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시 – 시인 김사인

시인 김사인의 신작 <어린 당나귀 곁에서>가 나왔다. 1981년 등단해 이번이 겨우 세 번째 시집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숫자로는 드러나지 않는, 시간으로도 가늠할 수 없는 시의 주름살이 있었다.

매체는 숫자를 좋아하죠. 신작 <어린 당나귀 곁에서>를 다룬 기사에는 ‘무려 9년 만’이라는 수식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전작인 <가만히 좋아하는>이 19년 만이었던 것에 비하면 짧지만, 10년도 만만한 시간은 아닌 거죠. 시집이나 책이 나오는 리듬과 속도가 있어요. 우리 문단의 경우 대개 4~5년을 넘지 않아요. 제가 구식이어서 그럴 거예요. 시건방진 말일 수도 있는데, 저는 10년에 하나쯤 내는 게 적절하지 않나? 속으로 생각해요. 게으름을 피운 것도 아니고, 끙끙대면서 해도 이쯤인 거니까. 

시는 계속 쓰시겠지만, 그와 달리 시집을 내야겠다는 감각은 다를 것 같아요. 제가 참 좋아하고, 극약 같은 시를 쓰는 걸로 알려진 서정춘 선생님은 등단하고 30년 만에 첫 시집을 냈어요. 서른 편이 담겼고요. 시에 대해 그 정도의 헌신과 결벽, 구도자적인 자세를 가진 분이에요. 다른 사람도 그래야 한다고 요구할 수는 없지만, 저는 그런 분이 있다는 게 좋아요. 시집을 내야겠다고 의식해본 적은 없어요. 오히려 안 내고 넘어갈 수 있다면 안 내고 싶죠. 미안하고 떳떳지 못하니까요. 저뿐 아니라 창작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마음속 깊이엔 그런 마음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한번 정리해서 남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잖아요. 그래야 다른 단계가 시작될 테고요. 있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냥 놔두면 밍그적대다가 안 내기 쉬워요. 첫 시집인 <밤에 쓰는 편지>는 청사출판사 시인선에서 3~4번째로 간행될 예정이었어요. 근데 20번이 넘도록 원고를 안 주니까 편집장이 와서 설득했죠. 아버지 회갑 때였거든요? 땡전 한 푼 없는 실업자가 아버지께 뭘 해드릴 거냐고 시집밖에 없다면서 원고를 뺏어갔어요. 하하. 뭐 그런 일이 있으면 모를까. 

첫 시집인 <밤에 쓰는 편지> 개정판에 시인 이문재가 “김사인은 게으르다”고 쓴 대목이 있어요. “지극함과 완전주의의 발로로서 게으르다”고요. ‘게으르다’는 표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청탁을 받을 때는 할 만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탈고를 못해요. ‘땡’ 소리가, ‘탁’ 하고 맞는 소리가 안 나요. 제가 출판사의 공적이에요. 거절하기 난처한 원고는, 발문이나 해설을 김사인한테 맡기면 자연스럽게 정리된다는 말이 있어요. 2년이고, 3년이고 원고가 안 들어오니까. 하하. 예쁘게 봐주면 완전주의인데, 사실 아주 혹독한 욕심이죠. 좋은 거라고 할 수 없어요. 세상에 모든 좋은 일을 다 내가 해야 된다는 욕심과 다를 바 없다고도 생각해요. 

<밤에 쓰는 편지> 개정판은 일부 덜어내고 꽤 수정해서 낸 걸로 알아요. 20년 전에 쓴 시집을 고쳐서 내는 사람이 게으른 사람인 것 같지는 않아요. 다른 사람들의 ‘게으르다’는 말을 수긍하진 않았어요. 원고를 못 냈으니까, 지은 죄가 있으니까 듣고 있었던 거죠. 원고를 펑크 내기까지 두 다리 뻗고 잤는가 하면 그건 아니었거든요. 게을러서 그렇다고 하면 정말 그런 듯이 실실 웃고 말았지만 속으로는 피가 났죠. 

