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화는 잘생겼다

임화의 시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가는 작가의 양식으로서, 스스로 작품이 되지 않나 싶다.

무심코 시집을 넘기다 작가의 사진이 실린 책날개로 되돌아왔대도 이해한다. ‘누구나 한번 뒤돌아볼 법한 미남’은 죽음쯤은 따돌린다. 시인 임화는 얼굴은 알고 작품은 모르는 희한한 작가였다. 외국인보다 ‘월북 작가’가 더 낯선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이 만난 후에도 얼굴만 보고 말았다. 아니, 시집 <현해탄> 초간본을 한번 뒤적거린 적은 있다. 명성과 달리 아주 감상적인 시라는 인상만 받고 덮었다. 백석의 시에 대해선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임화의 시에 대해선 입을 닫았다.

얼굴이 그의 작품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영역은 배우다. 영화감독 박찬욱은 배우 최민식의 얼굴을 가리켜 말했다. “그의 얼굴은 그 자체로 스펙터클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올드 보이>는, 최민식의 풍모를 전시하는 일종의 갤러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임화를 마주한 공간도 갤러리였을 것이다. 그를 듣거나 읽기보단 봤다. 대부분의 타인처럼 보는 데서 끝냈다.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봤을지언정 ‘보다’로 그친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였다. 영화감독 클로드 소테는 “배우가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에 (영화 연기의) 모든 것이 달려 있다”면서, “대사가 없으면 불안해하는” 배우라는 존재에 관해 말했다. 임화의 ‘대사’를 제대로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품은 건 그의 얼굴과 경력 사이의 간극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의 얼굴과 <임화문학예술전집>에 나온 저자 소개 사이의 거리는 꽤나 멀다. “특히 그는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의 서기장을 역임하고,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을 실질적으로 주도하는 등 프롤레타리아문예운동사에서 독보적인 이론가, 실천가였다.”

 

 

실제로 임화는 연기를 한 적이 있다. 1928년, 그의 나이 21세, <유랑>, <혼가> 두 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필름이 없어 확인해볼 수는 없지만 그의 ‘시선’을 유추할 수 있는 평론은 전한다. “뜨거운 태양을 쏘이고 다니는 마부의 얼굴로서는 너무나 희다. 이번 실패는 자기의 역을 생각지 않고 미남자로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그 원인이 된 것이다. 또한 동작에 있어서도 선이 너무나 가늘고 표정도 심각한 곳이 없다.” 임화는 사진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기생오라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임화가 미남인 것과 영화배우라는 직업 사이에는 큰 연관성이 없다. 임화는 영화배우가 아니라 모더니즘 예술로서의 영화를 높이 샀다. 임화에 관해 가장 꼼꼼하고 정확한 비평을 남긴 문학평론가 김윤식은 말했다. (어쩌면 여기에 나오는 임화의 이야기는 김윤식의 책 <그들의 문학과 생애, 임화>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임화의 행적은 “한 소년의 영혼의 갈증이 세속적인 여러 형태로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임화의 정신적인 거처는 독일 낭만주의 시에서 아나키즘으로, 다다이즘과 미래파를 지나, 모더니즘의 선구를 담당했던 영화, 계급혁명을 위한 민중문학으로 널을 뛰었다. 임화에게는 새로운 것이 곧 선이었다. 다만 김윤식이 지적하듯이 임화는 “가출 모티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에게 새로운 것의 추구는, 가출로부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었다. 김윤식은 설명했다. “유동하는 운동 속에 ‘주체성을 두는 일’, 그러니까 ‘주체성 재건’이야말로 그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었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그의 가출은 지속되었다.

임화는 일본에 가서야 계기를 만났다. 카프 도쿄지부에는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카프 경성지부와는 차원이 다른 지도자 이북만이 있었다. 임화는 새로운 것을 좇기보다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가진 어떤 격을 본 것 같다. 또한 일본을 근대 그 자체라고 여긴 임화는, 일본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와 그에 영향을 받은 예술, 학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집’ 문턱에 접어들었다.

