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가장 GQ다운 남자는 누구일까? <1>

2015.03.05GQ

지금 이곳에서 가장 지큐다운 남자는 누굴까? 2001년 <GQ KOREA> 창간 이후, 우리는 항상 이 질문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고는 생각할 때마다 어려워 했다. 젠틀맨을 ‘신사’라 번역하면 그 좁은 테두리가 육박해왔고, ‘GQ맨’이라는 조어엔 어딘지 갈증이 먼저 일었다. 2015년 3월, 우리는 좋아하는, 옹호하고 지지하는, 동시대를 사는 유대감을 나누고픈 남자를 50명(만) 선정했다. 그리고 썼다. 헌사이자 주장으로써.

1. 정명훈 

1953년생 | 지휘자, 피아니스트 | 1960년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하이든 피아노 협주곡 협연. 1974년 차이코프스키 국제 콩쿠르 2위. 2000년 2005년 서울 시립 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임명.

 

여러모로 자극적인 요소가 모여 있었다. 정치와 예술, 돈과 권력. 말은 너무 많았지만 누구도 정확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채 점점 혼탁해지기만 했다. 1월 19일,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의 기자회견 자리도 그럴 뻔 했다. 입장을 설명하던 정명훈은 “말로 해선 도저히 안돼. …그냥 한 곡 쳐도 될까요?” 그는 취재진에 묻더니 그대로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와 슈베르트의 ‘아라베스크’를 연주했다. 그를 둘러싼 온갖 지저분한 말들과는 전혀 관계도 없이 그저 깨끗하고 깊어서 또한 온화했던 8분 55초. 연주가 끝나자 정명훈은 웃으면서 퇴장했다. 기자들은 박수를 쳤다. 정명훈의 언어였고, 기자들의 대답이었다. 저명한 클래식 음악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는 그가 운영하는 클래식 뉴스 사이트 ‘슬립드 디스크Slipped Disc’에 ‘미디어가 마에스트로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MBC 이 자신의 인터뷰를 왜곡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글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덧붙일 필요도 없이, 나는 정명훈이 승리하길 바란다.” 그날 정명훈의 즉흥적인 연주는 단단하고 탁월한 한 명의 신사가 구사할 수 있는, 과연 기품 있고 현명한 언어였다.

 

2. 기성용

1989년생 | 축구선수 | 프리미어리그 스완지 시티 AFC 소속. 2010년, 2014년 월드컵 출전.

 

약 1년 전만 해도 기성용과 사람들 사이엔 벽이 있었다. 하지만 기성용은 스스로 단단한 벽이 되었다. 그는 공을 지킬 때 쉽사리 무너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시야는 넓고, 롱 킥은 정확하다. 큰 키, 다부진 체격으로 하는 몸싸움은 프리미어 리그에서 뛰는 어떤 선수에게도 쉽게 밀리지 않는다. 기술과 체격을 갖춘 붙박이 주전 프리미어리거. 그는 아시안컵 전 경기에 풀타임으로 출전했고, 프리미어리그에 복귀하자마자 동점골을 터뜨렸다. 부상과도 거리가 멀다. 능력은 키우고, 입을 닫은 채, 묵묵하게 자신의 일을 하는 게 신사라는 걸 스스로 증명했다.

3. 김래원

1981년생 | 배우 | 1997년 MBC 드라마 <나>로 데뷔. 이후 <순풍산부인과>, <옥탑방 고양이> 외 16편의 드라마와 12편의 영화. 2015년 드라마 <펀치>, 영화 <강남 1970>.

 

김래원은 선이 굵다. 사위를 삼을 것도 아니지만 괜히 든든하다. 그가 화면을 장악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그는 누구도 불안하게 만들지 않는다. 연기파 소리도 없이 어느새 그의 연기엔 두터운 신뢰가 쌓여 있다. 최근 드라마 <펀치>에서, 그는 상대배우가 국어책을 읽든 지나치게 연극배우처럼 굴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삼십 대 남자 배우는 많지만 이십 대로부터 훌쩍 성장해 완연하도록 독립한 배우는 참 드물다. 김래원은 점점 멋있어질 것이다.

 

 

4. 임시완
1988년생 | 제국의 아이들 멤버 | 2012년 드라마 <해를 품은 달>, 2013년 영화 <변호인>, 2014년 드라마 <미생>에 출연.

