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톰과 나이키, 서태지와 박소현, 우리들의 90년대

서태지와 유림회관, 하루키와 류, 마스터플랜, 코코스… 분명히 여기에 있었던, 추억으로 박제할 수 없는, 마침내 속속들이 개인의 역사가 된 90년대.

에디터의 책꽂이에서 보이는대로 꺼낸, 90년대에 출판된, 읽거나, 읽지 않은 책들.

 

90년대의 책들 왼쪽 페이지에 있는 책 목록은 다음과 같다. <팬진 공> 5호 1998, 민맥. 커트 보네커트 <고양이 요람> 1994, 새와 물고기. 파트릭 모디아노 <팔월의 일요일들> 1991, 세계사. 우스타 쿄스케 <멋지다!! 마사루> 1997, 대원. 백민석 <헤이, 우리 소풍간다> 1995, 문학과 지성사. <리뷰> 4호 1995, 문예마당.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수필집, 코끼리 공장과 해피엔드>, 1994. 무라카미 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1990, 예하. 노염화 <키치소년, 문화의 바다에 빠지다> 1997, 토마토. 유하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1991, 문학과 지성사.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1994, 세계사. 김현 <행복한 책 읽기> 1992, 문학과 지성사. 장정일 <장정일의 독서일기 2> 1995, 미학사. 로맹가리 외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1994, 현대문학. <인 매거진> 8호, 1999. <페이퍼> 18호, 1997. 신현준 외 <입 닥치고 춤이나 춰> 1998, 한나래. <서브> 1999년 2월호, 미디어새벽. 이 책들은 (장정일식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필요에 의해’ 에디터의 책꽂이로부터 여기에 늘어놓았다. 지나치는 인상으로서든, 각별한 의미를 담아서든, 새삼 다시 펼쳐 생각해볼 참이든, ‘90년대’는 살 속의 뼈처럼 이 책 속에 드리워 있다. 그때마다의 독후감은 어디론가 흩어졌다 해도 말이다. 혹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까? 빼어난 평론가 김현의 사후에 묶인 책 <행복한 책 읽기>가 전하는 바통을 재치있는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극작가인 장정일이 <장정일의 독서일기>라는 베스트셀러를 통해 받는다고. (마침 <장정일의 독서일기>엔 김현의 책을 읽은 독후감이 실려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보다 먼저 무라카미 류의 참혹하도록 아름답게 멋을 낸 소설이 검은새처럼 90년대의 하늘 위를 날고 있었다고. <팬진 공>과 <리뷰>를 펼친 사람이라면 분명 <입 닥치고 춤이나 춰>와 <서브> 99년 2월호를 샀을 거라고. 유하의 저 유명한 시집을 주의 깊게 읽은 독자는 故진이정 시인의 시집 말미에 있는 유하의 해설을 읽다가 한 번쯤 뜨거워졌을 거라고. <페이퍼>와 <인 매거진> 중 ‘내 취향은 이것’이라는 얘기를 분명히 할 수 있을 거라고.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 중 표지가 가장 아름다운 것은 1991년 세계사에서 나온 판본이라고…. 우리는 여전히 책을 펼칠 수 있다. 글자들은 허물어져 쏟아지지 않고, 거기 그대로 있다.

서태지, 철원 노동당사와 성균관 유림회관 그때나 지금이나 철원 노동당사 건물은 어느 계절이든 겨울처럼 서 있다. 속은 비었고, 겉은 황량하다. 1994년 여름, 서태지와 아이들은 철원 노동당사에서 촬영한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발표한다. 그리고 콘서트를 겸한 컴백 무대에서 서태지는 치마를 입고서 그 노래를 부른다. 2집 ‘하여가’에 사물놀이를 끌어들였을 때만 해도, 촉이 좋은 아이디어의 테두리로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뮤직비디오와 컴백 무대를 통해 서태지는 전혀 다른 차원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얼마나 멀리 보는가? 꿈꿀 수 있는가? 용기가 있는가? 그리고 1996년 1월, 서태지는 흰 셔츠의 단추를 모두 잠그고서 은퇴를 알리는 단상에 섰다. 그는 ‘창작의 고통’ 때문이라며 말을 아꼈지만, 그 말만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확인되지 않은 소문, 확인 수 없는 추측이 온통 엉킨 상황에서 ‘성균관 유림회관’이라는 장소는 혹시 서태지가 남긴 마지막 아이디어가 아니었을까? 이 또한 추측일 뿐이지만, 아무 데나 골랐다고 하기에, 거기는 지나치게 짙은 상징을 지닌 곳이었으니 말이다. 활동하던 시절로부터 유난히 단절을 외치며 ‘떼를 쓰던’ 기성세대를 향해 서태지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장소, 성균관 유림회관. 지금은 결혼식장으로 많이들 찾는 모양이다.