1930년, 현해탄을 건너 되돌아온 임화는 카프 조직을 재정비하고, 서기장이라는 실질적인 지도자의 위치에 우뚝 선다. 그의 ‘대사’가 유독 선명하게 들리는 건 이 시기부터다. 김윤식의 표현대로 ‘주체성 재건’에 성공한 임화는 1953년 8월 6일 북한에서 처형당하기 전까지 그 주체성을 놓지 않았다. 이것은 임화가 시대에 정면으로 맞섰다거나, 어떠한 압력 앞에서도 꿋꿋했다거나 하는, 위인전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임화의 ‘주체성’은 스스로 부과한 문학적 과업과 문학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성으로 지켜진다.

1931년 공산주의자협의회사건과 1934년 전주사건으로 임화는 주체성에 상처를 입는다. 카프 조직원 중 그만이 집행유예로 풀려나거나, 병상에 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지 않았다. 이어서 카프는 해체 수순을 밟았다. 다년에 걸친 한국 신문학사 집필은 이에 대한 ‘주체성 재건’의 노력이었다. 하지만 1940년 무렵 이후부터 그는 영화사의 일, 심지어 반공단체의 일까지 하면서 문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이 시기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건 해방 후 ‘문학자의 자기비판’ 좌담회 장면에서다.

“자기비판의 근거를 어디 두어야 하겠느냐 할 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물론 그럴 리도 없고 사실 그렇지도 않았지만 이것은 단순한 예를 들어 말하는 것인데, 가령 이번 태평양 전쟁에 만일 일본이 지지 않고 승리를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는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생각했고 어떻게 살아가려 생각했느냐고. (중략) 물론 입 밖에 내어 말로나 글로나 행동으로 표시되었을 리 만무할 것이고 남이 알 도리도 없는 것이나, 그러나 ‘나’만은 이것을 덮어두고 넘어갈 수 없는 이것이 자기비판의 양심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임화는 문학을 하지 않은 반성으로서, 카프에 대한 책임감으로서 남로당을 밀고 나갔고 문학에 의해서 죽었다. 그의 죄목은 그가 6.25 전쟁에 이르러 쓴 시 ‘너 어느 곳에 있느냐’에 근거했다. ““종잇장처럼 얇아진” 가슴을 조리며 애처로이 전선에 간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형상을 그림으로써 영웅적 투쟁에 궐기한 우리 후방 인민들을 모욕”했다는 것이었다.

다시 읽어봐도 임화의 시는 특별하지 않다. 잘생긴 얼굴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지만, 아름다운 작품에는, 정치적인 입장에는 수많은 이견이 있다. 임화의 얼굴은 좋아할지언정 어떤 부분은 아예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그 작가는 무뢰한일 수 있는데, 작가가 그의 훌륭한 작품 같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양식이 없는 작가는 쉬이 용인되지 않는다.

임화의 시가 특별하지는 않지만, 어떤 작가는 작가의 양식으로서, 스스로 작품이 되지 않나 싶다. 시집 <현해탄>의 자서나 수많은 책 서문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 스스로에 대한 한계의 자각과 절망이다. “생각하여 쓸 때에 그렇게 열중했던 소위 노력의 소산이란 것이 뒷날 돌아보면 이렇게 초라한가를 생각하면 부끄럽다느니보다 일종 두려움이 앞을 선다. 내 자신이 이럴 바에야 하물며 인연 없는 독자에게 있어서 이 가운데 단 한 편이라도 나의 이름과 더불어 기억되리라고는 믿을 수가 없다.” 그의 자조는 어느 쪽으로도 겸양으로 들리지 않는다. 모든 서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사는 시간은 꿈과 현실이 어긋나는 과정이다. 아름다운 얼굴로 당하기에 더 잔인하게 느껴지는, 어떤 영화들이 노리는 비극적 효과는 그를 위한 것이다. 그는 배우로서 문학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