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1 웃는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은 유재하

2014.10.31유지성

유재하란 음악을 발라드란 틀 안에 가두는 것은 그의 음악 중 절반, 또는 그보다 더 적은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어떤 틀 안에
박제시키는 일과 같다.

“처음에는 재능 있는 작곡가 정도였어요.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작곡가? 2000년도 넘어서야 불운의 천재 같은 수식어가 붙었죠.” 유재하의 친형이자 유재하 음악 장학회 이사인 유건하는 1987년 유재하의 음반이 나온 시점부터 지금까지, 가장 유재하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유재하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것을 목격해왔다. 

90년대 중반은 조규찬, 유희열 등 ‘유재하 키드’들이 정상 궤도에 오른 시점이다. 2003년 개봉한 영화 <살인의 추억>은 또 다른 전환점이었을까? 영화에 삽입된 ‘우울한 편지’는 불운, 천재라는 말에 꼭 들어맞는다. 영화에선 ‘우울한 편지’가 나올 때마다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노래는 장면과 썩 잘 어울린다. 그리고 ‘우울한 편지’는 <사랑하기 때문에> 음반을 통틀어서도 가장 복잡한 노래다. 보편적인 코드 진행을 완전히 벗어난다.

 

 

영화의 성공 이후 리메이크도 뒤따랐다. JK 김동욱, 나얼 등이 ‘우울한 편지’를 다시 불렀다. 유독 감정이 풍부한 보컬들이었다. 비 오는 날이면 라디오에서 ‘우울한 편지’가 나왔다. 불운의 천재 유재하. 거기에 서정이란 수식이 확고하게 따라붙었다. 더군다나 다른 노래는 몰라도 ‘사랑하기 때문에’만큼은 이미 무척 익숙했으니까. 아름다운 사랑의 세레나데.

그렇게 유재하는 서정의 아이콘이 되었다. 물론 그것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다. 한 사람의 음악가에겐 여러 면모가 있기 마련이고, 그중 특정부분이 부각된 것뿐이다. 하지만 서정미라는 것이 곧 발라드란 말과 동의어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잘못되었다 말할 수 있다. 유재하의 음악을 발라드란 틀 안에 가두는 것은 그의 음악 중 절반, 또는 그보다 더 적은 부분만을 보고 전체를 어떤 틀 안에 박제시키는 일과 같다. 한국적 발라드의 새 지평을 열었다, 발라드에 클래식과 재즈를 접목시켰다…. 과연 그러한가? 그는 자신을 스스로 발라드 뮤지션으로 규정했나?

“저희 집에서 합주했던 곡은 서정적인 게 아니었어요. 래리 칼튼의 ‘Room335’를 연주했던 게 기억나요. 마일스 데이비스의 < We Want Miles >음반이나 알 자루의 < Breakin’ Away ><breakin’ away=””>음반 같은 것도 많이 들었고요. 재하는 밴드를 되게 하고 싶어 했어요. 저랑 한양대 축제에 나갔을 땐, 재하가 앞에서 선글라스 끼고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죠. 재하가 그랬어요. 자기 음악은 혼자 피아노 치고 노는 게 아니라고. 많이 알리고 싶고, 사람들이 자기 음악을 듣고 자기 이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피아니스트 정원영의 집은 유재하와 친구들의 아지트였다. 밤이 되면 거기서 술을 마시며 합주하는 게 그들의 놀이였다. ‘Room335’에서 래리 칼튼의 기타는 머뭇거리지 않고 맹렬하게 내달린다. < We Want Miles > 음반에선 마커스 밀러의 훵키한 베이스가 돋보인다. 알 자루의 < Breakin’ Away ><breakin’ away=””>는 당대 팝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음반이다. 음악을 댄스와 발라드로 나누는 이분법이 아니라면, 이런 노래들을 발라드라 부를 순 없다.

“(김)현식이가 얘기하기로는 재하가 일본 쪽 음악을 많이 들었대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밴드 마스터로 활동할 당시 유재하를 만나, 그의 곡을 조용필에게 전달하기도 했던 베이시스트 송홍섭이 말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까지, 일본에선 유독 AOR 장르의 음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Adult Oriented Rock’의 줄임말이다. 말 그대로 성인 취향의 록. 에어 서플라이, 토토, 스틸리 댄 같은 뮤지션들을 칭한다. 물론 AOR은 대부분 멜로디가 아름답고, ‘댄서블’하거나 과격하지 않지만 그것은 굳이 말하자면 서정보단 낭만이란 단어가 먼저 떠오르는 쪽이다. 유재하가 말했듯 “혼자 피아노 치고 노는” 것이 아니라, 술판이라도 벌이며 친구들끼리 씩씩하게 어깨동무를 한 채 따라 부르는 게 더 잘 어울리는 음악.

