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지금, 저널리즘을 다시 말해야 하는 이유

2015.03.13GQ

형편없다. 땅에 떨어졌다. 너무 많다. 이게 다 언론 얘기다. 그런데 그게 다일까? 정말 그렇게 생각해도 될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일 수 있다. “여러분 부장도 인간이야. 걔 안 되겠더라…. 지가 죽는 것도 몰라요. 지가 어떻게 죽는지도 몰라요.” 지난 1월 27일, 이완구 국무총리가 네 명의 기자와 김치찌개를 먹으면서 한 말이다. 당시는 후보자 신분이었다. 도와줄 테니 도와달라는 말이었다. 이런 말도 했다. “그렇지 않소, 세상사가.”

< 한국일보 > 기자는 녹취록을 새정치민주연합 김경협 의원실에 넘겼다. 파일은 KBS로 넘어갔다. KBS는 이 발언을 2월 6일에 보도했다. 이후는 더 참담했다. < 한국일보 >는 2월 10일자 1면에 사고를 내고 이렇게 썼다. “본보는 이번 사태가 취재 윤리에 반하는 중대 사안이라고 보고 관련자들에게 엄중 책임을 묻는 한 편, 재발 방지를 위한 근본 대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본보 구성원 모두 깊이 책임을 통감하고 있으며, 중도가치를 지향하는 정론지로서의 본분을 새기는 계기로 삼고자 합니다.” 2월 10일은 청문회 하루 전이었다.

청문회에서, 이완구 국무총리는 녹취록에 담긴 얘기를 부인했다. 이렇게 말했다. “제 정치적 소신, 인격 그리고 제 나름대로의 모든 걸 걸고 그렇게 얘기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녹취록이 있으면 공개해주십시오.” 그래서 공개했다. 오후엔 사과했다. “실수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의 언론관과 언론사의 취재 윤리가 도마에 오르는 과정이었다. 13개 언론, 시민단체는 당시 이완구 후보자를 고발했다. 한 대학생 단체는 녹취록을 전달한 < 한국일보 > 기자를 고발했다.

언론계와 정치권이 같이 바빴던 며칠이었다. 녹취록은 양쪽의 치부를 다 드러냈다. 그런데 익숙한 치부였다. 충격적이었지만 새롭진 않았다. 아팠지만 새 상처가 아니었다. 오래된 흉터나 문신을 다시 본 것 같았다. 누군가는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이완구 국무총리의 말처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소, 세상사가?”

몇 번이나 바닥을 쳤다. 이제는 신뢰를 말 할 수 있는 시기도 지난 것 같았다. ‘기레기’라는 말도 익숙해졌다. 그마저도 비판의 언어 같지 않다. 자조의 언어가 된 것 같다.

가깝게는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 이후일 것이다. 4월 16일 이후의 언론은 분명한 의심의 대상이 됐다. 영종대교에서 106종 추돌사고가 난 날 아침도 숫자가 춤을 췄다. 추돌한 자동차 숫자, 사상자 숫자가 계속 바뀌었다. “저거 지금 봐야 아무 소용 없어. 이따 저녁에 한 번 보는 게 낫지.” 식당에서 생방송으로 현장 소식을 전하던 뉴스를 보고 있을 때, 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었던 남자가 말했다. 계속 숫자를 바꾸던 뉴스 채널은 곧 현장에 파견된 기자를 연결 했다. 부서진 자동차 엔진룸에서 아직 김이 올라오고 있었다.

언론의 위기를 말하는 건 이제 고약한 습관 같다. 한 시사주간지 김상혁 기자(가명)는 이렇게 말했다. “기자들의 자존심이 왜 그렇게 떨어졌나? 이완구 청문회를 본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죠. 그런데 자존심도 진입장벽이 있을 때 얘기예요. 게이트키핑 역할을 제대로 할 때. 지금은 엄청난 초과공급이 있죠. 진입장벽이 낮아요. 게임의 룰이 바뀌었고, 그걸 나쁘게만 볼 수도 없어요.” 자존심이야말로 기자의 근간이 었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다르다. 그런 기자들이 없다는 게 아니다. 좋은 기자도 별로인 기자도, 다만 너무 많다. 김상혁 기자가 말을 이었다. “진입장벽이 낮아진다는 건 또한 자존심 없는 기자들, 기레기가 생산되는 과정이기도 하죠. 그런데 어디든 시장이 넓어지고 진입장벽이 낮아지면 베스트와 워스트가 같이 늘어납니다. 기자가 총리 후보한테 ‘갑질’할 수 있는 상황도 정상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언론이 나빠지고만 있느냐? 저는 잘 모르겠어요. 좋은 흐름과 나쁜 흐름이 다 있죠.” < 경향신문 > 정상국(가명)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24시간 뉴스를 공급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죠. 사명감이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기자라고 꼭 사명감에 불타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도 물론 있지만 그건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죠.” 