요! 마스터플랜 2호선 신촌역에 내리면 대학생들이 막 돌아다녔다. 대학가를 다룬 시트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옷을 입은 대학생들. 거기서 홍대 방향으로 걸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길의 풍경은 바뀌었다. 기타를 어깨에 멘 깡마른 남자들을 지나치며 심호흡을 가다듬었다. 발걸음도 달라졌다. 그 길을 매번 가리온의 “홍대에서 신촌까지 깔아놓은 힙합 리듬”이라는 가사처럼 리드미컬하게 걸었다. 마스터플랜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레드카펫 같은 건 없었지만, 그 골목으로 들어설 때는 언제나 좀 긴장하곤 했다. “힙합은 뭐라고 생각해요?”라는 질문이 이상하지 않을 때였으니까. 텔레비전엔 힙합이 많았지만, 그게 진짜 힙합인가? 라는 의문이 친구들 사이에서 스멀스멀 생기던 무렵. 그런 물음을 안고 주말 마스터플랜의 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주석, 사이드 비, 다 크루, 가리온…. 힙합 바지를 입은 스타의 공연을 우러러보는 것이 아닌, 확고하게 자리 잡히지 않은 것을 으샤으샤 함께 만들어나간다는 기분.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질세라 무대에 올라가 래퍼들과 같이 프리스타일 랩을 했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는 맹랑한 도발이 유효하던 시절. 알고 싶은 모든 게 거기에 다 있었다.

백스테이지2와 웰치스 와인이 뭔진 몰라도 웰치스는 알았다. 포도라기보다는 포도 맛이었지만, 적어도 90년대에는 포도 맛이 더 적절했다. 부담스러운 진짜보다 첨가물이 잔뜩 들어간 가짜를 즐겁게 향유할 때였다. 그럼에도 바다 건너 진짜 음악은 듣고 싶어 했다. 라디오나 시디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래서 팝음악의 현장에 있는 듯한 실감을 주는 뮤직비디오 감상실에 갔다. 위성방송에서 녹화한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등을 음료수 한 잔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주로 웰치스를 마셨다. 콜라에 기꺼워하던 세대와는 다르다는 기분이 들었다. 신촌과 홍대에 걸쳐 있던 백스테이지 1과 2가 유명했다. 1은 헤비메탈 같은 좀 센 음악을 틀었고, 2는 모던록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록이 좀 더 유연하게 적용된 음악을 틀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었고 웰치스는 시키지 않았다. 백스테이지가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을 때쯤 처음으로 와인을 마셨다.

박소현 vs. 이본 오후 8시가 되면 라디오를 켰다. 보통 저녁을 먹고 공부방에 들어가는 시간. 달리 말하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시간. KBS 89.1에선 까만 콩 이본의 낭창한 목소리가 나왔고, MBC 91.9에선 얼굴이 CD보다 작다는 박소현이 조곤조곤 사연을 읽었다.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와 <박소현의 FM 데이트>. 프로그램의 이름만큼이나 이본과 박소현은 달랐다. 오후 8시는 아직 좀 더 기운을 내도 될 것 같은 한편, 슬슬 하루를 정리해도 무리가 없는 때니까. 씩씩한 게 좋다면 이본, 느슨해지고 싶다면 박소현이었다. 물론 누군가에겐 그저 외모 취향의 문제였을지도. 게스트가 누가 나오든, 그날의 코너가 뭐든 그저 도장 찍듯 매일 같은 채널을 틀었다. 어떤 노래가 나왔는지도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목젖이 다 보일 것처럼 “깔깔깔” 웃던 이본과 나긋하게 “잠깐만요~” 하며 광고를 틀던 박소현의 말투만큼은 선명하다. 그때 8시에 한 번 맞춘 채널은 웬만해서 새벽 2시까지 바꾸지 않았다. 광고도 꼬박꼬박 다 듣고, 패션 시계니 의류 상품권이니 하는 선물의 목록을 외워 따라 말해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디제이를, 라디오를 좋아한 적이 있다.

