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 남자

취한 남자는 약해진다. 섹스를 해야겠다는 결심만은 단단한 채로.

 

술을 마시면 마음이 열린다고 한다. 그걸 용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취해서 말이 툭 튀어나왔든 어떤 말을 하기 위해 술을 마셨든, 알코올 도수만큼 진한 얘기를 나눌 수도 있다. 그런 한편 술자리는 관용의 시간. 좀 못난 행동도 용서하고, 진심 같든 거짓 같든 그때 들은 얘기는 거기 그대로 묻어두기도 하니까.

취하면 마음 열리듯 몸도 열린다. 일단 눈부터. 활짝. ‘비어 고글Beer Goggle’이란 관용구는 영문 위키피디아에도 따로 정리되어 올라가 있을 정도로 보편적인 말이다. 고글은 눈에 쓰는 그 고글이 맞다. 해당 페이지의 설명을 옮기자면 “섹스 상대에 접근하거나 고르는 데 신중함이 줄어들거나 거의 없어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남녀 공히 마찬가지다. ‘비어 고글’과 함께 “폐점시간엔 못생긴 여자가 없다There are no ugly women at closing time”는 짓궂은 농담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즉, 관대해지는 것이다. 어쩌면 관대해지기 위해 마시는 것일 수도 있다. 지금 앞에 있는 상대와 섹스를 하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누가 됐든 오늘 밤 섹스를 하기 위해. 섹스와 귀가의 기로에서 들이킨 딱 한 잔이 그날 밤의 행선지를 바꿔놓을 수도 있다. 물이 서서히 달아올라 끓는점에 도달하듯, 섹스가 가능할 만큼 상대가 매력적으로 보이는 순간이 찾아오는 것이다. 찰랑찰랑하는 술잔이 마지막 한 방울에 왈칵 넘치는 것처럼.

누가 누구를 ‘꼬셨’느니 말발이 어쩌니 해도, 결국 선택은 양쪽 모두가 한다. 둘 다 결심이 선 순간, 누가 섹스를 먼저 제안하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보통 남자가 한다. 결국 다시 관용에 대한 얘기는 용기로 돌아오는 걸까? 용감한 말을 꺼내는 식이든, 손을 덥석 잡고 끌든 어찌됐건 용기를 내야 침대로 가는 관문이 열릴 테니까. “우리 나갈까요?” 라고 말하기 직전, 남자의 머리는 복잡해진다. 너무 빠른가? 술이 좀 남았는데? 이불은 개놓고 나왔나? 택시가 안 잡혀서 떠는 동안 술 깨면 어떡하지? 모범이라도 오면 탈까? 그보다, 이 여자는 지금 나랑 잘 맘이 생겼을까? 방금 화장실에서 멀쩡한지 확인한 자기 얼굴은 꽤 근사해 보였을지도 모른다. 술 마셨다고 여자 얼굴만 예뻐 보이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돌진한다. 어쩌면 섹스라는 모험을 거는 대신 술이라도 계속 마시면 아마 다음을 기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를 내는 동시에 다음이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다음 만남이 서먹해지고 관계가 애매해지는 문제가 아니라, 퍼포먼스에 대한 얘기. ‘잘 못하는 남자’로 콱 찍힐 수도 있으니까.

따져보면 술은 섹스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특히 남자의 입장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술은 성욕을 유발하지만 ‘퍼포먼스’를 앗아갑니다. 즉, 술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는 사람 같습니다. (중략) 술은 남자를 설득하지만, 곧 낙심하게 만듭니다. 일어서게 만들었다 다시 주저앉게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의사는 아니었지만, 몸소 체험한 바를 가장 정확히 표현했을 것이다. ‘비어 고글’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통하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남자들도 그걸 알고 있다. 테스토스테론이 줄어들고 중추신경에 어떤 효과를 미치느냐를 따지기 전에, 알코올은 몸에 즉각적으로 신호를 주니까. 가끔 보통 때보다 삽입 시간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발기부전의 위험이 있고, 감각이 둔해진 나머지 사정을 못할 수도 있다. 사실 술 마시고 하는 섹스가 그렇게 좋지도 않다. 성감이 떨어져 콘돔을 페니스에서 뽑아 던져버리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적당한 음주는 섹스에 도움이 된다”는 유의 말은 마르고 닳도록 들었다. 그리고 그 말로 자신을 설득한다. 그런데 의사들이 말하는 “적당한 양의 술”은 와인 한두 잔 정도다. 물론 그 정도로 그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한 잔만 마시면 상대가 관대해지지 않을 것 같아서, 내게 용기가 생기지 않을 것 같아서 더 마신다. 몸의 긴장이 아니라 기어이 고삐를 풀고 만다. 주자만 있으면 타점 욕심에 볼에도 방망이가 나가는 타자처럼, 술만 마시면 그렇게 섹스를 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섹스는 좀 별로인 남자라는 얘긴 그렇게 소스라치도록 싫어하면서, 가장 별로가 될 수 있는 상황에 자신을 힘차게 내던진다.

다시 밝은 아침은 후회의 시간. 원래 못하는 남자는 아닌데. 괜찮아, 걔도 못했어. 마지막 그 한 잔만 덜 마실걸. 몸의 감각이 활짝 깨어나고, 지금은 훨씬 잘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여자는 이미 옆에 없다. 여자가 베개에 남긴 체취는 술 냄새보다 오래간다. 후회는 오래가지 않는다. 환기를 시켜야겠다는 생각보단 여자의 체취가 남은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다시 생각한다. 아, 또 술 마시고 싶다. 셰익스피어도 분명 그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