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GQ 어워즈 – 4

올해의 강제 이주 MBC, 올해의 신랑 김태용, 올해의 신부 박인비, 올해의 희생양 담배, 올해의 성장 임시완, 올해의 연장 셀카봉…

올해의 강제 이주 MBC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기대와 실망, 심지어 배신감. MBC 뉴스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제한적 혹은 편파적이었다. 세상이 궁금한 사람들은 MBC 뉴스를 보는 시간에 검색을 하는 편이 더 효율적이었다. 이젠 심지어 교양제작국이 없는 공영방송국이 됐다. 원래는 시사교양국이었던 체제를 시사제작국과 교양제작국으로 분리한 것이 2012년이다. 교양제작국에 있던 피디들은 신사업개발센터, 뉴미디어포맷개발센터, 편성국 등으로 발령 났다. 프로그램을 만들 일이 없는 부서다. 여기엔 <피디수첩>과 <아프리카의 눈물>을 제작했던, 영화 <제보자>의 모델이기도 했던 한학수 피디를 비롯해 걸출한 피디들이 다수 포함돼 있다. 백종문 본부장은 이런 말을 했다.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의 접목을 통해 시청자 트렌드 변화에 맞춰 MBC의 교양성을 강화시키도록 했다.” MBC는 지속적으로 변해왔고, 이젠 공영과 민영 사이에서 정체성조차 희미해졌다. ‘그런’ 이유로, 기라성 같은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그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작별인사마저 사치 같지만…. 그래도, ‘이젠 안녕, MBC’.

 

올해의 목소리 버나드박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대부분의 교포 참가자들은 ‘필Feel’로 자신을 어필했다. 선곡은 대부분 팝, 그중에서도 알앤비나 솔이었다. ‘필’은 장르의 보편적 특징을 얼마나 잘 살리느냐와 맞닿아 있다. 익숙한 언어, 몸에 익은 기교, 자연스러운 강약 조절…. 버나드박이 <k팝스타>에서 부른 보이즈 투맨의 ‘End of the Road’ 역시 그야말로 곡예사들의  노래였다. 음을 꺾고, 목소리를 뒤집고, 고음을 있는 대로 뽑아내면 박수갈채를 받는 노래. 그런데 버나드박의 승부수는 좀 달라 보였다. 코드를 단순화시킨 기타 반주 위로 목소리를 쏟아냈다. 원곡의 보컬이 쭉쭉 치고 올라 상승하는 카타르시스를 준다면, 버나드박은 추진력이 남다른 기차처럼 앞으로 길을 냈다. 넓은 길이었다. 저음부터 고음까지 꽉 차 있는. 과연 소리통이라는 게 있다면 그 크기와 밀도를 가늠해보고 싶은 기분. “어떤 사람이 노래할 때 받을 수 있는 감동 중에 최고의 감동을 저는 받은 것 같아요.” 심사위원 박진영이 말했다. 그건 그가 흔히 말하는 발성의 기술에 대한 얘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누구의 ‘필’도 아닌, 버나드박의 목소리였다.

 

올해의 의지 티아라
공교롭게도 2012년 이 지면의 ‘올해의 의지’ 수상작은 티아라 ‘Sexy Love’였다. 올해도 의지로 밀어붙이기 한판에서 대적할 상대는 없었다. “왜?”라는 질문이 이토록 불필요해 보일 수 있을까? 그럴수록 티아라는 더욱 힘찼다. 입이 떡 벌어지는 은정의 ‘활어춤’이 포문을 열더니, 마침내 전 멤버가 일렬로 서서 설탕가루를 비비는 동작에 “모든 게 다 슈가프리” 할 때는 그만 땅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저앉아 물개처럼 박수를 쳤다.

 

올해의 신랑 김태용
신부가 탕웨이라는 것. 김태용은 이 사실 하나만으로 올해의 신랑 자리를 올랐다. 하지만 아무리 차원이 다른 결혼이었다 한들, 앞으로 탕웨이가 한국식 가십 차원마저 피할 수 있을까? “탕웨이, 신접살림은 제주도?”, “탕웨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강의 내조”, “분당 새댁, 탕웨이”…. 쏟아지는 기사와 대중의 쓸데없는 관심으로부터 그녀를 지키는 건 올해의 신랑 김태용의 중요한 임무다. 그 정도는 해주길 바라는 게 모든 남자의 마음일지도….