 

스톰의 배지. 왼쪽은 모조품.

 

292513 = STORM? 292513의 정확한 뜻을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 “처음 브랜드를 만든 날짜래.”, “사장 아들의 주민번호 앞자리래.”, “‘이것이옷일세’라는 말을 숫자로 풀어 놓은 거래.” 숫자에 대한 그 당시의 신문 기사를 찾아 봐도 답변은 모두 제각각. 292513의 수수께끼는 봉인 된 채로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다. 옷도 옷이지만, 당시엔 브랜드를 둘러싼 그 외의 것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당대의 스타일 아이콘, 서태지와 김성재를 앞세운 스타 마케팅과 무명의 소지섭, 송승헌, 김하늘, 김남진이 떼로 출연한 캘리그라피 카탈로그. ‘세상엔 이런 것도 있구나.’ 바이럴 마케팅이, 캘리그라피가 뭔지도 모른 채, 스톰을 통해 많은 걸 처음 경험했다. 그리고 아무 가방에나, 아무 옷에나 달면 그만인 독수리 배지. 몇십 만원을 호가하는 스톰을 구할 형편이 안 되는 애들은 가짜를 구해서 아무 데나 달기도 했다. 그게 나치의 상징적인 문장과 흡사하다는 건 아무도 상관하지 않던 시절. 돌이켜보건대, 스톰은 과연 문제적인 브랜드였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어떤 해설가와 캐스터가 마이크를 잡느냐가 축구경기 시청률에 큰 영향을 미친다. 지금은 확실히 그렇다. 누군가는 ‘만담 콤비’란 별명을 얻고, 예측을 잘하는 해설가는 ‘문어’라 불리기도 한다. 송재익과 신문선 콤비는 1997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 MBC의 축구 해설을 맡았다. 9월 28일 도쿄 요요기 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의 최종 예선 1차전 역시 그들이 중계했다. “저게 웬 패스인가요. 어, 위험합니다! 이상한 짓을 했어요.” 후반 21분, 고정운의 실수로 일본의 야마구치가 선제골을 넣었다. 송재익과 신문선의 중계는 즉각적이었다. 선수를 감싸주거나, 시간이 많으니 만회하면 된다는 식의 빤한 소리는 없었다. “골, 골, 골이에요!” 후반 38분, 돌고래 같은 서정원의 동점 헤딩골과 뱃심 좋은 신문선의 외침은 꼭 한 쌍인 듯 보였다. 그리고 후반 41분. 수비수 이민성이 공격진 깊숙이 올라와 역전골을 터뜨렸다. “우리가 이것을 예측하지 않았어요?” “저는 벗어나지 않나 싶었어요.” “저는 벌써 골이 들어가는, 감각적으로 말이죠, 그걸 느꼈는데요.” “그렇습니까?” 다시 들어보면 좀 유난스러운가 싶기도 하지만, 그렇게 축구를 자기 가까이 두고 중계하던 해설자와 캐스터가 그전까지 있었던가? 그리고 송재익이 말했다.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도쿄대첩이라 불리는 그 경기만큼 진하게 남아 있는 한마디다.

 

양준일과 김민우의 데뷔 앨범.

