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는 90년대 – 3

쌈지와 <이매진>, 드럭과 아우라소마, 아이큐점프와 소년챔프, 우리들의 일그러지지 않은 90년대.

미술가 최정화의 팔팔한 기운이 고스란히 이식된 <쌈지 스포츠>.

쌩쌩한 쌈지 컬러가 있고, 최정화가 있고, 쌈지가 있었다. 노랑은 노랑, 빨강은 빨강, 주황이면 주황, 색동이면 색동, 쌩쌩 눈을 공격당하며 유쾌한 비명을 질렀다. 키치니 뭐니 말이야 잔치가 열렸지만, 컬러가 어디 그리 허약한 것인가? 아랑곳 않고 튼튼한 컬러들은 최정화라는 걸출한 작가와 쌈지라는 막강한 제작자를 통하며 시공간을 넘나들었다. 압구정 한복판에 오방색 천막을 휘날리는 쌈지 매장이 생겼을 땐 아예 짜릿했다. 사진에 보이는 책은 쌈지스포츠의 카달로그지만, 최정화가 만들어낸 고유한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 권의 이미지북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교정기를 끼고 묘하게 웃고 있는 여자애의 얼굴에서 곧장 떠오르는 말은 단연코 ‘90년대’가 아닐까? 지금 쌈지는 홍대와 압구정이 아니라, 인사동에 있다. 그 사실이 왠지 아쉽기도 한 건 그토록 활활 타올랐던 컬러가 남긴 잔상 같은 걸까.

<아이큐 점프> vs. <소년 챔프> <아이큐 점프>엔 <드래곤볼>이 <소년 챔프>엔 <슬램덩크>가 있었다. 그건 두 만화 잡지를 고르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물론 무 자르듯이 나눌 수는 없지만. <아이큐 점프>에 실린 대표적인 일본 만화는 <4번타자 왕종훈>, <날아라 캡틴>, <캡틴 츠바사>와 같은 발랄한 스포츠 만화나 <떴다! 럭키맨>, <란마 1/2>과 같은 유쾌한 만화였다. 연재된 국내만화도 <일곱개의 숟가락>, <까꿍>, <다이어트 고고>, <힙합>과 같이 통통 튀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반면 <소년 챔프>엔 <3X3 아이즈>, <타이의 대모험>와 같이 거대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는 모험 만화나, <출동! 119 구조대>와 같이 현실적인 이야기, 국내 만화는 <굿모닝! 티처>,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 <짱> 같이 고등학생의 이야기를 다룬 만화가 많았다. 판매부수는 <아이큐 점프>가 항상 1등, <소년 챔프>가 2등. 언제나 취향이 나이와 비례하는 것은 아니니까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아이큐 점프>를 초등학생부터 전 연령층이 좋아했다면, <소년 챔프>는 중고등학생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얻어서 였을까?