 

올해의 신부 박인비
박인비는 작년 ‘GQ 어워즈’에서 ‘올해의 여왕’으로 뽑혔다. 작년 LPGA에 메이저 대회가 다섯 개였는데 그중 박인비는 세 개 대회에서 우승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올해도 세계 랭킹 1위다. 다시 ‘여왕’ 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지만, 올해는 신부다. 함께 대회를 다니며 6년 동안 연애한 코치와 결혼했다. “운동선수가 공개 연애하는 게 부담이 된 적은 있지만 후회한 적은 없어요. 20대 때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요. 만약 연애를 해서 결과가 안 좋아도 함께 운동하며 하루를 즐기면 된다고 생각했어요.” 박인비는 먼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오늘 행복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남자친구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스승인 오빠가 내 스윙을 완벽하다고 말했으면 좋겠어요.” 많은 사람이 이상적인 결혼을 꿈꾼다. 그러다가 그런 건 없다며 포기하기도 한다. 올해 박인비의 결혼식 사진을 봤다. 하필 그녀가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그녀가 자신이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하다는 걸 스스로 의심하지 않는 표정이었으니까.

 

올해의 장난감 타요 버스
뽀로로의 굳건한 아성이 느닷없이 등장한 버스로 무너졌다. 타요, 로기, 라니, 가니,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꼬마 버스 타요>의 버스 네 대는 서울시 대중교통 이용의 날 이벤트로 처음 도로를 달렸고, 폭발적인 인기와 함께 곧장 스타가 됐다. 타요 버스는 원래 한 달간, 네 대로 운행될 예정이었지만 현재까지 총 100대가 여러 도시를 누비는 중이다. 타요 버스를 타기 위해 늘어진 아이들의 행렬, 행여나 타요버스가 집 앞으로 지나가진 않을까 하루 종일 창밖만 확인한다는 어떤 아이의 이야기, 타요를 만나러 새벽 세 시에 버스 차고지까지 다녀왔다는 한 부모의 사연, 타요 버스 때문에 난폭운전이 줄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유난히 딱딱했던 올해의 풍경은 파랗고 노란 버스의 웃는 얼굴로 잠시나마 누그러질 수 있었다.

 

올해의 희생양 담배
담뱃값 인상안이 국회 심의 중이다. 인상액은 2천원이며 그 대부분이 세금이다. 유통마진이 2백52원, 각종 세금과 부담금이 1천7백68원이다. 4천5백원짜리 담배 기준으로 세금과 부담금이 무려 3천3백18원이다. 얼마 전 석유공사가 12조원을 투자해 6천7백30억원을 회수했다는 그 ‘세금’이 맞다. 한국납세자연맹은 “담뱃값이 2천원 인상될 경우 하루 한 갑씩 담배를 피운다고 가정했을 때 연간 1백21만원, 기준 시가 9억원짜리 아파트 소유자가 내는 재산세와 비슷하다”고 밝혀서 흡연자의 막연한 분노에 실감을 더했다. 인상안이 발표되자 흡연자들이 내놓은 첫 번째 반응은 한결 같았다. “담배 끊어야지.” 결국 못 끊을 걸 알지만, ‘애꿎은 담배’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괜히 있지 않은 것 같다. 담배가 제일 불쌍하다.

 

올해의 두 마리 토끼 모델 겸 배우
올해 두 마리 토끼를 좇은 이들. 안시현, 홍종현, 송재림, 이성경, 도상우, 장기용, 남주혁, 윤진욱 등. 그보다 더 전엔 성준, 김우빈, 김영광, 이수혁 등이 있었다. 올해 모델 출신 배우, 혹은 모델 겸 배우는 브라운관 여기저기에서 성큼성큼, 우쭐우쭐이었다. 이제 그들 중 누가 잡은 두 마리 토끼를 한 마리 호랑이로 치환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프런트로에 앉은 기분으로 느긋하지만 냉철하게 지켜보면 된다.

 

올해의 홈쇼핑 모델 미란다 커
“자, 잠시 후 미란다 커가 여러분과 이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만날 예정이구요. 지금 준비가 돼 있기 때문에 이제 미란다 커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여러분들을 안내하겠습니다.” 미란다 커가 홈쇼핑 스튜디오에 섰다. 무대 가운데는 작은 공간이, 왼쪽에는 마네킨이 입고 있는 네 가지 색 브라와 팬티 세트가, 오른쪽에는 ‘미란다 커’의 팬이라고 소개된 사람들이 3열 횡대로 합창단처럼 서 있었다. 쇼핑 호스트가 말했다. “주목하셔야 될 것은 지금 현재 미란다 커가 입고 계시는 저 브라가 오늘 여러분들이 선택하고 계시는 와이어 프리에 네이비 컬러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이 지금 네, 미란더 커의 가슴에 주목해주시면요, 바로 저 컬러를 오늘 세트 안에서도 함께 만나실 수 있는 순간이에요.” 다른 호스트가 받았다. “미란다 커 그녀의 가슴 사이즈가 75B컵이거든요. 가슴 라인을 와이어 프리로 해서 그런지 오늘 더 유독 아름답고 빛나거든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저 좀 수다스럽다 느껴지는 사이, 그녀가 입고 있었던 브라와 팬티는 약 6천4백 세트 팔렸다. 약 10분간 매출이 10억이었다. 두 번째 방송에서는 1만 2천 세트가 팔렸다고 한다. 브라와 팬티가 미처 필요하지 않은 모든 사람이 그녀의 브라 사이즈가 75B였다는 사실을 기꺼이 기억할까? 다만 이날 브라와 팬티를 산 모든 사람들이 그녀처럼 건강하게 살 수만 있다면.