 

김민우와 양준일 김민우는 015B와 같은 1990년, 양준일은 서태지보다 빠른 1991년에 데뷔했다. 발라드와 댄스라는 계보로 얘기해 보자면 그렇다. 물론 새롭기로는 변진섭이나 심신도 있었지만, 가족끼리 모여 보는 가요 프로그램의 순위와 별개로 김민우와 양준일의 노래는 좀 다르게 들렸다. 작곡가 하광훈과 윤상의 새로운 작법, 재닛 잭슨의 노래를 과감하게 차용하는 양준일의 용기. 물론 당시엔 두 뮤지션을 다른 가수들과 다르다 여기는 근거가 거기까지 다다르진 못했다. 대신 김민우와 양준일을 막연하게 ‘세련된’ 가수라 여겼다. 언더그라운드도, 실험음악도 아니었지만, 집에서 LP를 돌리기 보단 테이프를 가방에 넣고 어딘가 쏘다니는 쪽이 어울리는 음악임은 분명했다. 김민우의 선이 옅은 얼굴, 양준일의 어설픈 한국어 발음도 전형적이지 않아 보였다. 뭔가 애써 거부하진 않지만 어딘가 결이 달랐고, 그런 채로 굳이 주류를 부정하지 않는 듯한 모습. “지금 들어도 촌스럽지 않은 음악” 같은 말 대신, 그 때 그들이 풍기던 알듯 모를듯한 그 이미지의 아슬아슬한 지점을 기억한다.

코코스에 도리아 먹으러 가자 코코스는 양식을 양식답게 접하는 첫 번째 경험이었다. 호프집에서 피자를, 분식집에서 돈가스를 먹었지만, 양식을 일상으로 즐기는 서양인이 된 기분은 아니었다. 그래서 코코스 같은 패밀리레스토랑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코코스는 중식 패밀리레스토랑 투모로우타이거에 이어 국내엔 처음으로 들어온 양식 패밀리레스토랑이다. 1988년 문을 연 압구정점이 1호점인데, 어디서 이런 곳이 왔나 싶을 정도로 모든 것이 미끈하고 새로웠다. 굵다란 줄무늬의 식탁, 두툼한 칼, 1층에 주차장을 두고 2층에 입구가 있는 건물, 발랄한 서비스, 그리고 김치필라프와 치킨도리아라는 메뉴. 볶음밥보다 화려한데 늘어지는 치즈까지 올려주고 이름마저 도리아라니…. 그라탱이라는 말도, 리소토라는 말도 어색했던 시절, 치킨도리아는 양식 메뉴의 최고봉이었다. 물론 쌀이 들어간 도리아는 일본에서 이탈리아 요리를 본떠 만든 메뉴다. 그게 정통이거나 말거나, 머그컵에 딸려 나오는 미역국조차 세련된 문화로 만드는 코코스였다. 강남역 코코스(지금의 TGIF 자리)는 카레집 델리와 함께 당시 소개팅의 메카로 이름을 날렸고, 부와 세련됨을 캐주얼하게 드러내고 싶은 가족은 코코스에서 자동차 그릇에 담긴 어린이 세트를 먹었다. 코코스는 이후 베니건스와 TGIF의 등장으로 휘청거렸고, 결국 미도파에서 성원그룹, 신동방그룹으로 차례로 매각되는 부침을 겪었다. 그러다 2003년 최종 파산했다. 코코스의 폐점과 함께 치킨도리아는 고르곤졸라 피자나 알리오올리오 등에 밀려 잊히고 말았다. 그리고 작년 12월, 토니로마스의 마지막 점포도 문을 닫았다. 토니로마스식 바비큐백립도 이제 희미해지겠지….

따조를 따자 치토스를 먹으면 따조가 들어 있었다. 거기엔 벅스 바니, 태즈, 트위티 같은 <루니툰>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었다. 과자를 먹기 전에 일단 따조부터 꺼냈다. 아직 없는 그림이 나오면 좋았고, 있는 게 나오면 덤으로 따조 몇 개를 얹어 친구의 아직 뜯지 않은 과자와 바꾸기도 했다. 남자들의 세계에선 우람한 태즈가 가장 인기가 많았던가? 잘 안 나오는 그림은 나름 고가에 거래되기도 했다. 그래봤자 과자 몇 봉지였지만. 따조로는 게임도 할 수 있었다. 아주 단순했다. 땅바닥에 상대의 따조를 놓고, 그걸 쳐서 넘기면 그 따조는 내 것이 되었다. 치토스는 슈퍼마켓에서 팔았으니까, 동네 슈퍼마켓 앞엔 언제나 손이 새카매진 꼬마들이 가득했다. 양손 가득 따조를 움켜줘고 집에 가는 길엔, 골목대장 다음 가는 부러운 친구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전에도 과자는 열심히 먹었다. 하지만 거기엔 과자만 있었다. 나중엔 과자 안에 아이돌 가수도 들어 있고 만화 캐릭터도 그려져 있었지만, <루니툰> 친구들만큼 안달 나서 보고 싶은 얼굴들은 아니었다. 그때 <루니툰> 캐릭터들은 텔레비전도, 만화책도 아닌 과자 봉지 안에만 있었으니까.