21C 그루브와 아우라소마 99 ‘테크노’는 거슬리는 단어였다. 장르란 그저 따라붙는 이름표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문물을 일방적으로 들여오기만 하는 입장에선 그만큼 손쉬운 표현도 없었기에, 그건 언제나 논란의 불씨가 되기 일쑤였다. 그땐 ‘테크노’가 그랬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방관자들의 푸닥거리일 뿐, 즐기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다. 하이텔에 있었던 동호회 ‘21C 그루브’와 애호가 몇몇이 의기투합한 기획사 펌프기록이 주최한 파티 ‘아우라소마 99’가 그 중심이었다. 관련 자료를 찾다가, 당시 ‘21C 그루브’ 시삽이었던 이종근 씨가 만든 인터넷 페이지가 검색되어 반갑게 텍스트를 옮긴다. “그동안 국내에서 테크노 뮤지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DJ 디코드, 모하비, 달파란 등에게서는 하나의 공통점을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들이 모두 21세기 그루브라는 한국통신 하이텔 내 테크노 동호회의 회원이라는 점이다. 국내 최초의 테크노 컴필레이션<techno@kr>의 참가 뮤지션들도 모두 21세기 그루브의 회원이기도 하다. 21세기 그루브는 단순한 동호인들의 모임이 아니라 한국의 테크노 문화를 탄생시키고 발전시킨 문화집단이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 중인 대부분의 테크노 뮤지션과 DJ들은 물론, 테크노 관련 기사를 자주 다루고 있는 신문이나 월간지 기자, 케이블 TV의 테크노 프로그램 PD, 테크노 음반 기획자, 테크노 클럽 운영자, 테크노 전문 음악평론가와 자유기고가, 레이브 기획자들의 근거지이다.” 과연 그랬다. ‘아우라소마 99’를 주최한 펌프기록의 멤버도 모두 ‘21C 그루브’ 회원이었다. 매달 장소를 바꾸며(지평을 넓히며) 축제를 열었던 ‘아우라소마 99’ 중에서 유난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클럽 108에서 트랜지스터헤드와 타악그룹 공명이 함께 비트를 쏟아내던 순간이다. 기억은 온통 불완전하다지만, 그때 그곳에 있던 이들이 한 번쯤 추던 춤을 멈췄다고 믿고 있다.
김용호와 박지원 90년대 초에 압구정동이라는 신드롬이 있었다면, 90년대 중후반은 청담동의 시대였다. 얼핏 두 사람의 얼굴이 스친다. 사진가 김용호 그리고 디자이너 박지원. <보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지역 최고의 카리스마를 겨루는 패션 피플”인 두 사람. 어쩌면 청담동은 두 사람의 이름으로부터 어떤 색을 입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랄프 로렌의 흰색 리넨 수트에 레이밴 클럽마스터를 쓰고 시가를 문 남자 김용호와 어디에 어떤 포즈로 있든, 어지럽게<꽂힌 꽃 같던 여자 박지원. 두 사람은 공교롭게도 사진가와 디자이너 말고도 똑같이 청담동 카페 주인을 역임했다. 김용호가 만든 카페 드 플로라와 살롱 드 플로라는 청담동의 처음을 알리는 ‘스모키한’ 공간이었다면, 박지원의 카페 파크는 온통 장밋빛이었다. 칠흑 같은 흑장미, 엉덩이 같은 분홍 장미,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흰 장미…. 1998년, 살롱 드 플로라에서 쓴 낙서가 있기에 슬쩍 옮긴다. “여기선 모든 걸 들킨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 ‘아우라소마 99’의 플라이어들. 사진가 김용호와 연극배우 박정자가 함께 만들었던 공간인 살롱 드 플로라의 성냥. 잡지 <이매진> 1997년 1월호. 홍대앞 클럽 드럭에서 찍은 사진(당시 노 브레인의 기타리스트였던 차승우와 크라잉 넛의 베이시스트 한경록), 그리고 노 브레인의 보컬 ‘불대가리’ 이성우의 싸인.

 

드럭을 들락거리며 1996년 5월, 명동과 홍대에서 ‘스트리트 펑크쇼’가 열렸다. 세상에 저런 애들이 있구나! 누군가는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친구들을 동시에 얻었다. 그리고 매일같이 있는 힘을 다해 놀았다. 홍대 정문에서 서쪽으로 내려가다 극동방송국 조금 못 미쳐 왼쪽으로 구부정하게 솟은 언덕길에, 이게 출입문인지 개구멍인지 모를 계단을 내려가면, 이게 지금 공사장인지 공연장인지 모르는 곳이 나왔다. 거기가 드럭이었다. 그 공간은 숫제 새로운 뭔가를 기대한 이들에게조차,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소리치고 있었다. 이를 어쩌나 우물쭈물하다가도 공연은 갑자기 시작되었고, 그러고 나면 모든 걸 잊었다. 처음은 노 브레인, 다음은 크라잉 넛(두 팀은 2014년에 함께 앨범을 냈다). 에어컨이 있었나, 온풍기는 있었나, 전기는 들어왔으니 기타 잭을 꼽았겠지. 습식 사우나인지 클럽인지 헷갈려도 그만, 이게 펑크인지 뭔지, 오이인지 당근인지조차 의미를 둘 건 없었다. 친구들은 모여 있었고, 그것만으로 ‘우리들의 세상Our Nation’이었다. 펑크와 경찰차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고전적인 짝꿍이었으니, 드럭 앞은 언제나 짜증스런 긴장도 흘렀지만, (당시 클럽 공연은 불법이었다) 말하자면 1996년 드럭에 있었던 이들을 90년대로부터 살아남은 자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크라잉 넛이 공연 첫 곡으로 즐겨 불렀던 노래 ‘묘비명’은 이렇게 시작한다. “꺼져라 껍데기! 집어쳐라 거짓말!” 지금 들어도 맙소사, 울컥하는 건….

