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폴로와 닉스, 홍종호와 최할리, 우리들의 90년대

2015.02.10GQ

닉스와 스티븐 클라인, 폴로와 나이키 에어 포스 1, 최할리와 홍종호, 씨티극장과 상아레코드, 그리고 이상은. 추억으로 박제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은 90년대.

사진가 스티븐 클라인이 촬영한 닉스의 1996년 S/S 카달로그.

닉스와 스티븐 클라인 패션 산업은 버블경제의 척도다. 한국의 90년대만큼 로컬 브랜드가 난립하던 때가 없었던 이유다. 새로운 시도가 목숨처럼 다뤄지는 분야에서는, 지금 회고하듯이, 버블경제가 죄악이 아니었다. 확실한 브랜드 캐릭터가 옷만큼이나 중요했다. 쿨 독의 A0 사이즈 카탈로그, 닉스가 국내 사진작가들과 협업한 카탈로그 등은 무료 배포됐다. 모든 브랜드에는 ‘배지’가 있어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이곤 했다. 스톰의 힙색, 닉스의 폐타이어로 만든 가방, 보이런던의 마스크와 깡통 가방에 이르는 사은품에 무슨 마케팅적인 고려가 있었을까. 다만 당시의 대중은 로컬 브랜드를 사면서도 ‘어떤 브랜드를 입는다’고 느꼈다. 지금의 ‘필요한 옷을 산다’와 전혀 달랐다. 시대의 사정이 있는 것이겠지만, 적어도 좀 더 패션 브랜드다운 태도는 이때였다. 닉스는 스티븐 클라인에게, XIX는 테리 리처드슨에게 새 시즌 화보를 맡긴 적이 있는데, ‘연예인 혹은 유명 모델’이 등장하지도 않고, ‘옷이 잘 보이게’ 찍지도 않았다. 사진가와 아트 디렉터와 패션 브랜드가 다 함께 ‘새로운 것’을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VJ 최할리 1995년, 지상파 방송과 유선방송(중계 유선방송) 밖에 없었던 방송 시장에 케이블 방송(종합 유선방송 케이블)이 등장했다. 단순히 채널이 늘어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자체 제작 방송의 송출이 가능해졌다. 하루아침에 수백 개의 프로그램이 생겼다. 특히나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KMTV와 MNET의 음악 프로그램들이었다. 도대체 한번 보기 시작하면 끌 수가 없었다. 곧 라디오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모든 음악은 뮤직비디오로만 나올 수도 있다고 믿었다. 전화가 영상 통화로 대체된다는, 과학의 날 글짓기 대회 때 썼던 이야기가 영 허무맹랑한 것만은 아닐지 몰랐다. 최할리는 그 예감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키가 당시 한국 남성 평균 신장인 170센티미터보다 컸으며, 눈은 부리부리하고 선명했다. 주저나 당황이라고는 모르지만 은행 창구보다도 상냥하게 말했다. 착한 게 자랑인 진행자나 괜히 말로 윤색하는 데만 능한 진행자, 잘생긴 게 전부인 진행자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 같았다. 매력적인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이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했다.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는 최할리와 눈을 맞추며 확신했다.

씨티극장과 가로 자막 한국 최초의 가로 자막은 1988년 <로보캅>이었다. 하지만 좌석이 넓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가로 자막은 꽤 불편했다. 앞사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과 같은 어린이 대상 영화가 아니면 꽤 오랫동안 세로 자막이 일반적이었다. 이후 2001년 12월 31일에 개봉한 <반지의 제왕>은 당시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읽기 편한 가로 자막을 20여 개 영화관에서 도입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이 아닌 실사 영화에선 대대적인 첫 시도라는 말도 덧붙였다. 2003년부터는 멀티플렉스 극장이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하면서 좌석 간격이 넓어졌고, 스크린 하단에 가로로 자막이 있어도 앞사람 머리에 가리지 않아 전부 가로 자막으로 바뀌었다. 말하자면 1990년대는 가로 자막과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강남역 씨티극장에선 1997년부터 띄엄띄엄 가로 자막으로 상영했고, 이 사실을 크게 자랑했다. 그럴 수도 있었던 것이 좌석이 당시 다른 극장에 비해 꽤 넓었기 때문이다. 특히 1998년 2월에 개봉한 <타이타닉>을 씨티극장에서 보면서 가로 자막이 세로 자막 보다 편하다는 확실한 인식이 생겼다. 러닝타임 3시간 15분. 세로 자막으로 그 오랜 시간을 자막만 좇던 관객들은 다시 씨티극장을 찾았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 건너편 타워레코드에서 타이타닉 OST를 사는 건,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펼친 <타이타닉> 안 보기 운동도 막지 못한 데이트 코스였다.

