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와 탐식가 사이, 교산 허균

허균은 관직에 있는 내내 ‘탐식’과 ‘욕망’으로 비판 받았다. 하지만 그는 오직 유교의 테두리 안에서만 경망스러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해 기사를 쓴다고 스스로를 소개하면, 열에 아홉은 “좋은 인생”이라며 농을 건다. ‘먹는다’는 행위는 최고로 행복한 일이자 흥미진진한 여가로 여겨지는 시대이니 그 말도 틀리지는 않다. 매달 기사를 쓰면서 뜬금없이, 그리고 생각보다 자주, 교산 허균(1569~1618)을 떠올린다. 조선시대에 음식을 욕망하고 맛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이 지금처럼 인정받는 일이었다면, 그 시대를 겨우 살아낸 허균의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허균에게 시대는 어떤 의미였을까?

허균은 ‘쓰는 일’과 ‘먹는 일’에 모두 능통한 문장가다. 욕망을 억제해야만 하는 당대의 분위기 속에서 식욕과 식탐에 대해 대담하게 글을 썼다. 그 과정에서 부딪힌 장벽을 대하는 허균의 태도는 그의 글보다 더 놀랍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 기백과 ‘쿨함’은 독보적이다. 반항아, 풍운아, 아웃사이더, 칼럼니스트, 파워 블로거는 현세대가 그를 설명할 때 반은 웃자고 끌어오는 수식어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아버지는 초당 허엽, 누이는 허난설헌. 당대 명가의 자제. 그리고 <홍길동전>과 능지처참의 간극만큼 파란만장한 삶. 허균에 대한 듬성듬성한 이해로는 그를 다 알 수 없다. 몇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을 것 같다. 허균은 정말 역적이었을까? 허균은 <홍길동전>을 통해 세상을 전복하고자 했을까? 허균은 정치와 어울리는 사람이었을까? 기록과 문헌을 모두 기억하고 흡수하는 허균은 정말 천재였을까? 불교와 도교에 심취한 그는 정말 시대의 이단아였을까? 답은 어느 정도 추론 가능하다. <홍길동전>은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보단 허균이 평소 아끼던 친구 이재영이 중인으로서 어렵게 사는 모습을 보고 양반 사회에 대한 불만을 담아 쓴 작품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허균은 중앙 정치에 뛰어들기보다는 지방 고을의 관리가 되는 것을 더 좋아했으며, 그마저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수차례 탄핵 당했다. 허균의 평소 독서량은 어마어마했다. 백과사전식으로 방대한 분야를 소화하는 식이었다. 그 결과 다양한 분야로 관심과 사유를 넓힌 것이지, 이단자로서 야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답보다 더 중요한 건 이 모든 질문에 대해 정작 본인은 그다지 신경을 쓰고 살지 않았다는 점이다. “뜨고 가라앉는 것을 다만 천성에 다 맡기노라.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 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루겠노라.” 허경진이 쓴 <허균평전>에서 발췌한 허균의 말이다. 파직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뱉은 말이지만, 그의 인생을 농축한 말이기도 하다. ‘나름대로의 삶과 세계’를 이룩하는 것이 허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허균 나름대로의 삶에서 미식 행위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크다. 허균이 명필 한호 석봉에게 보낸 편지에 스스로를 “나는 평생 입과 배만을 위한 사람”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것의 증거는 1610년 함열(익산)로 유배 갔던 시절 허균이 쓴 방대한 전국 식재료 품평서 <도문대작>이다. 고장별로 유명한 식재료와 맛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최초는 아니다. 그보다도 전엔 1450년경 어의 전순의가 쓴 <산가요록>, 1552년 이전에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김유의 전통 조리서 <수운잡방>이 있었다. 하지만 앞선 두 책과 확실히 다른 점이라면 허균의 책은 개인적인 음식 경험과 맛에 대한 기억을 중심으로 쓴 ‘칼럼’에 가깝다. 맛을 정확히 품평하고, 방풍죽과 같은 별미에 대해선 특히 길게 설명하고 있다. 특히 유배 시절 집필한 것이라, 발로 뛰고 먹어보며 썼다기보다는 어린 시절 유복했던 경험을 반영하고, 유배지에서 구할 수 없는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써내려 간 쪽에 가까워 보인다. “끼니마다 먹지 못하여 굶주린 채로 밤을 지새 울 때면 언제나 지난날 산해진미도 물리도록 먹어 싫어하던 때를 생각하고…. (중략) 마침내 종류별로 나열하여 기록해놓고 가끔 보면서 한 점의 고기로 여기기로 하였다.” 허균이 서문에 쓴 말이다. <독서광 허균>의 저자 김풍기는 <도문대작>에 드러난 허균의 식욕은 억울하게 유배 당하는 과정에서의 고통과 결핍이 반영된 ‘미각적 상상력’으로 본다. 잡다한 분야에 걸쳐 전방위적 독서를 하는 허균의 평소 생활 습관이, 끊임없이 산해 진미를 맛보고자 하는 미식가의 길로 안내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허균이 음식에 과할 정도로 집착한 증거 역시 많다. 어느 고을에 임명돼 관직을 수행할 것인가를 두고 허균이 최천건에게 보낸 편지 중 이런 것이 있다. “가림(부여군 임천면)은 바닷가에 있어 궁벽한 지역이 기는 하나 생선과 게가 풍부하니 그곳으로 가고 싶은 마음 간절합니다.” 허균이 쓴 시문집 <성소부부고>에는 기윤헌에게 보낸 편지가 기록되어 있다. “함열은 새우도 부안만 못하고, 게도 벽제 것만 못했습니다. 먹을 것만 탐하는 사람으로서는 굶어서 죽겠습니다.” 함산 수령 한회일에게는 또 이렇게 썼다. “사람들이 함열은 작은 방어와 준치가 많이 난다고 하여 이 곳으로 유배지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금년 봄에는 전혀 없으니, 역시 운수가 기박합니다. 늙은 저는 입맛을 위해 왔는데, 거친 거여목으로 도주린 배를 채우지 못하니, 우스운 일입니다.” 먹는 일이 무엇보다 앞선다. 김정호가 쓴 <조선의 탐식가들>에는 허균이 “잘사는 집에 장가들어서 산해진미를 다 맛볼 수 있었다”고 말한 사료도 싣고 있다.

