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하 송진우에게 지금 듣고 싶은 말

한 사람을 좇던 모든 기록은 사실 기자記者를 향하고 있었다. 해방 이전의 <동아일보>는 거의 정부와 같은 구실을 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이 돈 같은 걸 개의치 않고 그저 쓰고 고민하고 또 쓰던 시대였다.

지금이 답답할 때 과거를 들추는 것을 도망이라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누구도 지금 여기서 벗어날 순 없으니까. 그래서, 가끔은 유랑하는 기분으로 옛날 신문을 뒤적이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깨닫는다. 어쩌면 이렇게 변한 게 없는지,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나아지지 않는 건지, 중고등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던 그 사건들이 불과 100년도 안 된 일이라는 걸 새삼 알 때의 당혹. 그럴 땐 사는 게 좀 버거워졌다. ‘지금이야말로 안정의 시작 혹은 완성도 높은 역사의 한 바닥’이라 순진하게 여겼던 때도 있다. 하지만 역사에 완성이 있을 리 없고, 늘 불안하고 초조한 가운데 오늘은 그저 뻔뻔스럽게 지나가는 거니까…. 그랬던 날, 고하 송진우 선생의 이름을 발견한 데는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생의 보도 사진에서 운동복 가슴에 있던 일장기를 지웠다. 이길용 기자의 보도였다. 네 번째 무기정간의 원인이었고, ‘일장기 말소 사건’이라 부른다. 1930년대 초, <동아일보>는 브나로드 운동의 주체이기도 했다. 브나로드 운동은 농촌 계몽 운동의 일환, 전국 규모의 문맹 퇴치 운동이었다. 1922 년에는 물산 장려 운동과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제창하기도 했다. 다양한 형식으로 <동아일보>를 이끌었던 송진우 선생은 늘 그 시대를 직면했다. 투옥과 고문, 강제 폐간과 속간을 몇 회나 거듭했다. 종이 신문이 나라를 이끈다는 책임감과 자부심이 대단했던 시절이었다.

 

대한언론인회가 출간한 <한국언론인물사화>의 한 단락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이 무렵의 신문기자들은 대부분 독립투쟁을 위한 지사적인 지식인이든가 아니면 명문이면서도 부잣집 출신의 한량들이었다. 그래서 어느 쪽이 됐건 간에 신문기자라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기생들이 더 신문기자들을 좋아했다. 의기義氣가 있고 술도 잘 마시며 팁도 덥석 많이 준대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중에서도 빙허는 더욱 인기를 끌었다. 미남 소설가인 데다 신문기자-양수 겸장인 그가 요정에 나타나기만 하면 기생들이 서로 그 방에 들어가려고 앞을 다투었다고 한다. 그러나 빙허는 그런 꽃밭에서도 외도는 아니했다는 것. 놀기 좋아하고 술 잘 먹기로 유명했지만 허튼짓 않기로도 또한 유명했다는 것이다.”

 

빙허는 <운수 좋은 날>을 쓴 소설가 현진건의 호다. 송진우 선생을 좇다 보면 만나게 되는 여러 인물 중 하나다. 과연 그릇이 크고 호방한 기자였다는 기록이 많다. 요정 출입은 취재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고등계 형사의 눈을 피해 ‘밤에는 요정에서 사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스스로 퍼뜨리려는 의도였다. 하루는 취재를 나갔던 현진건이 술에 잔뜩 취해 회사로 돌아왔다. 그러다 사장을 만나 실랑이가 붙었다. “좀 취했구먼?” 했을 때 “그래 좀 취했다. 언제 네놈이 사장이라고 나 술 한잔 사줘봤냐? 있으면 있다고 말해봐 이놈아!”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뺨도 한 대 후렸다. 뺨을 맞은 사장이 인촌 김성수였는지, 고하 송진우였는지는 기록이 엇갈린다. 하지만 우승규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은 1982년 9월 30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있던 현진건이 하루는 술에 취해서 대낮에 사장실 옆 복도에서 송진우 사장의 뺨을 때렸다고 한다. 고하가 ‘허’ 웃으면서 ‘이 사람 취했구먼, 혀가 만 발이나 빠질 친구야. 백주 대낮에 술을 먹고 사장 뺨을 치다니 이게 무슨 짓이야’ 그러고서는 인력거를 태워 집으로 보냈다고 한다. 다음 날 현진건은 기고만장해서 회사로 출근했는데 송 사장은 그러한 기백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어 현진건에게 했던 이런 말도 남아 있었다. “자네 그 기백 한번 쓸만하네. <동아일보> 사회부가 왜 그렇게 당당한가 했더니만 자네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랬구먼? 날더러 술 한잔 안 산다고 화를 냈지? 오늘 퇴근할 때 좀 만 나자고. 술이라면 나도 사양하지 않는 사람이지. 한잔 받아줄게 함께 하자고.” 당당했던 사회부, 이런 포부와 배포가 살아 있는 신문사.