홍종 1995년 3월부터 MNET과 KMTV 같은 케이블 방송사가 생기면서 뮤직비디오가 폭발적으로 늘었다. 당시 홍종호와 김세훈 감독으로 양분되었는데, 댄스음악은 홍종호 감독이, 발라드 음악은 김세훈 감독이 주로 맡아서 했다. 이 두 감독의 스타일은
팽팽히 대치했다. 홍종호 감독은 안무에 집중해 최대한 가수의 얼굴과 동작을 중심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고, 그에 비해 김세훈 감독은 ‘영화’ 같은 촬영, ‘영화’ 같은 편집으로 ‘영화’ 같이 주인공이 아프거나, 납치되거나, 아픈데 납치된 여자를 구하다가, 결국 죽는 이야기가 많았다. 홍종호 감독의 뮤직비디오가 더욱 1990년대로 기억되는 건, 그가 직접 만든 조명 때문이다. 360도 원형으로 형광등을 붙인 이 마법의 조명만 비추면 얼굴은 뽀얗게 변했고, 눈동자는 반짝반짝 빛났다. 그때 봤던 얼굴들이 지금 우리가 찍는 ‘셀카’를 지배하는 건 아닐는지.

 

1990년 유학을 결정한 일부터, 1997년 앨범 <외롭고 웃긴 가게> 까지, 이상은의 소식을 전한 잡지 기사들.

길 위의 이상은 1988년에 ‘담다디’로 데뷔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상은은 1990년 가을 돌연 ‘유학’을 발표하며 한국을 떠난다. 그리고 1년 뒤, 1991년 가을에 이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노래로(자신이 모두 작사 작곡한) 채운 앨범(커버 이미지는 현대 미술가의 작품)을 들고 잠시 한국으로 돌아온다. ‘더딘 하루’라는 노래로 텔레비전 무대에 선 건 한두 번에 불과했다. 박남정, 변진섭, 이승철, 이선희 팬클럽에 질세라 꺅꺅 소리를 지르던 이상은의 팬들은 그때 대부분 짐을 싸서 흩어졌다. 이상은은 다시 미국으로 갔고, 1992년 여름엔 하우스 비트로 중무장한 앨범  을 들고 한국에 왔다. 프랫 인스티튜트 학생증을 목걸이처럼 걸고서. 그때 한국은 이제 막 서태지와 아이들 판으로 물들던 때. 윤상이  을 듣고 기뻐 놀라 신해철에게 “상은이가 해냈어!” 소리쳤다는 일화는 회오리춤 한 번에 날아가버릴 일이었다. 그해 겨울 이상은은 ‘언젠가는’이 실린 5집 앨범을 들고 이듬해까지 제법 길게 활동을 이어가다가 다시 한국을 떠났다. 이상은의 가장 궁금한 시절을 꼽으라면 5집 ‘언젠가는’ 이후 1995년 겨울 ‘공무도하가’가 실린 6집을 일본 EMI에서 발표하기까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인기 정상의 아이돌 스타에서 돌연 아티스트의 길을 찾겠다며 떠난 그녀가 마침내 ‘세계’를 이룬 작품으로서 <공무도하가>는 뛰어난 앨범이기 전에, 참으로 기이한 앨범이다. 일본으로부터 역수입한 그 앨범은, 이후 대한민국 대중음악 명반을 말할 때면 결코 빠질 수 없는 이름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거창한 ‘투자’로부터 선뜻 가벼이 몸을 털고는 7집 <외롭고 웃긴 가게>를 내놓는다. 2015년까지 오는 동안 맥락은 여러 번 바뀌었을 수 있지만, 적어도 80년대 데뷔한 아이돌 스타가 90년대를 통과하는 방식을 살피건대, 이상은은 거의 독보적으로 다른 길을(앞서 언급한 이승철, 이선희, 박남정, 변진섭 등이 어떻게 90년대를 보냈는지를 더듬어보면 안다) 걸었다. 이상은은 여전히 그 길에서 떠나고, 돌아온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 압구정동 상아레코드의 비닐 봉투, 삼성 라이온즈 양준혁의 당시 싸인볼, 당시 멀티숍마다 꼭 있었던 폴로스포츠 모자, 영화 잡지 <키노>의 ‘에디토리얼’ 페이지.