<가만히 좋아하는>부터 알게 된 독자라면, <밤에 쓰는 편지>가 나왔던 그 즈음의 당신과 쉽게 연결짓지 못할 것 같아요. 정치적으로 가장 급진적인 쪽에 계셨죠. <노동해방문학>의 발행인이었죠. 제목만 들어도 놀랄 거예요, 아마. 하하.

그 겸손하고 깨끗한 시들을 읽으면 누구든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뭔가를 앞장서서 했다기보다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 닥쳤을 때 물러서지 못한 것 아니었나요? 미안해서 거절을 잘 못해요. 친구들은 그런 얘기도 해요. 동작이 느려서 빨리빨리 도망을 못 간다고. 하하. 주도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민첩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전 남들이 도망 안 가고 있으면 미안해서 쭈뼛거리고 서있었거든요. 앞장서지 않았을 것 같다는 짐작이 맞아요. 제 그런 면이 저를 오랫동안 애먹였죠.

긴급조치, 개헌, 국보법 위반으로 세 차례 감옥에 다녀왔고, 2년간 수배생활도 했어요. 애먹은 정도가 아니죠. <노동해방문학> 발행인으로 구속돼서 검찰에 이첩이 됐는데, 검사가 제 이력만 가지고 물건 하나 들어온다고 잔뜩 벼르고 있었나 봐요. 그런데 비리비리하고 말도 잘 못하는 애가 들어오잖아요? 하하. 김이 샌 것 같아요. 자기가 기대하던 느낌과 너무 다르다고,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어요.

그 시절에 생각한 시와 지금 생각하는 시는 다른가요? 아뇨,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요. <밤에 쓰는 편지>의 어딘가에 쓴 것 같은데, 사랑과 노동이, 또 노동과 아름다움이, 어떤 수준에서건 통합된 시, 내 시가 그런 시이기를 바랐어요. 예나 지금이나 삶만이 아니라, 시도 밥값을 하는 노릇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초보적인 윤리감각이죠. 전 아주 깊은 충청도 산골 출신인데요, 국민학교 동기가 남자 한 반, 여자 한 반 1백 명 정도고, 중학교에 진학한 건 열 명도 안 돼요. 나머지는 전부 공장에 가거나, 식모살이를 하거나, 농사를 지었죠. 대학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내가 열심히 공부해서 잘됐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나만 요행히 줄을 타고 빠져나온 거였어요. 그걸 느끼고부터는 그전까지 내가 시라고 여기면서 쓴 시들이 용서가 안 됐어요. 마음속에 깊은 부채감이 있었죠. 막연하게 민중이 아니라 바로 내 고향 사람들이라는 실감이었어요. 내가 그들의 언론기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됐어요. 그 국민학교에서 서울대학교를 간 사람은 30~40년 동안 내가 유일해요. 운명적이었어요. 그들의 삶에 대해 내가 밥값을 한다는 것이.

하지만 지금의 시들에선 ‘민중’으로 드러나지 않죠. 지금도 큰 줄기가 다르진 않아요. 다만 그 밥값이라는 게, 두 번째 시집 <가만히 좋아하는>을 낸 이후에, 내 옷을 만들고 내가 밥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모든 민중뿐만 아니라, 모든 타자, 삼라만상으로 넓어졌다면 넓어졌을까. 좁은 의미의 민중에 대한 부채감에서는 조금 자유로워졌는지도 모르겠어요.

장석주 선생이 <나는 문학이다>라는, 한국 문인 111명을 통해 한국문학사를 정리한 두꺼운 책을 냈을 때 인터뷰한 적이 있어요. 그때 선생에 대해 이렇게 물었죠. 단 두 권의 시집뿐인데, 여기에 실린 다른 문인들에 비해 보여준 게 너무 없지 않은지. 장석주 선생의 답변이 기억나는데요. 김사인의 <가만히 좋아하는>을 보면, 시를 쓰고 있지 않을 때도 시를 써왔던 것처럼 보인다고 했죠. 그렇게 잘 봐주는 사람이 있어서 먹고사는 거죠. 하하. 실은 나를 견디고 지속시키는 존재 형식으로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시예요. 그것밖에 없어요. 오래 품고 끙끙 앓으면서 견디는 것. 빨리 딱지가 앉게 해서 피를 그치는 게 아니라 피 흘리는 상태로 사는 것. 둔한 나로서는, 달팽이나 지렁이처럼 견디면서 그렇게 가는 도리밖에 없어요.

