다. ‘우성이에게.’ 그의 정직한 글씨가 적혀 있는 브레이트 시집 <살아남은 자의 슬픔>, 이성복의 <아, 입이 없는 것들>, 김훈의 <풍경과 상처>…. 그 선배는 지금 어느 일간지 사회부에서 종횡무진하고 있다. “이 형 덕에 내가 기자가 됐어” 다른 누군가에게 소개했을 때 그는 소주잔을 들고 ‘씨익’ 웃으면서, 나한테 진심으로 사과했다.

 

10 2014년, 올해는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아끼듯 읽었다. 몇 개의 단어가 남았다. ‘단절’, ‘혁명’,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으면서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는 삶’ 같은 말들. 그렇게 하려고, 그것만이 길인 것 같은 하루를 오늘도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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