정원영과 송홍섭이 말한 부분들은 모두 유재하의 음반에서도 충분히 두드러지는 경향이다. 특히 음반 수록곡 중 빠른 축에 속하는 ‘텅빈 오늘밤’, ‘지난날’, ‘우리들의 사랑’과의 접점이 확실하다. 먹먹한 곡의 질감, 리버브가 강하게 걸려 메아리치는 보컬, 보컬을 넘어설 정도로 부각되는 베이스 등은 자신이 좋아하던 팝 음악을 작은 부분까지 확실하게 재현해보겠다는 야심처럼 들린다. 굳이 이런 장르적 특징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밝은 유재하의 면모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유재하의 실제 모습과 음악적 지향점에 좀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는 그 노래들은 2014년 현재, 이른바 서정적 노래들에 비해 한발 뒤로 물러서 있다.

“술을 마실수록 점점 재미있어져요. 자기가 술값 다 내는 성격이라 인기 많았을 겁니다. 흥이 나면 노래도 불러주고 그랬어요. 우스갯소리도 잘하고.” 유건하가 회상했다. 또한 김현식의 소속사 동아기획의 김영 대표는 <세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유재하의 유작이 머리에 박혀 그를 내성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요즘말로 하면 개그맨이다.” 유재하의 어머니가 남긴 편지 ‘내 아들 재하에게’엔 “처음임에도 마지막이 되어버린 너의 디스크를 통해 나오는 목소리는 유난히도 밝더구나. 평상시 너의 성격처럼 말이다”라고 쓰여 있다. MBC 쿨FM에서 작년 11월에 방송한 다큐멘터리 <유재하, 청춘의 꿈으로 피다>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은 흥미로운 일화를 소개했다. “재하는 음악의 목표가 무대 위에 올라가서 ‘꺅’ 하는 소리를 듣는 거였어요. (관객들이) ‘오빠!’라고 소리 지르는 걸 좋아한다고도 얘기했고요.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첫 무대에서, 김현식 씨가 ‘키보드의 유재하입니다!’ 그랬더니 키보드를 밟고 올라가서 사람들한테 막 손을 흔드는 거예요. 그날 공연 끝나고 재하가 ‘야, 나 해냈어! 내가 원하는 게 이거야!’라고… (후략).”

가까운 사람들이 말하는 유재하의 모습이다. 하지만 1987년, 유재하의 음반 <사랑하기 때문에>는 유재하가 원했던 만큼의 반응을 얻지 못했다. 유재하는 자비를 들여 음반을 만들었지만, “사람들이 내 음악을 듣고 내 이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던 유재하의 야심은 곧바로 실현되지 않았다. “실망 많이 했죠. 재하 친구들 얘기로는 재하가 나름 대중성에 신경을 쓴 거였대요. 자비로 낸 건, 자기 음악에 터치를 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예요. 어떤 부분이든지.” 유건하가 말했다.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이 있었어요. 그것에 대해 얘기할 땐 단순하지만 심지 있게 표현했고요. 눈 뜨고 있을 땐 항상 그걸 향해 가는 모습이었죠.” 송홍섭이 덧붙였다.

잡지 <음악세계> 1988년 2월호엔 ‘사람은 갔어도 음악은 남아…’라는 유재하 추모 기사가 있다. 거기엔 유재하의 한 대학 동창과의 인터뷰가 실려 있다. “재하는 그 또래의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자신의 미래에 대해 무심했습니다. 전혀 자신을 돌보지 않는 친구였죠. 그의 모든 관심은 음악에만 있었고, 그 음악이 그의 비현실성을 덮어주는 셈이었습니다.” 미래 대신 지금 좋아하는 팝 음악을 기필코 구현해보려던 의지로 사재를 털어 음반을 만든, 오늘이 내일보다 중요하던 불꽃같은 사람. 스타를 꿈꾸며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농담을 즐기던 유쾌한 남자. 그런 유재하의 두 번째 음반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첫 번째 음반을 다시 한번 듣는 일. 그리고 그것을 똑바로 보는 일. 멋지게 선글라스를 끼고 신시사이저를 두드리는, 유재하의 무대 위 웃는 얼굴을 그려본다.

    에디터
    유지성
    ILLUSTRATION
    안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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