정치범으로 여러 가지 고초를 겪는 중에도 스스로 시인이라고 생각했나요? 아니요, 그땐 시인으로 규정하지 못했어요. 내가 지금까지 살아남아서 세 번째 시집을 내게 되리라고 생각지 못했거든요. 그때는 그냥 꼭 필요한 일에 나를 지불하고 싶었어요. 시를 위해서가 아니라, 조금이라도 살 만한 세상이 되도록 거드는 데 내가 지불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창작자의 삶에는 병적인 부분이 있죠. 자신의 고통을 창작을 위한 통과의례처럼 여긴다거나, 타인의 불행을 불행이 아닌 소재로 받아들인다거나 하는 거요. 어쩌면 필요한 태도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가만히 좋아하는>을 낼 때까지 그래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시집 원고 한 권 분량을 통째로 잃어버렸을 때도 사실 그렇게 아깝지 않았어요. 지금 세상이 이 모양인데….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어요.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니 무릎이 푹 꺾이면서 그게 아니었나 싶긴 했는데.

그렇다면 원고를 잃어버리고, 수배까지 걸린 와중에도 계속 시를 쓴 건 뭐였을까요? 할 수 있는 게 뭔가 끄적거리는 것밖에 없었어요. 말하자면 저한테는 두 가지 압력이 있었죠. 사회적으로 소거된 상태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나를 드러낼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보고 싶은 사람들일수록 만나면 안 됐어요. 만나는 순간 끝이니까. 그런 가운데, 죽음을 경험해요. 서서히 잊히는 거죠. 물론 많은 친구가 도와줬지만, 결국엔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가요. 내가 빠진 자리가 서서히 채워지고 나 없이도 잘 돌아가는 걸 속수무책으로 보고요. 또 하나는 기록을 남기는 일에 대한 강렬한 공포예요. 그 시절에 잡혀가서 취조 받고, 가택수색을 당해본 사람은 알 거예요. 내가 쓴 일기장조차도 추궁의 자료가 되고 나면 적어서 남기는 일에 대한 공포가 생기고 아주 오래 지속돼요. 내가 글을 많이 못 쓰는 것에 대한 핑계를 찾자면 이것도 뺄 수 없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이나 심적 상태, 내가 만난 누군가, 이 모든 것에 대한 기록이 남들은 물론이고 내 자신을 치는 경험이요.

그렇지 않을 수 없었겠죠. 예, 하여튼 그 두 가지 압력 사이에 있었어요. 그래서 메모만 많이 남겼을 뿐이지, 완성된 시는 없었어요. 비명 지르듯이 쓴 거지, 시로 만들어서 발표해야겠단 생각을 못했어요. 메모인 채로 오랫동안 두었고요. 모든 예술하는 사람들의 딜레마일 텐데, 시를 의식하고 쓴 게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어요. 하지만 시를 쓰려던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의 절실함과 진실함은 더 묻어있을 지도 몰라요. <가만히 좋아하는>의 상당수 시가 그래요. 그 시집 엮으면서 저는 피눈물이 났어요. 그 시집에 묻어있는 세월이…. 그러니까 그 시집이 참 좋다, 언제 이런 시를 썼냐고 해도, 그 시집을 이루고 있는 내 생애의 그 뭐라 말할 수 없는 착잡함 때문에….

좋다, 나쁘다는 말은 부차적인 거죠. 네, 그 시집에 맞는 형용어가 아니라고 한쪽으로는 생각했죠. 하지만 그건 내 몫의 생각인 거고요.

