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와 사회

‘셀카’를 찍는 사람은 따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울 바깥에서 자신을 고정해보고 싶은 사람이 일부일 것 같지는 않다.

부산경찰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흥미로운 소식이 전해졌다. 술집의 다른 테이블에 놓인 스마트폰을 훔쳐간 남성이 체포된 사건이었다. 범인의 덜미를 잡은 단서가 눈에 띄었다. 훔쳐간 스마트폰으로 그는 몇 장의 ‘셀카’를 찍었다. 지난해 있었던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클라우드 계정 해킹 사건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분명했다. 아니 클라우드가 뭔지 모를 수도 있다. 그가 찍은 셀카는 자동으로 클라우드 스토리지에 보내졌고, 주인은 몽타주에 비할 수 없이 정확하게 나온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회사 유니폼을 입고 셀카를 찍은 덕에 검거도 수월했다.

하지만 세상에 별의별 사람 다 있다고 웃어넘기기엔 스마트폰 도둑이 셀카를 찍어서 붙잡힌 사례는 당장 후루룩 검색해봐도 그리 희귀하지 않다. 미시건의 은행 강도가 찍은 셀카,휴스턴의 차량 절취범이 찍은 셀카, 일리노이의한 부티크에서 방금 훔친 장신구를 걸고 찍은 셀카 등등이 얼마든지 나온다. 어쩌면 지금까지 알려진 대로, 셀카(단체 셀카를 제외한 개인 셀카만을 일컫는다. 단체 셀카에는 용기가 필요치 않다.)는 선남선녀들, 혹은 지금 한창 젊은 친구들의 전유물이 아닌 건 아닐까. 셀카는 ‘길티 플레저’에 속해서, 잘 드러나지 않는지 모른다. 남들은 욕하면서 자신은 찍는 것이다. “괜찮아, 나는 SNS에 올리지 않으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간 썩 좋지는 않았던 셀카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 ‘길티 플레저’의 배경을 이룬다. 셀카를 자주 찍는 남성은 사이코패스일 확률이 높다는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과 조사팀의 연구 결과가 타임라인을 휩쓴적이 있다. 연구 결과의 정확성을 떠나, 셀카 찍는 남자는 공공성에 숨어서 욕해도 괜찮은 소재라는 게 명백해졌다. 한편 한국 여자가 셀카찍는 법은 유튜브에서 공공연한 웃음거리였다. 볼을 부풀리고, 손으로 V를 그리고, 턱에 검지를 댄다거나, 힘껏 눈을 감고 찍는, 주변에서 익히 보아왔던 셀카들. 사고 현장, 의료 현장, 포로수용소 등 온갖 부적절한 곳에서 찍은 셀카가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며 뭇매를 맞았던 사례도 여럿 떠오른다.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인 CES 2015에선 난데없는 ‘셀카봉’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셀카봉이 잘 팔려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관심이라도 끌어야 하는 기업 부스에 셀카봉이 설치된 경우가 많아서였다. 인간 욕망의 첨단을 보여주는 가전제품 전시회에서, 당장 사람들을 가장 확실하게 부추기기 위해 기업들이 앞다퉈 내세운 방법이 ‘셀카봉’이었다는 점이 놀라웠다. 술집에 비유하자면, 괜히 일단 카니예 웨스트라도 틀면서 뭘 좀 아는 척할 것 없이 곧장 케이티 페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야말로 당대 ‘길티 플레저’의 헤로인.

<월스트리트저널>은 셀카봉이 아시아를 휩쓸고 미국으로 넘어오는 중이라고 진단했다.(‘셀카봉, 아시아를 정복하고 뒤늦게 CES 강타’, 조나단 정) 셀카봉의 범람에 따라, 미국에서는 벌써 몇 개의 박물관이 강아지와 함께 셀카봉의 출입을 금지했다. 셀카봉을 든 아시아인들이 거리에서, 매체에서 비웃음을 사는 일이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건만.

어떤 ‘길티 플레저’에는 유효기간이 있다. 90년대에 밀리 바닐리를 좋아한다는 건 ‘길티플레저’에 속했지만, 21세기에는 같이 듣고 촌스러워지자면서 널리 알릴 수 있다. 단언까지는 아니라도 짐작해볼 수 있는 건, 셀카는 지금 ‘길티 플레저’의 유효기간를 반으로 나눈다면 그뒤쪽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인스타그램에서 발견되는 셀카의 저변이 넓어졌다. 인스타그램은 셀카에 최적화된 SNS다. 즉, 지금껏 수많은 사람을 만나온 대기업 홍보담당자보다, 그냥 예쁜 여자애의 팔로워 수가 훨씬 많다. 예쁘고 몸매가 좋은 게 이만한 재능인 공간도 없다. 그들은 무기처럼 셀카를 사용한다. 자신의 재능을 꽃피우는 도구이면서, 검객들이 “검으로 이미 많은 말을 나눴다”고 읊조리듯이 그것을 매개로 소통한다. 내가 올린 셀카에 다른 사람이 “존예”라고 반응하는 댓글로부터, 서로를 확인한다.