 

올해의 순간  김연아
1월 4일, 벽두에 일산에서 김연아를 보았다. 국내에서 김연아의 경기를(쇼가 아닌) 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차례가 되자 선수들이 몸을 풀며 링크에 나왔다. 연둣빛 옷을 입고 김연아도 나왔다. 순간 방심했다. 왠지 너무 빤히 쳐다볼 수도 없을 것 같아서 시선을 머뭇거리던 차였다. 관중석에서 일제히 “아”하는 탄성이 터졌다. 그녀가 점프한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건 ‘짠’하고 보여주는 쇼가 아니었다. 오직 연습과 결과가 있을 뿐인 냉정한 스포츠, 그건 진짜였다. 그날 경기에서 김연아는 80.60점으로 비공식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그 후로 이어진 일은 모두 아는 바와 같다. 더 이상 김연아의 새로운 경기를 볼 수 없게 된 건 이미 각오한 일이었지만, 그녀의 마지막 프로그램인 ‘어릿광대를 보내주오’와 ‘아디오스 노니노’를 돌려보지 못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토록 아름다운 프로그램을, 그토록 완벽한 경기를 좀처럼 보지 못한다. 자꾸 생각이 나서, 분노가 일어서,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아서…. 김연아는 그렇게 미처 생각지 못했던 방식으로 봉인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한다. 그녀가 우리에게 준 순간들을 모두, 하나하나, 영원히.

 

올해의 정복자 김자인
김자인이 초크로 범벅이 된 작은 손으로 15미터의 암벽을 올랐다. 2014 스포츠 클라이밍 세계선수권리드 종목. “승리했습니다!” 그녀가 다른 선수들이 도달하지 못한 마흔여덟 번째 홀드를 잡았을 때, 해설자들은 이미 흥분해 있었다. 거기까지만 올라도 우승이었다. “대단합니다. 아직도 힘이 남은 듯 보입니다. 오늘 최초의 완등자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김자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승리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오르던 길을 그대로 올랐다. 그리고 정상. 김자인은 두 손으로 마지막 홀드를 꼭 잡았다. 그리고 “탕탕탕” 세 번 세차게 두드렸다. 그제야 잘게 쪼개진 그녀의 등과 어깨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게 보였다. 여섯 번째 도전 끝에 거둔 첫 세계선수권 우승이었다. 하얀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줄에 매달려 천천히 땅으로 내려온 김자인의 키는 153센티미터. 하지만 암벽 위에선 누구보다 높은 곳에 우뚝 선, 당당한 정복자였다.

 

올해의 성장 임시완
임시완은 유난히 붉은 입술만큼 두 눈도 자주 붉어진다. 눈두덩이가 빨갛게 변한 채로 임시완이 상대방을 쳐다보면 시청자의 마음도 함께 저릿하다. 작가 윤태호는 드라마 <미생> 제작발표회에서 임시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열네 살짜리 아들이 지나치게 진지한 태도를 취하거나 나이에 맞지 않게 속 깊은 이야기를 할 때 가끔 마음이 애잔하다. 임시완의 눈빛과 연기를 볼 때도 비슷한 연민이 든다. 흔히들 임시완을 두고 ‘진지한 청년’이라고 하지만, 그보단 조금 다른 느낌이다. 보지 않아도 되는 지점을 보는 청춘 같은 느낌, 사람의 뒷모습까지 보는 느낌. 그런 면에서 장그래와 굉장히 잘 어울리는 사람이지 않나….” 그래서 임시완의 붉은 눈은 <미생> 안에서 더진하고 짠하다. 임시완의 철든 얼굴은 무게를 견디는 일이 익숙해 보이고, 그의 작은 몸집은 깨부수기 보다는 번지는 쪽이 자연스럽다. 자신의 기운과 캐릭터의 기운이 통한다는 게 이런 걸까? 임시완은 올해 <변호인>에서 대학생을, <미생>에서 신입사원을 연기했다. 천천히, 꾸준히, 제대로 해내는 임시완에게 손뼉을 치기보단 그저 손을 한번 맞잡고 싶은 쪽이다. 성공이 아니라 성장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올해의 연장 셀카봉
라디오에 달린 모노폴 안테나를 닮았다. 하지만 셀카봉은 외부의 전파가 아닌 내부의 신호를 받는다. 신호로는 ‘광각 셀프 샷’, ‘커플 샷’, ‘단체 샷’, ‘아기와 투 샷’ 등이 있다. 특히 ‘아기와 투 샷’의 경우 ‘엄마렌즈(광각과 접사 조절이 가능한 스마트폰 렌즈 어댑터)까지 곁들여 적극적으로 활용된다. 셀카봉 역시 “어떤 일을 하는 데 사용되는 도구”라는 점에서 연장이지만 손의 기능을 연장延長해주는가에 관해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자신을 향해서만 늘어나는 연장延長이 연장延長인가 싶어서.

