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GQ다운 남자는 누구일까? <2>

지금 이곳에서 가장 지큐다운 남자는 누굴까? 2001년 <GQ KOREA> 창간 이후, 우리는 항상 이 질문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고는 생각할 때마다 어려워 했다. 젠틀맨을 ‘신사’라 번역하면 그 좁은 테두리가 육박해왔고, ‘GQ맨’이라는 조어엔 어딘지 갈증이 먼저 일었다. 2015년 3월, 우리는 좋아하는, 옹호하고 지지하는, 동시대를 사는 유대감을 나누고픈 남자를 50명(만) 선정했다. 그리고 썼다. 헌사이자 주장으로써.

11. 유승호
1993년생 | 배우 | 2002년 영화 <집으로>, 2012년 드라마 <보고 싶다>, 2014년 12월 전역.

 

카메라가 꺼진 뒤 스타가 어떤 모습인지 대중들은 알지 못하지만, 유승호의 이면에 대해선 크게 의심하지 않는다. 워낙 어린 시절부터 데뷔해, 대중이 함께 키운 듯한 착각이 들어서일까? 그보단 유승호가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옹골찬 모습 때문이다. 현장에서 연기를 이미 배우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기회를 뺏어가며 이름만 걸어놓을 수 없다는 뜻으로 대학 특례입학을 거부했다. 군대도 친구들이 가는 나이에 조용히 다녀왔다. 이 모든 걸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혼자서 오랫동안 고민하고 헤아린 끝에 결정했다. 물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반작용일 수도 있다. 당연한 이야기를 대중이 괜히 과대포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온갖 짐작과 추론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건, 유승호가 보여주는 진실된 얼굴이다. 전역하는 날 부모님과 고양이 두 마리가 보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선 누나 팬들은 물론이고, 전국의 민방위 아저씨까지도 가슴이 울컥 뜨거워졌으리라. 이제 그에겐 좋은 사람이 좋은 연기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일만 남았다. 열 살 남짓에 데뷔해 별별 연기를 다해본 그가 배우로서 어떻게 방점을 찍을지, 부모의 마음으로 기대한다.

 

 

12. 박성진
1990년생 | 모델.

 

모델 박성진을 알 수 있는 단서는 별로 없다. 그가 화보에서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무드를 발산하고 런웨이에서 독야청청 빛나도, 그건 액자 속 박성진일 뿐 어떤 남자인지는 알 길이 없다. 모델스닷컴 랭킹이 높고, 한때 가장 쇼에 많이 선 동양 모델이었다는 것이 그가 누군지 말해주는 걸까? 진짜 박성진이 보인 건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던진 말, TV 프로그램에서 한 말을 조합해보기 시작했을 때다. 무심코 던진 말들도 모두, 박성진의 한가운데를 향하고 있다. 자신의 매력을 묻는 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한다. “자신감. 대부분 동양인 모델들은 밥을 따로 먹거나 맨 뒤에 줄을 서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주변인처럼 겉도는데, 나는 어느 집단에서나 당당해 보이려고 노력했다.” 온스타일의 <스타일 라이브>에서는 이런 말도 한다.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중요해요.”, “제 SNS 사진 솔직히 좀 멋있지 않아요?” 진한 경상도 사투리로 그는 누구보다 멋있는 말을 한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래서 주변 상황에 따라 말을 바꾸지 않는다. 늘 당당하지만 그걸 휘두르지는 않는다. 기름기라고는 없는 바삭한 얼굴로 가식을 탈탈 털고 행동한다. ‘쿨하다’는 말도 그 앞에선 오래돼 보이는, 진짜 선도 좋은 요즘 남자.

 

 

13. 여진구
1997년생 | 아역 배우로 데뷔해 지난 2012년 MBC <해를 품은 달>로 아역상을 받았다. 이듬해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로 각종 영화제의 신인상을 수상했다. 최근작은 <내 심장을 쏴라>.

 

그에게 ‘노안’이라 장난치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또 있을까? 여진구는 소년의 얼굴과 청년의 얼굴을 모두 가진,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지 않은 채 오직 여진구의 얼굴만을 드러내는 배우다. 늘 소년과 청년의 경계를 묻는 건 어른들이고, 여진구는 그때마다 “잘 모르겠어요”라는 말 속에 진짜 답을 숨겼다. 여진구에게 연기는 정말 잘하고 싶은 것일 뿐이지, 나이에 맞게, 단계에 맞게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여진구는 자신이 출연한 ‘청소년 관람 불가’ 영화 <화이>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그는 빛나는 줄도 모르고 빛난다.

