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물건

이 계절에 맞는 영화 한 편, 그리고 어떤 장면과 함께 얘기하고 싶은 물건.

[WRANGLER]

영화 <아모레스 페로스>는 얼핏 잔인하고 참혹하지만, 깊은 곳은 아름답고 빛나고 색깔로 충만한 영화다. 멕시코 뒷골목, 어둡고 끈적이는 날씨 속에서 옥타비오는 그을리고 번질거리는 땀 범벅의 얼굴로 펄떡거리고 헐떡이며 뛴다. 인생 한 방을 목전에 두고 물러설 수 없는 팽팽한 긴장과 한편으로는 터질 것 같은 불안이 타르처럼 굳은 눈빛. 그는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마음의 절망과 계단을 오르면 빛이 있을 거란 희망 사이에서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당신 인생의 영화는 뭔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모레스 페로스>라고만 답했다. 젊은 남자들의 시시한 잡담, 미친 것 같은 뜨거운 순수, 목숨을 거는 무모함. ‘악의 꽃’ 같은 그들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젊음만 우대하는 차별주의자라는 지탄도 받았지만. 옥타비오가 푸른 새벽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엉엉 울던 장면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있다. 랭글러의 청 재킷은 그 장면의 옥타비오에게 어울릴 것 같아 골랐다. 그가 울음을 그치고 도로변 술집에 들어가서 한잔 주문하도록 권하고 싶었다. 청 재킷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폐를 꺼내 카운터에 던지듯 놓는 것도 상상해봤다. 술은 아무래도 맥주가 좋겠지. 강지영

 

 

 

[MASTER & DYNAMIC]

영화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에서 톰은 힘없는 사람들을 착취하는 부동산업자다. 비정하고, 잔인하고, 참을성이 없지만, 친구의 부인을 좋아하며, 아버지를 증오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남자. 우연히 다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고, 불어를 못하는 중국인 피아노 선생님을 만나 오디션을 준비하면서, 톰은 조금씩 숨을 쉰다. 펍에선 술잔을 밀어낸 테이블을 건반 삼아 두드리고, 집에선 작정한 듯 알몸으로 연주한다. 바하의 ‘토카타 E단조’를 안간힘을 다해 연습하지만, 정작 오디션에선 손가락을 까딱도 못한다. 톰은 깨진 유리창처럼 화가 나서 길거리에 나오자마자 소니 헤드폰을 쓰고, 바하에게 대들기라도 하듯 전자 음악을 크게 듣는다. 그 장면이 잊히질 않아, 큰 헤드폰을 샀다. 이 영화를 다시 보니, 헤드폰이 절실해졌다. 겉멋 잔뜩 든 얄미운 형태의 요즘 헤드폰들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마스터 & 다이나믹. 라디오헤드의 < Reckoner >를 듣기에 가장 좋을 것 같아서. 박나나

 

 

 

[VALENTINO]

캣츠킬에서의 집단생활과 탈출에 관한 이야기, 전반적으로 스산하면서 조용한 분위기의 영화 <마사 마시 메이 메를린>은 우울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칠흙 같은 코네티컷 호수에서 발가벗고 수영을 하거나, 이른 아침 캣츠킬의 숲 속에서 도망치는 장면조차 긴박하지만 왠지 모를 따뜻한 기운이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엘리자베스 올슨을 배우로 기억하게 됐다. 이 영화에서만큼은 파파라치 컷에나 등장하는 쌍둥이 올슨 자매의 여동생이 아니었다. 흔하디흔한 카무플라주 무늬도 발렌티노 쇼에선 새롭고 우아했던 것처럼. 마시가 마치 물속에 빠져들 듯 숲 속으로 깊게 숨어들 때, 이 배낭을 멨다면 그리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존 호킨스가 다정하게 부른 ‘마시 송’에 매혹되지 않았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끝은 아무도 모른다. 이 영화의 결말이 그런 것처럼. 김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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