 

올해의 파장 아이스버킷 챌린지
2뉴저지 주지사가 마크 저커버그를 지목하고, 그가 빌 게이츠를 지목했을 때는 ‘좀 재밌는 일이 벌어지려나보다’ 했다. 이후 아이스버킷 챌린지는 삽시간에, 그리고 시끄럽게 전지구적으로 퍼졌다. 2014년 9월 15일 기준 ALS(근위축성측생경화증) 협회에 모인 기부금은 한화로 약 1천1백74억 1천2백79만원에 달했다고 <월 스트리트 저널>은 전했다. 지난 회계연도에 ALS 협회가 올린 수익은 약 6백63억 2천3백20만원이었다. 한 해가 채 지나기도 전에 전년도의 두 배에 달하는 돈이 모였다. 아이스 버킷 챌린지는 과연 의미있는 이벤트였다. 침묵과 겸양이 더 이상 미덕만은 아닌 시대. 뭐든 보여주고 돌려 봐야만 영향력이라 여기는 시대의 증거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참 많이 아픈 그 사람들에게는 좀 위안이 됐을까? 기부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될 것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는 러블rubble 버킷 챌린지가 있었다. 인도에서는 빈곤층을 위해 쌀로 가득 채운 ‘라이스rice 버킷’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진화했다. 웨이크 업 콜 캠페인은 눈뜨자마자 ‘셀카’를 찍어 올리고 다른 누군가를 지목하는 방식으로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것이다. 이로써,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조금 덜 가진 사람을 위해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다면.

 

올해의 …  눈물
5월 어느 날 밤엔 사방이 차벽으로 막혀 있는 청운동이 낯설었다.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의 상황을 차마 가늠할 방도는 없었다. 무력했고 또 부끄러웠다. 이튿날 예정돼 있던 인터뷰를 위해 홍대 앞에 갔을 땐 젊은 사람들이 웃으면서 걷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고, 그 골목에 있던 모든 사람이 햇빛을 받고 있었다. 그 웃음이야말로 해사했는데,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그날 만난 사회학자 엄기호에게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이냐고, 질문은 기자인 내가 할 테니 설명은 선생님이 해달라” 했더니 그는 “이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 인간의 상상력을 벗어난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것”이라 말했다. 둘이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다가 가끔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쩌면 4월 16일부터였다. 감정의 고삐가 풀린 것 같았다. 둑이 터진 것 같기도 했다. 교복을 입고 ‘헤헷’ 웃으면서 달려가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광화문을 지날 때마다, 40일 넘게 곡기를 끊은 한 아버지의 팔과 다리를 볼 때마다, 그들 모두가 매번 좌절당할 때마다…. 지금 여기 살아서 남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수 있는 일이 애도뿐이라면 그 대상이 너무 많았다. 눈 쌓인 리조트 지붕이 무너지고, 지하철이 추돌하고 역주행했다. 비행기는 불시착했고 버스 터미널엔 불이 났다. 가로수길에 있던 건물은 갑자기 붕괴했고, 멀쩡했던 도로가 푹 꺼졌다. 군대에서 벌어진 온갖 일들은 그대로 야만이었다. 그걸 자꾸만 감추려고만 했다. 누굴 위해서? 이 나라를 지키려고? 이스라엘은 자꾸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있는 곳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모두 올해 벌어진 일이다. 미처 여기 쓰지 못한 일이 더 많다는 건 우리 모두가 안다. 사람이 너무 많이 죽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걸 마땅히 해결해야 하는 사람들은 아무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 같았다. 누가 누굴 버렸는지 헷갈리는 채, 불안이 해소될 기미도 없는 채, 여럿이 같이 있어도 외롭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무력할 때마다, 어딘가 같이 우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환멸, 분노, 무력, 불안, 외로움마저 부끄럽게 만든 한 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흘린 눈물만은 부끄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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