 

그러나 이제는 셀카가 많은 사람에게 확대되고 일상화되면서 셀카 하나 올라와있지 않은 계정이 좀 의아할 정도다. 얼굴에 무슨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고약한 의심마저 든다. 셀카를 찍느냐 안 찍느냐의 차원을 넘어 셀카의 수준이 심한가 적절한가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 앞으로 셀카의 ‘길티 플레저’는 공공연히 약화되어 갈 것이다. 셀카를 대체할 새로운 형식이 나타날 수도 있다. 셀카는 이전에 폴라로이드 카메라였으며, 카메라의 셀프타이머였다. 디지털 카메라가, 스마트폰이 셀카의 전기를 한 번씩 열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현재 각광받는 콤팩트 디지털 카메라의 플립LCD를 셀카봉처럼 연장할 수 있다거나 빼내서 리모컨으로 조작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그리고 이 모든 시도는 생각지도 못한 파생효과를 낳을 것이다. 그러나 셀카라는 형식이 사라질지언정, 거울 밖으로 자신을 끄집어내 고정하고자 하는 욕망은 끝나지 않는다.

비록 특별한 재능을 가진 소수만이 가능했으나, 자신을 기록하려는 욕망은 자화상을 통해 오래전부터 실현돼왔다. 그러나 자화상은 경제적이지 못한 형식이었다. 예로부터 화가는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꾸렸다. 그에 비하면 자화상은 돈이 되지 않았으며,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어려운 분야였다. 그럼에도 화가들은 자화상을그렸다.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자신을 그려오면서, 한 사람이 평생에 걸쳐 굴절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 렘브란트가 좋은 예다. 대개 자화상은 자기애를 보여주는 것으로 설명되지만, 자신을 그토록 바라보면서 자신에 대해 묻지 않는 것, 자신에 대해 물으면서 고독해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어려워 보인다. 자화상은 그 고독속에서 “그가 자신에 대해 느끼고 상상하고 믿었던 것이 무엇이며 그 가운데 무엇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진실의 요체(< 화가의 얼굴, 자화상 >로라 커밍)”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의 <관상론>을 비롯한 수많은 고전들의 주장은, 얼굴의 운명은 몰라도, 셀카 혹은 자화상으로 운명을 알아보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셀카와 자화상에는 자신이라기보단 자신이 선택한 자신이 있다. 물론 셀카와 자화상의 차이 또한 뚜렷하다. 셀카가 어떤 습속에 자신을 놓는다면, 자화상은 관찰로 자신을 구성한다. 셀카는 가능한 만큼 왜곡 할 수 있다면 자화상은 가능한 만큼 모사하고자 한다. 무엇보다 셀카가 타인의 인정을 전제로 성립된다면, 자화상은 자기 내면의 거울이기를 바란다.

지난해 아우슈비츠 수용소 앞에서 활짝 웃으면서 찍은 한 미국 10대 소녀의 셀카가 사람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켰다. 그녀는 그 사진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헌정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해명이 나간 뒤에도, 논쟁은 사그라들기는커녕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든 그라운드 제로든 웃으면서 사진을 찍은 건 이 소녀만이 아니라며 증거사진을 내놓고, 그것은 관광객의 반사적인행동일 수 있다는 의견을 개진하며 그녀를 지지하는 쪽도 있었다. 하지만 해명의 진실성이나 소녀의 셀카에 담긴 맥락을 떠나 그녀가 트위터로 남긴 한마디가 문제를 다른 쪽으로 불붙였다. “난 이제 유명해!”

이 사건 전체가 타인의 인정에 방점이 찍히면서 셀카가 왜곡돼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면 지나칠까. 셀카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사람은 순수한 자기 자신이지 않다. 공적인 자신과 그 나머지의 자신으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공적인 자신에게 명성이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좀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명성에는 교환가치가 성립한다. 셀카는 자화상이 아닌 초상화에 가까워진다. 돈으로 바꾸지 않으면 쓸모없는 물건이 된다. 셀카와 자화상은 자기 자신을 선택하지만, 초상화는 자기 자신을 선택할 수 없다.

셀카는 뻔한 클리셰로 가득한 유행가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즐길 수 있고, 심연은 바랄수도 없으며, 노래를 듣고 행복해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끝난다. 유행가를 먼저 들어봐야, 계속 유행가를 택하든, 록이나 재즈를 택하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주변에 꽤나 심각한 시각적 청각적 공해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셀카가 좀 많기는 하다. 그들을 차단하는 방법은 이미 얘기했다. 일단 그의 자리에 당신의 스마트폰을 떨어뜨려놓으면서 시작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