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제작자가 사라진다

2015.03.06GQ

1천만 명이 넘는 관객이 든 영화는 ‘떼돈’을 벌었을까? 영화를 직접 ‘제작’한 제작자에겐 먼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 탓에 제작자들이 한국 영화계에서 사라지고 있다.

 

“한국 영화인들이 중국에서도 극장 수익을 6:4(투자배급사:제작자) 비율로 나누느냐고 자꾸 물어보는데, 그 이유를 모르겠다.” 작년에 중국 영화산업을 취재하기 위해 베이징에 일주일 동안 머문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만난 완다萬達의 기획, 개발팀 아비 광 만 카이 팀장이 한 말이다. 완다는 중국 최대 멀티플렉스 체인망을 보유하고 있으며, 현재 강제규 감독과 함께 블록버스터 영화 <투파창궁斗破窓穹>을 기획, 개발하고 있다. 그는 한국 영화인들을 만날 때마다 “중국은 왜 한국처럼 극장 수익의 40퍼센트를 제작자에게 주지 않느냐”는 질문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툴툴거렸다. 중국 영화계에선 극장 수익을 그렇게 배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LeTV’라는 온라인 동영상 사이트와 중국 전역 108개 도시에 1천2백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한 러스잉예 장자오 회장은 “중국에서는 투자자가 곧 제작자다. 할리우드와 마찬가지다. 제작자의 지분은 인건비로 책정되기 때문에 한국처럼 수익을 추가로 지급하진 않는다”고 설명했다. 극장 수익의 40퍼센트를 지급하지 않는다고 해서 계약 조건이 제작자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역으로 제작자가 수익의 60퍼센 트를 챙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매력적인 스토리와 배우 그리고 스타 감독만 세팅할 수 있다면 한국보다 더 유리한 조건의 계약도 가능하다” 는 게 아비 광 만 카이 팀장의 설명이다. 

중국 영화인들이 한국의 극장 수익 배분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극장 수익을 투자배급사와 제작자가 6:4 비율로 나눠 갖는 셈법은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기 때문이다. CJ, 롯데, 쇼박스, NEW 같은 투자배급사와 공동 제작 계약을 맺으면, 제작자는 해당 영화의 극장 수익 중 극장으로 돌아가는 몫(50퍼 센트)을 제외한 금액을 배급 계약에 따라 투자 배급사와 6:4 비율로 배분한다. 그렇게 챙기는 ‘수익의 40퍼센트’가 적은 금액은 아니다. 그럼에도 제작자는 남는 장사가 아니라고 울상이다. 지난해 관객 1천만 명을 돌파한 <변호인>을 제작한 위더스필름 최재원 대표도 “나누고 나니까 남는 돈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다. 다음 영화를 준비할 때까지 운영할 수 있는 돈만 겨우 남았다. 관객이 1천만 명 넘게 들어도 한 해 지 나면 다 똑같다”고 말했다.

최 대표의 말은 엄살이 아니다. 그렇게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는데 몫이 만족스럽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수익의 40퍼센트가 온전히 제작자의 회사로 들어가지 않는 데다가 위험은 위험대로 제작자가 부담하기 때문이다. 투자배급사와 공동 제작 계약을 맺으면 (투자배급사가 직접 배급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지불하는) 배급 수수료를 비롯해 (기획 개발 단계에서 시나 리오를 모니터링해준다는 명목으로 지불하는) 모니터링 수수료, (해외 개봉할 때 배급과 마케팅을 해준다는 명목으로 지불하는) 해외 배급 및 마케팅 수수료, 부가 판권 수수료 등 온갖 수수료를 투자배급사에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영화가 흥행하면 배우와 감독의 러닝 개런티도 투자배급사가 아닌 제작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몇 제작자의 어깨가 자꾸 움츠러드는 건 비단 불합리한 수익 배분으로 인해 몫이 줄어 들기 때문만은 아니다. 투자배급사가 영화 제작에 직접 뛰어든 것도 큰 원인이다. 보통 제작자는 영화의 전 공정을 책임지고 진행하는 사람이다. 영화화할 만한 아이템을 찾아내 시나리오 작가와 함께 개발하고, 시나리오에 맞는 감독과 프로젝트 성격에 적합한 프로듀서를 고용 한 뒤 흥행이 보장된 스타 배우를 캐스팅해 투자배급사의 투자 심사에 올린다. 투자 심사에서 통과되면 이야기를 잘 찍을 만한 스태프들을 꾸려 최대한 효율적으로 촬영과 후반작업을 진행해 완성한다. 흥행하면 떼돈을 버는 게 가능했던 것도 그만큼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많기 때문이다.