 

 

14. 김상중
1965년생 | 1992년 MBC 드라마 <아들과 딸>, 1995년 KBS2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 2008년부터 SBS <그것이 알고싶다> 진행. 2012년 SBS 연예대상 공로상.

 

지금 김상중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그런데 말입니다’가 뜬다. 그가 2008년 이후 지금까지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는 동안 그 말은 좀 진지한 농담이 되었다. “요즘 세상은 피해자보다 가해자의 인권이 더 존중되는 이상한 풍토가 만연해 있지 않나. (중략)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대리만족을 주고 싶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미해결 사건 없이 100퍼센트 다 해결된다.” OCN 범죄 드라마 <나쁜 녀석들> 제작 발표회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역시 좀 진지한 농담처럼 들리는 말, 하지만 마냥 신뢰하고 싶은 그런 말이었다.

15. 천관율
1980년생 | 2008년 9월 <시사IN> 정치팀 기자 | 2014년 11월 <시사IN> 사회팀 기자.

 

“이제 국가 앞에 당당히 선 ‘일베의 청년들’”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었다. 시사주간지 <시사IN> 천관율 기자가 쓴 지난 9월의 커버 스토리였다. 누구나 궁금해했지만 차마 망설였을 주제에 대해, 그는 꼼꼼하게 취재해 정연하게 썼다. 분석의 농도는 그 어떤 기사보다 짙었다. 무엇보다 참 잘 쓴 글이었다. 시사주간지가 마땅히 쓸 수 있고 써야 하는 기사의 정석 같았다. 그날 이후 ‘천관율’이라는 이름으로 기사 검색을 하는 빈도가 늘었다. 어떤 현상이 있고, 누가 그걸 해석해줬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할 때 그 이름으로부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마땅히 기자가 해내야 하는 일, 누구라도 쉽지 않을 일을 그는 참 꾸준히 성실하게 해내고 있다. 신뢰는 그럴 때 쌓이는 법이다.

 

16. 류호진
1980년생 |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프로듀서.

 

<1박2일> 시즌 1이 전성기라면 시즌 2는 위기였고, 류호진 PD가 만드는 시즌 3는 둘 다 아니다. 시즌 1처럼 압도적으로 시청률이 높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시청률 1위를 내주지도 않는다. 아슬아슬하게 꾸준히 1등을 지키면서 가끔씩 1위를 내주는 상황이다. <1박2일> 시즌3의 분위기도 너무 과하지도, 너무 심심하지도 않다. 본래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나영석 PD가 얘기한 방향, “<6시 내 고향> 예능 버전”을 따라갈 뿐이다. 할머니들은 출연자를 자식처럼 여기고, 학생들은 형, 오빠처럼 따른다. 그걸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냥 불편하지 않아서 일요일에 <1박2일>을 틀어놓게 된다. 그가 가끔 TV에 모습을 비칠 때마다, PD가 프로그램과 참 닮은 것 같다.

 

17. 채현국
1935년 | 전 흥국탄광 대표, 현 효암재단 이사장 | 2014년 1월 3일, 한겨레 인터뷰 ‘노인들이 저 모양이라는 걸 잘 봐두어라’.

 

채현국은 자신을 1937년생 일본 사람으로 알았다. 한국은 지식, 기록보다 어른의 말이 진리인 식민지였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어긋난 첫 발짝이 모여 현대사는 종잡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 그 어긋난 첫 발짝으로부터 길을 찾으려면 지금 한 발짝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전국 세금 납부 2위에 올랐던 탄광 경영자가 30대 후반에 주식까지 몽땅 직원들에게 넘기고 떠나는 것은 지금의 한 발짝만이 중요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결단이었다. 어른은 탐욕스럽고, 젠 체하고, 무게 잡는 사람이라는 표본만 보아온 한국 젊은이들은, 그를 보며 오랜만에 어른이 되는 것을 긍정했다. “아비가 되면 늦어요. 아들일 때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안 썩어요. 우리는 살아 있는 순간순간 사는 거예요. 자기 결의와 결단 속에서요.” 어른은 나중에 되는 게 아니라 지금부터 된다. 한국은 더 성장하면 모두 잘살 게 아니라 지금부터 모두 잘살아야 한다.