서울의 레코드 가게들 지금과 달리 음악 취향은 유튜브의 도움으로 만들 수 없었다. 각각 고유한 레코드 가게가 있었고, 애호가들은 그들과 함께했다. 확실히 구입해야 할 라이센스 반은 종로 세일음향에서 샀다. 가장 저렴했으나 공간이 협소해 구색이 다양하진 않았다. 세일음향에 음반이 없으면 파워스테이션으로 갔다. 여기서부터는 좀 더 근사하게 음악을 골랐다. 곳곳에 있는 청음기로 음악도 들어보고, 기획 코너도 기웃거리고, 전혀 모르는 장르에 가서 뒤적거리기도 했다. 바구니에 음반을 잔뜩 담아가는 어른을 보거나 친구와 함께 음반을 고르면서 가깝고도 편안하다고 느꼈다. 꾸준히 음반을 산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호사 취미지만, 놀이터가 갖춰져 있었고 놀이터의 기능에 따를 뿐이었다. 그래도 못 구하는 음반은 뮤직랜드, 신나라, 타워레코드 등을 돌았다. 가격대가 좀 높았지만, 할인행사나 쿠폰을 잘 이용하면 괜찮았다. 무수한 대형 음반점이 음반의 ‘코스트코’가 될 수 없다는 건 축복이었다. 대형 음반점에 없는 음반이 더 멋있고 새로운 음반인 경우가 많았다. 향뮤직의 선택이 빠르고 정확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힙합은 압구정 상아레코드, 헤비메탈은 노량진 머키 레코드, 요즘으로 치면 ‘힙스터 음악’은 홍대 시티비트에 있었다. 90년대의 레코드 가게 중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이 중에서 향뮤직뿐이다. 놀이터가 없어지고 놀이는 집에서 혼자 한다. 

신인 이종범과 신인 양준혁 해태의 이종범과 삼성의 양준혁. 광주일고 출신 이종범과 대구상고를 나온 양준혁. 발 빠른 이종범과 힘 좋은 양준혁. 1993년, 그렇게 다른 두 명의 신인이 동시에 프로야구계에 등장했다. 3할 4푼 1리, 130안타, 23홈런, 90타점의 양준혁과 2할 8푼, 133안타, 16홈런, 73도루의 이종범. 둘 중 누가 신인왕이 되어도 이상할 것 없는 기록이었다. 결국 신인왕은 양준혁이 차지했지만, 이종범은 팀을 우승시키며 한국시리즈 MVP로 응수했다. 20년이 지난 지금, 둘은 각각 ‘종범신’과 ‘양신’으로 불린다. 그런 별명을 가진 선수는 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 이종범과 양준혁, 둘뿐이다. 입단 직후 머리가 커서 맞는 헬멧이 없었다는 양준혁의당시 사인은 보다시피 신인 시절부터 아주 위풍당당하다.