세 권의 시집에서 일관된 건데, 시도 시지만 이 시인의 자연스러운 선함을 보게 된달까요, 시인이 너무 선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달까요. 오늘 얘기를 듣고 보니 좀 더 복잡해졌지만요. 그래서 어쩌면 <가만히 좋아하는> 이전의 시집 원고들이 없어진 게 잘됐다고 생각해요. 정말 드센, 불의한 것들에 대한 적개심, 증오의 목소리가 있었거든요. <가만히 좋아하는>을 쓰기까지의 시간 동안, 미움과 증오가 내 안에서 어떤 형태로건 지양극복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92년이니까 안기부가 남산에 있을 땐데, 조사를 받으면서도 거기 조사관들이 그렇게 밉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안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잠깐 성인 비슷하게 됐는지, 그래서 그 사람들도 나한테 사납게 안 했어요. 나중에 그 사람들이 문단으로 김사인이라는 자식 웃기던데? 그게 그 자식의 진면목 맞아? 고단수의 의뭉 아니야? 하고 물어봤다더라고요. 하하.

그 선함이 잘 보이는 부분이 낮은 데 있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의 비루한 일상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는, 세 권의 시집에서 빠지지 않는 시편들이에요. 시인의 시선을 아주 잘 알겠는 시들이요. 모든 존재하는 것들, 우주 안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이 사소한 것들에 대한 내 나름의 참배예요. 제가 한때 섬김이라는 말 쓰기도 좋아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한의 극진함일 거예요. 저는 그걸 시로도, 종교 행위로도, 제가 할 수 있는 혁명으로도 삼았어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시잖아요. 지금 젊은이들은 ‘역사상 가장 불쌍한 세대’라고 불리죠. <어린 당나귀 곁에서>의 ‘졸업’ 같은 시가 참 귀여웠던 한편, 요즘 젊은이들이 말하는 ‘자발적 가난’ 같은 게 생각나기도 했어요. 젊은 제자들과 후배들에 대해, 선생의 입장에서 참 안타깝고 힘든 느낌이 그 시에 들어 있어요. 학생 중에 한 명이 호그와트로 진학하겠다는 농담을 했을 때, 선생이자 어른으로서 마음이 아팠죠. 내가 뭘 했건 간에, 기성세대로서 세상을 이렇게밖에 못 이룬 것에 대해 미안한 거예요. 이건 다 조선일보와 전두환 때문이야, 새누리당이 이렇게 만들어놓은 거야, 이런 건 말이 안 돼요. 꾸역꾸역 지렁이처럼 배밀이로 가더라도, 살아 있는 동안 조금이라도 때워야 할 데를 때워놓는 일을 나를 비롯한 어른들이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게 대단히 훌륭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어른 노릇을 할 길이 뭐가 있어요?

전통적인 서정시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조차도, 선생의 시에 대해선 좀 다른 평가를 내리는 부분이, 어른으로서 자신이 본 걸 가르치려는 태도와 굉장히 달라서라고 생각해요. 첫 시집에 그나마 남성적인 어조가 있었다면, <가만히 좋아하는>은 여성적으로 느껴졌는데, 이번 시집은 아이의 시선처럼 천진하게 읽혀요. 이 안에 어른들이 많이 할 법한 청승이나 능청이 없는 게 아닌데, 징그럽게 보이지 않아요. 제가 참 좋아하고 가까이 하는 채현국 선생도 자기는 잘난 사람이 아니다, 겨우 하는 거다, 라고 말하죠. 물론 나대로 용을 안 쓴 건 아니지만 그 결과 간신히 덜 더러워졌는지는 몰라도, 이게 대단히 훌륭할 건 없다고요. 그 비슷한 심정이에요. 나름대로 애를 안 썼을 리는 없겠죠. 하지만 나름대로 애 안 쓰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조금 덜 탁해 보일 수 있을지는 몰라도, 훌륭해 보인다고 하면 진땀 나는 거죠.