교복을 벗고~ 그때나 지금이나 저 다섯 글자가 곧이곧대로 들리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 ‘오래전 그날’의 첫 소절을 한껏 감정을 잡고 부르면 옆에 있던 친구가 대뜸 “속옷까지 벗었던 너”로 받았다. “그래서 누가 교복을 벗었다고?” “교복을? 그게 그럴 수 있는 거야?” “교복만 벗었겠어?” 아름답고 슬픈 사랑 노래라는 걸 잘 알면서도, 윤종신의 목소리가 가장 미성이었던 한 시기를 그대로 관통했던 첫 소절인데도…. 누가 뭘 벗었다 하면 사실 싫기보단 좋은 경우가 흔한 게 인지상정이니까. 하지만 김규민의 노래 ‘옛이야기’에 ‘손수건만큼만 울고’ 같은 구절을 워크맨으로 들으면서 감탄하기도 했다.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조용필의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 변진섭의 ‘너에게로 또다시’의 가사는 한 번도 외운 기억이 없는데 지금도 외고 있다. 제각각 듣고 따라 부르다 문득 눈에 들어온 작사가의 이름은 모두 박주연이었다. 그때 가사는 좋고 지금 가사는 모르겠다는 식의 얘기가 아니다. 다만 노래 한 곡, 앨범 한 장을 가만히 들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는 게 까마득하다. 실없이 ‘그런’ 농담을 하면서 같이 웃던 그런 시간도.

설탕에 찍어 딸기를 먹었어 “설탕에 찍어 딸기를 먹었어. 딸기밭에서 하루 종일 놀았어. 한참 놀다 보니 하루가 다 갔어. 하루는 왜 스물네 시간일까. 수박 아줌마는 얼룩무늬 치마, 참외 할머니는 귀머거리 할머니, 사과 외숙모는 친절한가 봐. 딸기 내 친구는 사랑스러워.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딸기를 사달라고 졸랐어. 딸기를 먹지 않고 웃기만 했어. 나는 왜 이렇게 너를 좋아하는 걸까. 나도 왜 니가 좋은지 몰라. 그건 정말 몰라. 예! 나도 몰라. 새빨간 딸기는 너무 아름다워. 포도 아저씨는 꿈꾸는 사람. 설탕에 찍어 딸기를 먹었어. 딸기밭에서 하루 종일 놀았어. 한참 놀다 보니 하루가 다 갔어. 하루는 왜 스물네 시간일까. 좋아 좋아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딸기가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좋다구! 딸기 좋다구. 딸기가 좋아. 좋다구! 딸기가 딸기가 딸기가 딸기가 딸기가, 제일 좋아. 딸기가 좋아. 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딸기가 좋다구. 딸기가.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좋아. 딸기가 제일 좋아. 맛있어.” 삐삐밴드 1집 <문화혁명> 1995, 3번 트랙 ‘딸기’.

