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사이

우리는 친구였다. 섹스를 하고 나서도 그렇다.

 

실수였을까? 친구, 그러니까 잘 아는 여자가 옆에 누워 있다. 이럴 가능성을 열어두고 만난 것도 아닌데. 그랬으면 두세 번쯤 만나고 나서 어떤 식으로든 본심을 드러냈겠지. 아니, 어쩌면 가능성이란 언제나 열려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가 단둘이 남게 되는 순간이라면. 그렇다면 너와 나, 둘 다에게 실수였을까? 모를 일이다. 물어보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구질구질하게 “오늘 있었던 일은 없었던 일로 하자”거나 “너무 많이 취했었다”는 식의 얘길 하며 몹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여자는 없었다. 그저 다음 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헤어졌다. 당연히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다. 가끔 남자는 섹스 횟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여자와의 섹스같이 한심한 걸 자랑삼기도 하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와의 우정이 끝나는 건 아니다. 비밀로 하자는 얘길 따로 한 적이 없어도, 그런 걸 떠벌리고 다니는 실망스러운 친구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그런데 그녀도 자기 혼자만 알고 있을까? 역시나 알 수 없는 일.

둘이 다시 만났을 때, 그날 밤에 대해 얘기한 적도 거의 없다. 하지만 가끔, 아니 자주 생각난다. 이름조차 쉽게 잊는 여자들과의 밤과 다르게 그렇다. 다시 그럴 일이 없을까? 장담할 순 없다. 어쨌든 매력적이니까 친구가 된 거 아닌가? 오히려 만날 때마다 전에 없던 약간의 긴장이 생긴다. 긍정적인 쪽으로.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는 아닌 것 같고, 그러면 “연인도 아닌 그렇게 친구도 아닌” 뭐 그런 건가? 아무렴 좋다.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건 결국 둘 사이의 긴장이 허물어졌을 때일 것이다. 한쪽이 한쪽을 압도해 관계의 균형이 사라지든, 단순히 서로 흥미를 잃든. 

무엇보다 자꾸 그 밤을 떠올리게 되는 건, 그 하루가 무척 자연스러웠기 때문일지도. 작정하고 나간 밤의 어설픈 전략, 노림수, 떠보기 같은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다못해 소개팅을 할 때도 약간의 기대 정도는 하고 나가기 마련인데. 그날만큼은 ‘필살기’ 같은 옷을 입고 나가지도 않았고, 나가기 전에 집을 제대로 치워놓지도 않았으며, 술 마실 때 이러다 발기가 1백 퍼센트 안 되면 어쩌나 하는 우스운 걱정 같은 걸 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온 갑작스러운 흥분은 그 모든 걸 이겨버리곤 했다. 그런 사이가 늘어난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서로의 벗은 몸을 본 이성 친구. 좀 더 짓궂게 말하자면, 마주 보고 앉아 있을 때 알몸을 떠올릴 수 있는 친구. 그러면서 여전히 만나면 애인은 안 생겼냐고 묻고, 며칠 전에 새롭게 알게 된 여자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얘기한다. 동성보단 이성끼리 했을 때 더 재미있는 얘기. 내 몸, 아니 내 섹스 체위까지 알고 있는 그녀의 조언은 좀 더 정확하고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내 방에 뭐가 있는지, 속옷으로 뭘 입는지 정도는 확실히 좋은 ‘레퍼런스’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덜컥 섹스를 하기 직전엔 좀 겁이 나기도 했다. 친구와 서먹해지는 건 아닐지. 그런데 거기서 멈추지 않은 건 친구를 잃어도 그만이라는 맘보단, 잃지 않을 것 같다는 믿음에 가까웠던 것 같다. 적어도 섹스를 하고 돌아서서 후회하거나 누구를 원망하는 대신, 자기 선택에 대한 확신이 있는 여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게 충동적일지라도. 좀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이다. 일은 어쨌든 순식간에 벌어졌고, 딱 몇 시간 동안 둘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궁금하다. 그녀를 포함해서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았으니 추측조차 하기 어려운 일. 과연 내 옆에서 자기 전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집에 돌아가는 길엔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을까, 직후의 만남에선 혹시나 하는 맘을 가졌을까 등등. 

그렇게 우리는 여전히 친구 사이로 남아 있다. 좀 추우면 팔짱 정도는 끼기도 하고, 늦은 밤엔 집에 데려다줄 때도 있다. 어쩌면 이런 관계는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냐”는 말에 대한 나름의 대답이 될 수도 있을까? 물론 섹스 파트너,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프렌즈 위드 베네핏’ 같은 것과는 완전히 다른 관계. 친구인 채로, 곧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자연스럽고 좀 팽팽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