돈을 대고, 완성된 영화를 배급만 했던 투자배급사가 2000년 초, 중반 제작자와의 공동 제작 ‘학습’을 통해 제작자가 하는 일을 직접 하기 시작했다. 요즘 투자배급사마다 하나씩 있는 기획 개발팀이 직접 제작의 첨병 역할을 한다. 그곳에서 젊고 재능 있는 프로듀서를 모아 아이템을 기획하고, 그 아이템를 잘 쓸 만한 시나리오 작가를 찾아 개발한다. 제작자를 통하지 않고 감독과 직접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이렇게 계약한 감독 숫자만 해도 회사당 스무 명 안팎. 박찬욱, 봉준호, 강제규, 윤제균, 김용화, 김한민 등 잘나가는 스타 감독들은 자신의 제작사를 차려 투자배급사와 손을 잡았고, 김현석, 황동혁, 이석훈 등 최근 성적이 좋은 감독들도 직접 작품 계약을 맺고 있다. 감독 역시 제작자보다 투자배급사와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제작자와 계약을 하면 인건비 명목으로 감독 개런티만 받을 수 있는 반면, 제작자로서 투자 배급사와 직접 거래를 하면 앞에서 언급한 ‘수 익의 40퍼센트’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해 1천7백만여 명을 불러 모았던 <명량>의 김한민 감독이 다른 제작사에서 감독 계약을 했더라면 1백억원 이상 버는 건 불가능했다. 투자 배급사와 계약은 수익으로 직결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작자는 스타 감독을 잡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어쩔 수 없이 신인 감독 위주로 작업을 할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러나 신인 감독을 키워놓아도 더 나은 조건을 제시 하는 투자배급사에 금방 뺏긴다. 전작이 흥행 해도 수익 배분 과정에서 투자배급사에 이것저것 떼이고 나면 사무실 경상비 정도밖에 남지 않아 원작 판권 구매비, 시나리오 작가 고용비 등 기획 개발 비용을 감당할 여력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제작자는 투자배급사가 기획, 개발한 프로젝트를 대신 제작해주는 제작 대행을 택할 수밖에 없다. 젊은 프로듀서들이 초기 사업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제작사를 차리려는 모험보다 투자배급사의 고용 프로듀서로서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도 그래서다. 한 젊은 프로듀서는 “작품당 평균 6천만원을 인건비로 받으며 여러 작품을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했다. 결국 투자배급사는 자신들이 직접 개발한 프로젝 트를 대신 제작 대행해주거나 프로듀서를 고용해 직접 제작하는 편을 선호하게 된다. 

결국 한국영화산업에서 제작자라는 직업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동대문에 서 옷장사를 하던 차승재가 영화하는 친구들에 이끌려 충무로에 발을 들이게 되고, 자신의 제작사 우노필름과 싸이더스를 차려 봉준호, 장준환, 허진호, 김성수, 유하, 최동훈 등 재능 있는 신인 감독을 발굴해 <봄날은 간다>, <살인의 추억>, <지구를 지켜라>, <말죽거리 잔혹 사>, <범죄의 재구성> 같은 이제껏 보지 못한 한국영화를 만들었다는 신화를 언제 다시 들을 수 있을까. <초록물고기>가 대우와 삼성, 현대, SK 등 대기업 영화사들로부터 외면 당했다 는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제작사로 달려가 제작비 전액을 통장에 넣어주고, 투자가 안 되던 임권택 감독의 <천년학>에 후배 영화인의 도리라는 이유만으로 앞뒤 재지 않고 투자를 결 정한 ‘승부사’ 강우석의 무용담을 후배 제작자들이 다시 재현할 수 있을까? 또 트렌드에 맞는 기획력과 마케팅을 두루 갖춘 제2의 심재명은 다시 나타날 수 있을까?

반면, 최근에 할리우드는 작지만, 창의적인 영화를 화수분처럼 쏟아내고 있다. 그 비결은 제작자의 힘이다. 아카데미에서 제일 중요한 상은 작품상이다. 그 상은 ‘이그젝티브 프로듀서’, 즉 총제작자에게 준다. 감독도 배우도 아닌 제작자가 가장 명예로운 자리에 오르는 것이다. 누구보다 많은 걸 책임지고 결정해온 작품의 선장은 제작자이고, 그에 대한 존경이 할리우드에 언제나 있었다. 그러니까 투자 배급사도 제작자를 신뢰한다. 오래전 고전 영화에서부터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수많은 명작을 제작한 데이비드 셀즈닉이나, <벨벳 골드마인>, <반지의 제왕> 시리즈, <장고 : 분노의 추적자> 등 영화의 장르, 그 자체를 만든 하비 웨인스타인은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화를 만들고 있다. 개성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영화가 어쩌다 한두 편씩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한 해에 몇 편씩 나오려면 제작자 중심의 영화 ‘제작’이 꼭 필요하다.

    김성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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