나는 허균이 식욕만 채운 탐식가라고 생각은 하지 않는다. 맛있는 것을 찾기 위해 허례허식을 내던지고, 품위마저 버린 점이 그 시대에 저지른 실수일 수는 있겠다. 조선시대의 또 다른 미식가라고 불리는 정약용은 욕망을 누르고 절제를 실천하는 미식 생활을 했다. 중인 역관 이표는 허균 못지않은 식탐을 가졌었는데, 중인이라는 이유로 사대부와는 아예 잣대가 달랐다. 따라서 허균의 미식 행보는 유별나 보였고, 적을 많이 만들었다. 동료 관리들은 허균의 행실을 툭하면 트집잡았고, 크고 작은 일들이 도화선이 되어 탄핵과 파직을 수차례 반복했다. <청성잡기>를 쓴 성대중은 허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허균은 ‘식욕과 성욕은 하늘에서 부여한 천성이고 윤리, 도덕을 만든 것은 성인이다. 하늘이 성인보다 한 등급 높다. 나는 하늘의 뜻을 따르기 때문에 성인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했다. 허균이 역모에 빠진 것은 이 말에 연유한 것이다.” 허균에 대해 모함하는 소리는 그뿐만이 아니다.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이다, 요망하다, 불교에 아첨한다, 금수 같다, 요사스럽다…. 역모를 합리화하기 위한 말이겠지만, 허균은 살면서 내내 이런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가 살았던 17세기가 이토록 잔인하다. 허균은 오직 유교의 테두리 안에서만 경망스러웠다.

“훗날 반드시 이론異論이 있을 것이다.” 동지이자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은 허균이 역적으로 몰려 사형 당한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이 말은 허균의 학자로서의 다양한 면모와 미식가로서 이룩한 업적에도 똑같이 해당한다. 지금이었다면 경망함은 솔직함이 되었을 테고, 그의 미식 경험은 또렷한 자산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후세가 교산 허균의 표준 영정이 마련한 것은 불과 한 달 전이다. 지방자치단체와 식품업계에서 <도문대작>을 마케팅 근거로 삼는 일이 잦은데, 그가 <도문대작>을 통해 진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입맛만은 아니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