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소설의 중력 아래에서

‘책을 읽는다’는 말은 비현실적으로 들린다. ‘책을 산다’는 말만 근근히 이어지고 있다. 한국소설은 여전히 ‘순문학성’을 지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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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소설의 열렬한 독자는 아니다. 서가에서 한국소설을 골랐다가도 금세 다른 책의 유혹에 넘어간다. 한국소설의 성실한 독자도 아니다. 주목받는 한국소설을 때 맞춰 따라가지 못한다. 무심함으로 멀어지고 게으름으로 느려진다. 한국소설 애독자로서는 자격 미달이겠지만, ‘그냥’ 독자로서는 나쁘지 않은 변화다. 이유는 단순하고 분명하다. 한국소설의 ‘순문학성’이 지겹다. 순문학성이란, 문단 중력의 영향을 받아 한국소설에 얼룩처럼 스며든 감수성을 말한다. 

몇 년 전 미국에 소개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를 두고, 어느 현지 비평가는 ‘김치향 크리넥스 소설’이라고 평했다.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이견도 있었지만, 외부에 한국 문단의 감수성이 어떻게 비치는지 참고할 수 있었다. 드라마에 빗대어 얘기하면, 갈수록 갈래는 다양해짐에도 미드나 일드 같은 외국 드라마와 비교했을 때 구별되는 ‘한드’의 특징이 있다. 뭐라 설명하기는 막연하지만 공감하기 어렵지 않은 가족 유사적인 감수성.

흔히 순문학이라 불리는 주류 한국소설은 인정하든 하지 않든 문단 중력의 영향 아래 있다. 문단은 순문학 바깥의 소설을 가볍게 장르 소설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순문학이야말로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은 애써 못 본 체한다. 최근 순문학의 한쪽에 장르소설의 자리를 마련하는 등 타성에 굳은 경계를 희미하게 하려는 시도도 있었지만, 구색 맞추기거나 순문학의 향기가 배어나게 굴절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순문학성이 지겹다는 지적은 주류 한국소설의 수준과는 별개의 문제다. 최근 수년간 문단의 관심이 집중된 장편에서도, 그간 저력을 보여왔던 단편에서도 한국소설의 보람으로 꼽을 작품은 여럿이다.

얼마 전 소설가 손홍규는 ‘불혹의 작가들’이라는 칼럼에서 한국 단편소설의 특징을 이렇게 말했다. “한국 단편소설은 외국 단편소설에 비해 대체로 분량이 길고 단단하다. 세월이 흐르면서 단순히 길이만 늘어난 것이 아니라 작품의 밀도가 그 어느 때보다 정제되고 꽉 짜인 형태를 보여준다. 한국 단편소설을 외국 단편소설과 비교할 때 눈에 띄는 특징이다. 단편 고유의 색깔에 장편소설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 세계의 총체성을 환기시키는 영역까지 이르렀다.”

조금은 과해 보이지만, 한국 단편소설이 외국 단편소설에 견줘 독보적인 뭔가가 있다는 점이나 작품이 고루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는 지적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한국소설의 독보적인 뭔가가 순문학성에 발목 잡혀, 고루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닐까 하는 염려다. 한국소설의 위기와도 관련되는 이 염려는 우선 독자들이 처한 상황 변화에서 나온다. 책을 읽기 위해 숲 속 그늘을 찾아 시간을 할애하는 ‘그늘에서의 삶’은 거의 불가능하다. 저녁이 없는 삶은 밤도 새벽도 없는 삶으로 더 황폐해질지 모른다. ‘그늘에서의 삶’은 삶의 여유에 달려 있지 않다. 어렵사리 여유가 생겨도 사람들은 ‘독자’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독서는 외로운 활동이다. 아니, 외로워지려는 활동이라고 말하는 게 더 맞겠다.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뭔가 대화를 할 수 있겠지만, 책을 읽는 도중에는 홀로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 음악, 미술, 영화는 누군가와 함께 듣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읽는 행위는 정적과 고요의 공간을 요구 한다. 한시도 온라인 상태를 벗어나기 싫어하는 지금의 대중에게 이런 자발적 차단과 고립을 기대하는 것은 순진한 낙관이다. 독서가 SNS로 주고받는 반응보다 재밌을까? 스마트폰 게임보다 중독성 있을까? 이런 비교는 조금도 부당하지 않다. 소진된 채로 여가에 뭘 할까 고민하는 보통 사람들에게, 독서는 드라마, 웹툰, 영화 등 여러 비교 대상 사이에서 저울질 당하다가 끝내 선택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반갑게도 독서를 선택한 사람이 한국소설을 집어들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순문학성은 그들에게도 매력적일까. 순문학성은 순문학 장르의 충실한 독자에겐 큰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순문학 장르 바깥의 소설 독자나, 언제든 소설의 숲으로 들어설 예비 독자나, 아예 비서사를 주로 읽는 독자에게는 다르다. 그들에게는 비서사나 다른 서사 장르와 견주어 한국소설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즐거움은 취향에 맞는 다른 장르 소설에서 얻으면 된다. 삶과 세계에 대한 이해는 다른 산문에서 얻으면 된다. 소설만이 줄 수 있는 지혜는, 유감스럽게도 순문학 감수성을 피해 외국소설에서 얻으면 된다. 독자로서 판단하자면, 한국소설은 문학이라는 가치에서는 외국소설에, 한국이라는 현장에서는 비서사 산문에 몇 발 뒤쳐져 있다. 몇 발 앞서고 있는, 어쩌면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점은 순문학성이겠지만.