1996년의 이영애와 2015년의 마돈나 1996년 연말에 합정역 구내서점에서 <이매진> 1997년 1월호를 샀다. ‘보자마자’라는 표현은 오직 그 순간을 위해서만 쓰일 수 있다고 여겼을 만큼, 가판대에서 그것을 보고 값을 치르기까지의 시간은 지금도 꿈같다. 당시, 도발적이라는 말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표지가 준 충격은 실로 강했다. 아티스트의 작업을 커버 모델의 얼굴에 ‘설치’하는 식으로 진행된 시리즈는 이후로도 계속됐지만, 그만한 충격은 쉽지 않았다. 이불은 “이 작품을 어떻게 보는 거냐”는 에디터의 질문에 퉁명스럽게 “느끼는 대로 보라”고 말하다가, 슬며시 ‘여전사’라는 단어를 언급한다. 장식적인 소재들이 얼핏 예쁘게 보이지만, 얼굴에 착용하면 매우 공격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사실. 더구나 그 공격성이란, 그걸 쓰고 있는 사람이 더욱 강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까지. 당시 <인샬라> 개봉을 앞둔 이영애는 뻔하게 예쁜 사진이 아니라 도전적인 뭔가를 해보고 싶어 했다는 뒷얘기가 쓰여 있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가장 큰 불가사의는 그녀의 요즘 얼굴이 이 표지를 찍었던 얼굴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일지도 모르겠다. 아, 올봄에 발매될 마돈나의 새 앨범 커버 사진이 공개되었을 때, 이 표지를 떠올린 사람, 없었을까?

더 늦기 전에 1992년, 환경보전 슈퍼 콘서트 <내일은 늦으리>가 열렸다. 신해철이 작사, 작곡한 주제곡 ‘더 늦기 전에’를 부를 땐 콘서트에 참여한 모든 가수가 무대에 섰다. “생각해 보면 힘들었던 지난 세월/앞만을 보며 숨차게 달려 여기에 왔지.” 봄여름가을겨울의 김종진이 부른 첫 소절을 신해철과 윤상이 차례로 받았다. 그리고 푸른하늘의 유영석, 신성우, 당시 015B 객원 보컬이었던 김태우와 김종서…. 신승훈과 이승환이 마이크 하나로 화음을 넣어가며 후렴을 불렀고, 서태지는 마지막 내레이션을 맡았다. 연주를 맡았던 밴드도 ‘드림팀’에 가까웠다. 드럼은 전태관, 배이스는 윤상, 피아노는 정석원, 기타는 김종진, 장호일과 N.EX.T 초기 멤버 정기송. 그런 사람들이 다 같이 불렀던 노래. 해, 산, 물을 형상화한 로고도 간결하니 예뻤다. 이듬해 EOS, 듀스, ZAM이 가세해 명맥을 유지하던 콘서트는 1995년으로 끝났다. 최초이자 최고였던 1992년, 제 1회 <내일은 늦으리> 콘서트에서 N.EX.T가 부른 노래는 ‘1999’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신해철의 독백으로, 첫 가사는 이랬다. “서기 1999년 9월 10일, 전기의 공급이 완전히 중단되었다.” 식물은 전멸하고, 신생아 대부분이 기형으로 태어나며, 온난화로 해안 도시가 사라질 거라는 경고. 1999년은 이미 지나갔고,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지만 그의 새 노래는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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