<키노>라는 선언문 영화 잡지 <키노>의 처음 열 권 표지를 순서대로 기억한다. 허옇게 색을 날린 강수연이 1호, 턱을 괸 안성기 옆으로 요염하게 앉은 홍진경이 2호, 풀장에서 웃는 박중훈이 3호, 유리벽을 짚고 있는 심혜진이 4호, 웨딩드레스를 입은 최진실이 5호, 문성근과 홍경인이 익살스럽게 웃는 것이 6호, 해바라기 화관을 쓴 김혜수가 7호, 입술을 쭉 내민 심은하가 8호, 왕가위가 9호, 타란티노가 10호. 표지 이미지만으로는 가볍고 환했지만 <키노>는 보는 잡지가 아니라 읽는, 아니 사유하려는 영화 잡지였다. 한국의 지성이란 지성이 모두 문화를, 특히 영화를 파고들었던 때, <키노>는 절대적인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뭔가를 대표하려는 뉘앙스는 없었다. ‘디스쿠르’ ‘시네마 베리떼’ ‘도지에’ ‘리뷰’ 등의 섹션은 견고한 성 같았는데, 그 첫 포문을 여는 페이지가 바로 ‘Editorial’이었다. 창간 1주년 기념호인 1996년 5월호엔 이렇게 썼다. “키노의 5월은 일주년을 맞는 작은 행복과 다시 시작하는 자기 비판입니다. 우리는 정말 원칙을 지켜왔는가? 그래서 영화의 작가주의에 관해서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버렸는가? 작가주의는 노선이 될 수 있는가? 만일 그러하다면 노선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영화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세상과 싸우는 것임을 다짐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간 일주년 우리의 특집은 영화광과 인디펜던트 다큐멘터리입니다. 이제 키노는 다시 한 번 시작합니다.” 이런 선언은 매달 반복되었다. 의심하고, 묻고, 답하는 일. 또한 그 펼침 페이지엔 음반 한 장, 책 한 권이 함께 들어 있었다. 음반은 대개 펑크였고, 책은 인문과 철학이었다. 그건 모두 <키노>가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자 무기였다. 도무지 (어려워) 읽을 수 없는 잡지라는 오명이 (편집부에게든 독자에게든) 고스란히 순진한 명예일 수 있었던 잡지. 심지어 <키노>는 잡지라는 형식으로부터 무한히 영화 자체를 꿈꿨다. 편집후기에 정성일 편집장은 이렇게 썼다. “나는 영화 잡지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라고 믿는다. 영화를 만드는 일을 빼고.” 그리고 그는 2010년에 자신이 감독한 첫 영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오일, 캠프, 아폴로 ‘강남, 힙합’은 그저 지나가는 우스갯소리로 넘길 현상은 아니었다. 90년대 말 압구정동을 중심으로 강남 일대는 온통 힙합으로 들썩였다. 먹는 것 빼고는 모두 힙합이었던 시절, 그 자기장의 중심엔 캠프, 오일, 아폴로 같은 압구정 1세대 멀티숍이 있었다. 90년대 초반 이태원을 중심으로 번졌던 힙합이 ‘치렁치렁’의 느낌이었다면, 후반의 강남, 압구정동은 훨씬 깔끔하고 정제된 스타일. 당시 멀티숍에서 취급했던 브랜드의 팔할은 폴로와 리바이스 그리고 나이키였다. 굳이 뭘 사지 않더라도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찾아갔다. 입구에서부터 우-탱 클랜이나 닥터 드레의 힙합 비트와 알싸한 방향제 냄새가 흘러나왔고, 문을 열면 오와 열을 맞춰 진열된 수십 켤레의 운동화가 반겼다. 그걸 보며 괜히 조바심을 내기도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 주고도 못 사는 것들이 있기 마련. 폴로의 로고 데님 셔츠나 패딩 점퍼, 성조기 니트, 테디 베어 캡 같은 인기 품목은 늘 품절이었다. 운 좋게 찾는 게 있는 날이라면, 드레드 머리를 한 점원이 조용히 창고에서 꺼내다 줬다. 특별히 내주는 것 같은 그 은밀한 유대가 좋아서 일부러 없는 걸 찾아 묻기도 했다. 유행의 틀이 서너 번 바뀌는 사이 압구정동엔 ‘멀티숍’ 대신 ‘편집숍’이 들어섰고, 지금 그곳에서 사람들은 운동화 대신 구두를 더 많이 산다. 하지만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된 무언가를 사려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바뀌지 않은 것 같다.