 

18. 최민수
1962년생 | 배우 | 1994년 영화 <할리우드 키드의 생애>, 1995년 미니시리즈 <모래시계>, 2014년 드라마 <오만과 편견>

 

최민수를 설명하려면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할까? ‘청춘스타’로 불리던 80년대? 온갖 영화와 드라마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90년대? 그가 시달렸던 각종 구설? 최민수는 출생부터 화제였다.데뷔는 1985년이었다. 벌써 30년째 대중에 노출된 채 살아왔다. 하지만 누가 이 남자를 온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어쩌면 지금까지 숱한 오해와 편견으로부터 단 한순간도 자유로웠던 적이 없었는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런 말은 어떨까? “다른 때도 아니고 요즘은 제가 법을 집행하는 검사로 살고 있기 때문에 말이죠. 뭐 잘한 게 있어야 상을 받죠 그죠? 해서 죄송스럽지만 이 수상을 정중히 거부하려고 합니다. 아직도 차가운 바다 깊숙이 갇혀 있는 양심과 희망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나 할까요? 법과 상식이 무너지고 진실과 양심이 박제된 이 시대에 말입니다. 그래도 우리 <오만과 편견>을 끝까지 사랑해주실 거죠, 그죠?” MBC 연기대상 수상을 거부하면서 그가 전한 수상 소감의 일부다. 이후 이어진 몇 번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배우이기 전에 한 사람의 국민이고, 기본을 얘기할 수 있는 것이잖나. 나는 기본을 얘기한 것이다. 그걸 왜 특별하다고 생각하는지….” 기본을 얘기하면 좀 튀는 것 같은 이상한 세상에서, 그는 참 오랫동안 오해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저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 그래서 오해받을 때도 영리하게 굴지 못했던 사람, 그래서 참 귀하고 좋은 사람.

19. 정구호
1965년생 | 패션 디자이너, 아트 디렉터 | 1997년 KUHO 런칭. <정사>, <스캔들>, <황진이> 등의 영화에서 의상과 미술 감독. 2003년 부터 10년 동안 제일모직에서 근무.

 

90년대 말이었다. ‘세기말’이라는 말이 무슨 세포처럼 증식하고 있었다. ‘젊은’ 디자이너 정구호의 첫 쇼는 그때 이태원에서 열렸다. 그 후 정구호는 곧장 극렬한 지지를 받는 이름이 되었다. 한국의 모든 패션지는 그를 다루느라 정신이 없었다. 온갖 일간지 문화면과 도발적인 스트리트 페이퍼까지도 그를 섭렵해야만 했다. 아트 디렉터, 요리사, 카페 오너 같은 특별한 이력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의 옷이 충격적으로 아름다워서였다. 선이 보였고, 이어지듯이 소재가 보였고, 마침내 움직임이 보이는 옷. 온통 회색 모직일 것 같다가도, 미련 없이 내던지듯 겨자색 실크를 드러내는 솔직함. 미니멀 그리고 아방가르드. 하지만 그는 컨셉트에 파묻힌 연출가가 아니었다. 이재용 감독과 합을 맞춘 두 편의 영화(<정사>와 <스캔들>)를 통해 한국 영화 사상 가히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의상을 보여줬고, 현대무용에 대한 사려 깊은 관심으로부터 그가 만든 무용 의상은 정형화된 프레임 자체를 흔들어 놓는 힘이 있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정구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참 많은 ‘아르바이트’를 했다. 2003년부터 10년 동안은 제일모직이라는 대기업에 속한 채로도 여전히 재미있고 새로운 일들을 벌였다. 그리고 지금, 정구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서도 변함 없이 정구호다. 정말로 놀라운 건, 그토록 많은 일들로부터 그의 이름이 함께였지만 한 번도 삿된 테두리에 묶인 적이 없다는 점이다. 정구호는 세기말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젊은’ 이름이다.

 

 

20. 신동엽
1971년생 | 1991년 SBS 특채 개그맨으로 데뷔.
“나의 개그는 한 번도 달라진 적이 없다.” 다시 방송에 복귀한 해 와의 인터뷰에서 그가 한 말이다. 스무 살에 콩트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방송 스타일을 확실히 고수해왔다. 여전히 야외 버라이어티를 싫어하고, 에너지의 폭발 없이 말만 슬쩍 던지고, 가식적인 건 죽어도 싫은 스타일. 복귀 직후 그가 마치 ‘색드립’이라는 새 장르를 열어젖힌 듯 보였지만, 그것이 신동엽의 진짜 가치일까? 색드립 없이도 신동엽은 이렇게 독보적인데? 예상되는 흐름을 깨는 멘트, 뻔한 걸 잡아 비트는 센스야말로 그 너머의 강점이다. 그의 미덕은 오랫동안 자신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자신이 잘하는 걸 알고, 그걸 오랫동안 갈고닦은 사람은 쉽게 꺾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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