 

1945년 8월 15일 해방 직후부터 송진우 선생이 테러로 목숨을 잃은 12월 30일까지의 경성은 어떤 곳이었을까? 몇 마디 문장으로는 다 설명 할 수 없는 정치 철학과 온갖 사상들이 충돌과 회합을 거듭하던 혼돈의 공간이었을까? 지금 어떤 학생의 서재에 꽂혀 있을 위인전에 적힌 이름과 빠진 이름을 가르는 기준은 뭘까? 과연 인물은 역사가 판단하는 걸까? 선생은 미군 주둔을 두고 신탁과 반탁으로 나뉜 구도에서 신탁 찬성론자 로 몰렸다. 반탁론자였던 김구의 추종자에게 살해당했다고 알려져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렇게 쓰고 있다. “미 군정청과는 충돌을 피하고 국민 운동으로 반탁을 관철하여야 한다는 신중론을 피력하고 자택으로 돌아온 뒤 다음 날 30일 상오 6시 한현우 등 6명의 습격을 받고 서 울특별시 종로구 원서동 74번지 자택에서 죽었다.”

 

10년 후, 1955년 8월 14일 <경향신문> 기획 ‘해방 10년의 인물들’에는 이런 부분이 있다. “고하가 생존해 있다면 오늘의 우리 정치판도는 현재와는 좀 달라졌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이어서 고하는 과연 뛰어난 정치가였다고 지금도 탄복하는 것이다. (중략) 굵직한 스케일로 왜졸들을 위압하면서 철두철미 남자답게 항쟁을 해온 고하의 국내 투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거니와 인간 송진우의 호방한 성격도 상금 그의 동지들이 잊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어 “일본의 식민지 관리들이 주책없이 까불면 고하는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긍지를 잊지 않고 왜리들을 대갈하기가 일쑤”였다는 말, “왜정 때도 옥색 한복에 흰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인력거에 앉아 시내를 달리는 그의 이채를 엿볼 수 있었고, 대인관계가 극히 명백하여 싫으면 싫다 잘못이면 잘못이다 기탄없이 쏘아 붙이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불과 69년 전이었다.

 

고하 송진우 선생 한 사람을 좇던 모든 시간은 사실 ‘기자記者’를 향하고 있었다. 더 많이 배운 사람들이 돈 같은 걸 개의치 않고 그저 쓰고 고민하고 또 쓰던 시대였다. 해방 이전의 <동아일보>는 거의 정부와 같은 구실을 했다는 기록도 있었다. 그러다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래도, 그때의 기자는 ‘옳은 것’에 대한 판단이 우선이었다.

지난 일이니까, 어떤 부분은 낭만으로 포장됐을 거라는 걸 안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는 것도. 그럼 지금이 뭐가 어때서? 지금은 기자가 낭만적으로 정의를 추구하면 큰일 나는 시대인가? 이미 그런 기자들이 몇 있다. 그들이 지속적으로 고초를 겪는 중이라는 것도 다 안다.

 

“종이 신문의 시대는 갔다, 지금은 아무도 종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 신문은 사양산업이다.”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좋은 기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사는 남는다. 선생 생전에 네 번의 정간과 강제 폐간을 겪은 그 신문도 (어떤 식으로든) 살아 있다. <동아일보>가 운영하는 종편 채널의 보도 중, 가장 화제가 된 꼭지의 최근 자막은 이랬다. “김정은이 배우 유연석과 동갑.” 이것도 남을 것이다.

 

눈매가 날카로운 이 남자가 1921년부터 1945년까지 <동아일보>에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언론사 사장이자 고문, 정치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