 

90년대를 씩씩하게 군림했던 문제적 나이키들. 나이키 줌 플라이트, 갖가지 에어 포스 1, 에어 맥스 97. 자료 제공/ 김준희.

문제적 운동화들 NBA와 슬램덩크를 비롯한 농구의 폭발적인 유행,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 그리고 힙합. 당시, 농구화를 사야 할 이유는 참 많기도 많았다. 90년대 초반, 동대문시장 골목에선 나이키 농구화를 은밀하게 팔았다. 진열하지 않고, 뒤에서 몰래 꺼내주는 식. ‘찰스 바클리’, ‘점박이’ 같은 별명의 에어 맥스 2는, 그 시절 진짜보다 가짜가 더 많았다. 95년 겨울엔 운동화 최초로 신발 바닥 앞부분과 뒷부분에 에어쿠션이 훤히 드러난 ‘에어 맥스 95’가 출시됐다. 당시 나이키엔 에어에 문제가 생기면 새 운동화로 보상해주는 파격적인 애프터서비스가 있었는데, 학교에서 감쪽같이 에어를 터뜨리는 비법을 공유하기도 했다. 두 번이나 바꿨다는 무용담. 교환의 종착지는 대개 에어가 안 보이는 ‘에어 조던 10’이었다. 야구로 전향했던 마이클 조던이 NBA 복귀 후 처음 신고 나온 신발. 그리고 같은 해, 서태지는 나이키 ‘에어 포스 1 캔버스 하이’를 신고 ‘컴백홈’을 불렀다. 곧 전설이 될 운동화, 에어 포스 1 열풍의 서막이었다. 1997년, 영국으로부터 반환된 홍콩을 기념해, 리복에선 성룡의 사인을 자수로 새긴 ‘인스타 펌프 퓨리’를 출시했다.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였는지도 모른채, 그저 신발에 달린 에어 펌프를 꾹꾹 누르며 신발에 바람을 채워댔다. 90년대 후반부터는 좀 본격적인 추세였다. 분야에 따라, 취미에 따라, 신던 운동화도 제각각 달랐다. 춤을 추던 친구들은 퓨마의 ‘GV 스페셜’이나 아디다스의 ‘슈퍼스타’를, 자나 깨나 농구를 하던 친구들은 NBA 스타의 이름을 딴 각종 농구화를 신었다. 그리고 당시 멀티숍으로 조금씩 유입된 시작했던 당대의 운동화 나이키 ‘에어 포스 1’. 이를 두고 벌어지는 현상은 하나의 신드롬으로 여겨도 좋았다. ‘올빽’, ‘달마시안’, ‘된장’, ‘고추장’, ‘마요네즈’, ‘로보캅’ 등등, 신발 저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별칭까지 붙였고, ‘인디 포스’나 ‘빨간 완창’ 같은 희귀한 모델은 등장만으로도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당시 멀티숍에서 에어 포스 1의 가격은 20만~30만원, 아르바이트 한달 평균 월급도 30만원 안팎.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어떤 것들은 없어서 구할 수가 없었다. 새 천년을 즈음하여 농구의 열기도, 힙합 스타일의 열기도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운동화를 신고 모은다. 어떤 운동화는 그때 모습 그대로 다시 발매되기도 한다. 90년대가 각별했던 이유는 어쩌면 단 하나, 지금도 기꺼이 전설로 불리는 특별한 운동화 대부분이 그때로부터 왔기 때문이다.

 

스톰과 나이키, 서태지와 박소현, 우리들의 90년대

쌈지와 드럭, 우리들의 90년대

    에디터
    장우철, 정우성, 손기은, 정우영, 유지성, 양승철, 장승호
    포토그래퍼
    이신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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