<느낌!>으로부터 윤석호 드라마 <느낌!>은 1994년 7월부터 방영됐다. 엉킨 듯 살짝만 빗은 긴 머리의 우희진이 전국의 여대생 기준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지만, 다행히 여름방학이 전국 여대생들의 안식처가 됐다. 첫 번째 느낌, 두 번째 느낌으로 회차를 나눈 형식도 새로웠고, 화면을 위아래로 분할해 침대 위에서 통화하는 각자의 모습을 한 화면에 담은 편집은 그야말로 ‘느낌 있었다.’ 무엇보다 등장하는 청춘 배우들은 그 어느 때보다 색깔과 활기가 넘쳤다. 긴팔 위에 반팔을 겹쳐 입고서 무심한 웃음을 날리는 손지창, 김민종, 이정재는 물론이고, 쳐다만 봐도 무언가 꿰뚫어보고 있는 듯했던 표정의 이본, 베레모를 쓰고 발랑 뒤집어진 입술로 일본 어디쯤에서 온 듯한 분위기를 내던 이지은까지 모두 최신식이자 최전선이었다. 서울 근교 앞바다에서 이들이 허리춤에 셔츠를 묶고 뛰면 뉴칼레도니아 해변에서 돈 들여 찍은 것보다 갑절은 더 멋있었다. 여기에 “오오 언제까지나”로 끝나는, 손지창과 김민종이 함께 부른 주제곡 ‘그대와 함께’가 깔리면…. 우희진을 두고 벌어진 삼 형제의 엇갈리는 사랑 이야기는 이 드라마에서 크게 중요친 않다. 지금처럼 무너질 듯 울어젖히는 것도 없다. 이마 중간쯤부터 목까지 화면에 꽉 들어차게 잡은 인형 같은 우희진의 얼굴과, 백화점에서 커피숍까지 당시의 가장 뜨겁고 선명한 장면을 가득 실었다는 것으로도 이 드라마는 확실한 지점을 획득한다. 그리고 말쑥한 배우들과 그걸 제대로 받쳐주는 윤석호 PD의 연출력은 2000년 <가을동화>로 이어져 새 드라마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김운경 작가가 쓴 <서울의 달>과 <느낌!>이 함께 방영되던 그해의 꽉 차는 느낌이란!

 

문화 계간지 <리뷰> 1995년 가을호에 실린 계보도와 지형도들.

 

계보도와 지형도 80년대나 90년대 평론가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표현 중에 하나가 ‘글램 록의 계보도에서는’, ‘우리 영화의 지형도 안에서는’, ‘90년대 젊은 작가들의 지형도에서는’이었다. 문화 계간지 <리뷰>에서는 한 발 더 나아가 계보도와 지형도를 자주 그렸다. 길을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지도를 건네려는 것인데, 문제는 그게 매우 부정확했을 뿐만 아니라 느슨했다. ‘서구 고전영화 계보도’, ‘영미 펑크록 계보도’, ‘95년의 한국음악 지형도’…. 지금이라면 수십 개의 계보도와 지형도로 만들어질 소재였다. 모르긴 몰라도 많은 사람이 저 계보도와 지형도를 조선왕조 외우듯이 외웠을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한국의 정보력이 얼마나 딱한 수준이었는지 안다면, 이것은 차라리 눈물겹다. 그들이 계보도와 지형도로 보여준 최대치는 고스란히 한국문화의 한계였다. 얼마든지 지도를 그릴 수 있지만 그리지 않는 지금과 부정확한 지도를 무수히 그려댔던 그때와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다.

중앙대는 현대를 이겼고, 연세대는 기아를 이겼다 젊은 허재는 근육질이었다. 김유택은 말로만 듣던 덩크슛이란 걸 했고, 강동희는 팔이 남들보다 한 뼘은 더 긴 것 같았다. 그들은 선배 세대인 이충희, 임정명, 김현준, 김진 등과 체질부터 달라 보였다. 허재, 김유택, 강동희는 모두 중앙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모두 기아자동차에서 뛰고 있었다. 기아는 계속 이겼다. 중앙대 시절부터 그랬다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90년대. 연세대와 고려대를 비롯한 대학팀이 제아무리 세다고 해도 실업팀들의 기세는 공고했다. 특히 기아를 꺾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런데 1993~1994 농구대잔치 본선 리그에서 연세대가 기아를 이겼다. 94:92 연장전 최후의 순간 결승 버저비터는 서장훈도 문경은도 아닌 김훈의 손에서 나왔다.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우지원, 김훈. 끈끈한 다섯 멤버가 기어이 일을 낸 것이다. 연세대는 ‘스타 군단’으로 불렸지만, 농구는 다섯 명이 한다는 아주 단순한 명제를 거기서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철옹성 같던 허동택 트리오는 그렇게 무너졌다. 그 충격 때문이었을까? 기아는 결국 그해 농구대잔치 8강에서 중앙대에 지며 탈락했다. 당연히 연세대학교엔 다른 적수가 없었다. 대학팀이 농구대잔치를 우승한 최초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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