복합적인 얘기다. 당시 총리 후보의 녹취록을 둘러싼 논란만으로 정리할 수 있는 얘기도 아니다. 언론은 급격히 팽창했고 서서히 무너지다 갑자기 주저앉은 것 같았다.

산업부엔 참사에 가까운 기사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올라온다. 자동차 홍보 대행사에서 관리하는 매체만 5백여 개다. 대행사가 작성한 보도자료는 그대로 기사가 된다. 어떤 언론사 홈페이지에는 광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어서 기사를 못 읽는다. 배너 광고를 클릭할 확률은 0.04퍼센트에 불과한데도. 한 방송사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경찰서에서 피의자 스케치하면 4군데였어요. MBC, KBS, SBS, YTN. 지금은 카메라 9개가 돌아가요. 요즘 홍보하는 분들 만나면 ‘어차피 기자도 우리 자료 그대로 싣는데, 그냥 우리가 매체 하나 차리는 게 낫다’고 그래요.”

한편, 이 모든 건 급격히 팽창한 외연에서 벌어지는 일이기도 하다. 중심은 의외로 고요한 채 나름의 진화가 이뤄지고 있다는 뜻이다. < 경향신문 > 정상국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언론은 위기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요. 그래서 요즘 말하는 언론의 위기, 신뢰도 하락이라는 말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 < 한겨레 >가 예전 같지 않다는 얘기 많이들 하잖아요? 그건 자기가 생각했을 때 조져야 하는데 < 한겨레 >가 조지지 않았다. 그런 뜻이에요. 하지만 언론사의 기조라는 게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아요. 수용자 변화가 더 빠르죠.” 

사실 언론의 진짜 도전은 바닥을 찍은 신뢰도가 아니라 적응의 문제일 수 있다. 너무 많은 매체가 웹과 모바일을 기반으로 새로 생겼다. ‘어뷰징’은 그래서 생긴 부작용이었다. 신뢰는 무너졌고 피로도는 쌓였다. 하지만 그때 잘 했던 언론사는 지금도 있다. 좋은 기사를 쓰는 기자도 여전히 있다. 이런 기사는 SNS에서 스스로 생명력을 얻는다. 요즘 영향력은 그렇게 생긴다. 정상국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 경향 신문 > 페이스북 페이지를 구독하는 사람이 22 만 명이에요. 주요 매체 중 1등이에요. 4년 전부터 기자들이 돌아가면서 페이스북을 담당하고 있어요. 그 일에 기자를 박아둔 것도 우리가 처음이었어요. 우리는 어뷰징을 안 해요. 대신 주제를 뽑아서 전달하고 이것이 중요한 기사라고 SNS에서 꽂아주는 일을 기자가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퀄리티가 나오는 거예요. 독자는 압니다. 그런 게이트키핑은 기자만 할 수 있어요.” 그가 이어 말했다. “지금은 과도기예요. 그래서 독자가 원하는 것과 매체가 하고 있는 일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언론의 기능은 똑같아요, 예나 지금이나.” 

인터넷, 모바일, SNS라고 좋은 기자와 좋은 기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진짜 기자의 힘, 좋은 글을 알아듣게 쓸 수 있는 힘은 오히려 귀해지고 있다. 여전히 껄끄러운 영역은 결국 정치일 것이다.

JTBC < 뉴스룸 >의 손석희 앵커는 2월 6일 앵커 브리핑에서 두 가지 단어를 말했다. 위스키와 캐시(현금). 권력자가 언론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그는 “언론은 정부가 연주하는 피아노가 돼야 한다”는 요제프 괴벨스의 말을 인용했다. 언론은 늘 견제와 핍박, 회유의 대상이었다. 정권이 얼마나 노골적이냐에 따라 그 목소리에 호응하는 데스크와 기자들은 늘 있었다. 그렇지 않은 기자도 항상 있었다.

요 몇 년 적지 않은 기자가 직업을 잃었다. < 뉴스타파 >는 그래서 생겼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감시라면 이들의 서슬이야말로 시퍼렇다. 한쪽이 노골적일수록 다른 한쪽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아지는 법이다. 미디어의 외양이 팽창했다는 건 시덥잖은 기사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좋은 기사를 접할 수 있는 루트가 다양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언론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고집이 만만치 않기도 하고, 그렇게 쉽게 변해선 안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걸 두고 느리네, 뒤쳐졌네 보챌 필요는 없어 보인다. 좋은 기사, 좋은 기자는 지금도 있다. 그들은 죽인다고 죽는 사람들이 아니다. 세상사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뜻이다.

    에디터
    정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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