임시완은 잘해놓고 방글거리는 쪽이 아니라, 잘해놓고 전전긍긍하는 쪽이다. 시키면 잘할 거면서, 고민하고 연구하는 성격. 임시완이 발전하는 이유는 이런 태도 덕이다. <변호인>과 <미생>은 그가 최선을 다한 결과물이다.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절실함도 배어 있다. 그래서 잘했다고 말없이 어깨를 툭 치고 싶고,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저 어깨를 툭 한번 쳐주고 싶다. 그는 이제 연예계의 정글에서 좀 여유를 찾았을까? 그렇다고 한들 임시완의 으스대는 어깨를 볼 일은 없을 듯하다. 다행이다.

 

 

5. 손석희
1956년생 | 1984년 MBC 입사. 방송인 최초로 아나운서와 기자 겸임. JTBC 보도부문 사장.

손석희는 아주 잘 쓴 한국어 문장을 읽는 것처럼 말한다. 때론 완곡하고 대체로 단호한 90분의 리듬. 지금 JTBC <뉴스룸>에선 다른 어떤 매체와도 구별되는 뉴스를 볼 수 있다. 담백하고 다채로우며 정확하다. 과연 앵커의 언어, 기자의 태도란 그래야 옳은 게 아닌가 한다. 손석희가 <뉴스룸>을 꾸린 것은 2013년이다. MBC <뉴스데스크> 이후 14년 만이었다. 지금 두 방송사의 뉴스는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그건 언론 혹은 뉴스가 마땅히 지향해야 하는 이상에 얼마나 가깝고 또 얼마나 멀까? 그에 대한 대답을 손석희의 한국어로부터 찾는다.

 

 

6. 강우일 주교
1945년생 | 2002년 천주교 제주교구 교구장 주교.

지난여름, 성 프란치스코 교종이 광화문 시복식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 씨를 위로한 장면에 앞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이름이 있었다. 천주교 제주교구장 강우일 주교는 시복식에 앞서 세월호 유족 농성장 철거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눈물 흘리는 사람 내쫓고 성사를 거행할 수는 없다.” 그는 당시 교황방한준비위원장이었다. 제주 강정마을에 대해서도, 삼척 핵발전소 유치에 대해서도, 4대강 사업에 대해서도 그는 침착하게 발언했다. 그 발언을 소재로 정치를 논하는 것이 옳은 일은 아닐 것이다. 몹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고 진짜 옳은 일은 종교가 마땅히 그런 사람들 곁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뿐이니까. 강우일 주교는 몸소 그렇게 했다. 진짜 힘과 위로가 필요한 곳에 기꺼이 있었다.

7. 디오
1993년생 | 2012년에 데뷔한 가수 EXO의 멤버 | 지난해 SBS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와 영화 <카트>를 통해 연기도 시작했다.

디오의 매력은 외모에서 기인한다. 날렵하고 뾰족한 얼굴의 또래들 사이에서 디오의 얼굴은 동그랗고 우직하기까지 하다. 꾸욱 누른 듯한 눈썹과 모난 곳 없는 눈매, 부산스럽지 않은 체격. 여기서 끝났다면 디오는 그저 매력적인 청년으로 그쳤겠지만 지금의 디오는 머물지 않고 나아간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차분하고 꾸밈없으면서 진중한 성격을 담아,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배우로서 자신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괜찮아, 사랑이야>와 <카트>, 단 두 편으로 보여준 디오의 존재감은 그저 ‘작품을 잘 만나서’, ‘캐릭터가 좋아서’라고 쉽게 단정지울 수 없다. 다음 작품이 나온다면 그 발걸음에 더욱 속도가 붙을 것이다.

 

 

8. 박진영
1972년생 | 가수, 프로듀서, JYP엔터테인먼트 대표 | 1994년 데뷔. <k팝스타 3=””> 심사위원.