한국 독자가 뛰어난 소설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며 항의할 수도 있다. 독서가 가능한 삶의 여건도 변했지만, 실제로 독서를 하는 사람도 변했으니까. 소설과 함께 산문의 시대가 펼쳐지길 기대했는데, 우리가 도달한 곳은 산만한 시대니까. 사람들은 자신을 산만하게 하는 수많은 요소에 둘러싸인 채 산문에 부당한 요구를 퍼붓는다. 모든 소설은, 문학에 익숙하지 않은 그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한다. 대중주의의 전통에서는 전혀 어색하지 않은 요구이긴 하다.

하지만 대중주의의 현재가 간단한 농담과 반어조차도 직설로 진지하게 오해되고, 심지어 농담과 반어를 낯 뜨겁게 설명한 후 나오는 반응이 ‘농담과 반어라도 어렵게 쓴 네가 잘못’이란 상황이 반복된다면, 산문은 낭비이고 소설은 그야말로 사치다. 소설가 필립 로스는 몇 년 전 절필을 선언하면서 ‘소설이 죽어간다는 말은 믿지 않는다. 죽어가는 것은 독자의 독서력이고, 엷어지는 독자층’이란 취지의 말을 남겼다. 문맹은 아닌데 책을 안 읽는 책맹도 문제고, 책맹은 아닌데 글을 이해 못하는 문맹도 문제인 지금 필립 로스의 충고는 뼈아프다.

한국소설이 순문학성을 떨쳐내지 못하는 사정에는 독서와 독자를 둘러싼 이런 변화도 크게 작용한다. 문예진흥기금 등 외부의 지원으로 문단이라는 무너지는 울타리를 버티는 상황에서는, 안전한 순문학성이라는 중력 쪽으로 굴절되기 마련이다. 이때 문단의 중력에서 뛰어 나다는 것은 그저 ‘우리 동네’ 자랑일 뿐이다. 다른 동네 독자들이 재미가 덜하다, 어렵다, 지루하다는 불평을 건넬 때 그들이 순문학성이라는 우리 동네의 가치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라고 대응한다면 오해만 가중된다. 자주 건너와서 머물다 보면 가치를 알 수 있으리라 기대하겠지만, 그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다른 동네에서는 그 동네가 블랙홀로 보여 아예 얼씬거리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요즘 우리 소설가들이 단편을 너무 잘 쓴다. 그게 우리 문학의 한계니 뭐니 하면, 기가 찬다. 그게 힘인데. 단편은 최곤데. 나는 공평히 세계문학 단편을 읽히고 우리 문학 단편을 읽히는데, 읽히는 내가 정말 우리 소설에 매혹된다.” 소설가 권여선이 얼마 전 남긴 트윗이다. 동의한다. 하지만 한국소설의 순문학이라는 동네는 어느 폐쇄적 아파트 단지의 인상을 풍긴다. 외부인은 쉽게 들여다볼 수 없고, 입구를 찾기도 어렵다.

지금 한국 문학계는 독자 대신 소비자를 겨냥해 우선 동네 크기라도 넓히려고 애쓰고 있다. 그래서 소비자-독자가 뭐라도 사고 있으면 ‘뭐라도 읽고 있다’고 자위한다. 서사의 힘으로 독자층과 독서력을 키워내는 담대함 대신, 독자를 소비자로 대하는 각종 문학 행사만 늘어간다. 소설의 탁월함보다는 문단의 균형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를 전달하는 각종 문학상과 문예진흥기금도 마찬가지다. 고루 나누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왜 중복 수상이 이렇게나 드물까. 해마다 그렇게나 많은 뛰어난 한국소설이 나온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 이렇게 한국소설 동네는 가끔 탁월함이 돌출하는 울퉁불퉁한 세계보다는 서로서로 질투하지 않을 정도로 고르게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세계가 된다.

“모든 예술은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대중 오락화하며 그렇지 않으면 죽어서 잊혀버린다고 말해도 무방할지 모른다.”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는 말했다. 소설 수준의 하향평준화가 아닌, 오히려 대중주의는 곧 질적 하락이라는 오해 한가운데를 겨냥한 말이다. 대중의 변화에 위축돼 그들을 소비자로 축소하고 서비스 향상에 주력한다면, 한국소설의 예비-독자는, 말머리를 절반 뗀 비-독자로 머무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