 

<k팝 3=””>를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세 사람을 비교하게 된다. 매의 눈으로 상업적 꼭지점을 찾아내는 ‘거상’, 예능식 이미지 메이킹에 통달한 ‘연예인’, 박진영은 거기서 그냥 솔직한 사람이다. 참가자들에게 끊임없이 강조하듯이 ‘자기 느낌’에 빠져서는 말하고, 웃고, 운다. 당연히 그의 언행은 세간의 입방아를 불러 모은다. 하지만 그는 억지로 조심하지 않는다. 박진영은 기획사의 대표이자 프로듀서지만, 무대를 대할 땐 순수하리 만치 머리를 굴리지 않는다. 그건 무대를 내려온 후의 몫. 참가자 중 톱 텐을 뽑는 ‘배틀 오디션’을 진행하면서 그는 참가자들에게 (미안하다면서) 가장 어려운 숙제를 주는 식으로 노래를 골라줬다. 참가자들은 어느 때보다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건 함정이 아니라 통큰 주춧돌처럼 보였다. JYP 소속 가수들이 부진한 양상을 보이는 동안에도 박진영은 황급히 진통제 처방을 내리진 않는다. 그저 지금보다 더 즐거울 다음 과녁을 조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자신 가수로서도 마찬가지. 90년대 주류 무대에서 곧장 데뷔해(‘토토가’에 나온 가수들처럼) 2015년 현재, 그만큼 동시대성을 보여주는 가수가 있을까? 이런 척 저런 척 우습지도 않은 세상에 박진영은 허세가 아니라 여유를 부린다. 드물게 멋있는 엔터테이너다.

 

9. 나얼
1978년생 | 가수 | 1999년 앤썸 1집 <변심>으로 데뷔. 2001년부터 브라운 아이즈, 2003년 부터 브라운 아이드 소울로 활동. 2015년 솔로로 ‘같은 시간 속의 너’ 발표.

 

나얼은 희귀하다. 그런 음색이 희귀하다. 하지만 가수로서 더욱 희귀하다. 그는 항상 이 도시 어딘가에서 만든 노래를 조심스럽게 내놓는다. 무대로 나서서 부르는 일도 흔치 않다. 그는 다만 세상에 음악을 내놓는다,로 존재하는 가수다. 심지어 다른 것은 일절 불필요하거나 거추장스럽다는듯이. 그의 노래는 도시 곳곳을 스민다. 자동차의 속력, 가로등의 조도, 뒷골목의 소음과 함께 섞여도 그만이다. 그는 독야청청 서서 노래하는 대신, 머물고 스치며 풍경을 수놓는다. 누군가는 라디오도 ‘보이는 라디오’가 아니면 무슨 재미냐는 시대지만, 그의 노래는 꼭 라디오를 닮았다. 공간은 그만큼 풍부해진다. 나얼이 작은 무대에서 혼자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어떨까? ‘90년대’라는 말이 축제처럼 난리를 칠 때, 그는 그저 함께 나눈 시절에 관한 노래를, 여행가방을 내려놓듯이 툭 발표했다. 유례 없이 힘차게 부르는 그가 들어 있다. 그 노래를 크게 따라 부른다.

 

10. 황병기
1936년생 | 가야금 연주가, 작곡가 | 1962년 한국 최초의 현대 가야금곡 ‘숲’, 1965년 <침향무>, 1974년 <미궁>, 2014년 <가야금 산조> 발표.

 

보통 악기는 치는 법이 정해져 있다. 곡을 쓸 때도 비슷하다. 오래 쓰인 악기는 용도가 확실하기에, 거기서 나오는 악곡 역시 나름대로 규정화되어 있기 마련. 황병기의 연주와 작곡은 그것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가야금을 처음 배울 때부터 정악과 산조 양쪽을 모두 접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최초의 현대 가야금곡 ‘숲’을 창작했다. 바이올린 활로 가야금을 켜고, 장구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식으로 악기의 이면에 몰두하기도 했다. “옛것만 굳어졌다면 그것은 전통이라기보다 골동품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잘라 말했다. ‘숲’으로 시작해 <침향무>와 <미궁>을 지나 지난해 발표한 <가야금 산조>에 이르기까지, 그에겐 전통을 계승한다는 말보다 전통을 개척한다는 표현이 더 알맞아 보인다. 황병기는 <가야금 산조>의 음반 소개를 직접 썼다. “바흐의 파르티타나 베토벤의 소나타를 감상하듯이 음악 그 자체에 몰두해 관조적으로 감상하기 바란다.” 한편 그는 ‘가야금에 미쳤던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공부나 일의 능률은 그 성취 효과가 놀랍습니다.” 몰두하지 않고 자발적이지 않다면,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에디터
    장우철, 정우성, 손기은, 정우영, 유지성, 양승철
    ILLUSTRATION
    KIM JONG 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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