지금 너무 부끄러워하시는 게 보이네요. 하하, 네. 이건 겸양의 말이 아니에요. 사실을 말하는 거예요. 어떨 땐 이렇게 생각해요. 겨우 요만큼의 삶과 시와 예술로, 이 한 귀퉁이 들고 있는 걸로 훌륭하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한국어, 한국 시, 한국 사람들의 살림이 참 슬프다고요. 절대로 겸손이나 잘난 체가 아니라는 걸 전제로, 왜냐하면 제 생각에 삶을 붙들고 있는 자들이라면 이 정도는 기본일 것 같고, 자기 생애의 형식이 시 쓰기라면 이 정도는 최소한일 것 같은데, 이게 뭐 그렇게 대접받을 일인가 하는 거죠. 좀 혹독하게 말하자면, 지난 1백 년의 한국 시는 허겁지겁 서양시 흉내를 내왔을 뿐이에요. 그 허겁지겁과 노심초사 속에서 얻은 바가 물론 있지만, 우리에겐 시가 없다는 자각이 사람들에겐 없어요. 국수주의를 주장하는 게 아니라 병은 있는데 아픈 사람은 없는 거예요. 내가 좋은 시라고 생각하고 즐기고 썼던 게, 괴테 흉내였네, 백석이 좋은 줄 알았는데 일본에 비슷한 시인이 있었네? 이걸 모르고 이뤄낸 것하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백석의 처지를 이해하면서 자기 몫의 어떤 기여를 하고자 노력하는 건 다르죠. 한국어를 통한 사유와 감각이 지구적 규모의 보편에 도달해본 적이 없어요. 자기 말, 자기 느낌, 자기 실감이 아니에요. 마치 아랍의 현재를 미국의 관점에서 확보된 정보와 지식으로 우리의 것처럼 삼 듯이. 이걸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수준의 보편, 세계가 공유할 수 있는 말하기, 시 쓰기에 도달할 수 없어요. 그렇게 가야 한다면 지금의 제 시로는 부족해도 너무 부족해요. 제 개인의 부족함이자 우리 1백 년의 부족함이에요.

시에서 운율을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이겠습니다. 시인의 말하기는 첨탑의 피뢰침 끝에 위치할 거예요. 살아 움직이는 한국어의 최전선이죠. 시인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한국어가 아주 조금 환해질 수 있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구사하는 이 운율질은 꺼끌꺼끌한 게 조금 덜한 정도죠. 이것 역시 겨우 이 정도예요. 한국어의 숨은 근육, 한국어의 아름다운 경지를 드러내서 저렇게도 말할 수 있구나 하는, 눈이 환해지는 리듬을 창출해내지 못했어요. 한국 시의 운율은 매우 어정쩡하고 소극적이고 한심한 상태예요.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부담을 덜 주면서, 한국어의 결을 다듬는 차원에 머물러 있죠. 

아이처럼 천진한 시선이 느껴진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어린 당나귀 곁에서>의 시편에 담긴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고도의 정치 풍자도 있고, 좀 야한 농담도 있는데, 또 하나 눈에 인상적인 건 추모의 시가 많다는 거예요. 누군가의 죽음을 담은 시요. 선생에겐 죽음이 시를 점화시키는 데 특별한 역할을 하나 싶었어요. 사람마다 성감대가 조금씩 다른 것처럼, 시인도 각각인데요. 시를 쓰는 자로서 서러운 일에 깊이 동하고, 죽음도 그 일부죠. 전에 작가회의 할 땐 상갓집 접수대가 제 담당이었어요. 사람들 얘기로는, 김사인이 앉아 있으면 돈을 더 내고 싶어진다고, 말할 수 없이 처연해지게 만든다고. 하하. 그런데 실제로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정성껏 예를 갖추는 일을 할 때 이상하게도 마음이 평안하고 깊어져요. 그래서 90년대 초에, 수배생활 끝난 직후에 장의사 일을 할까 생각해본 적도 있어요.

그때 정말 죽음 가까이에 계셨군요. ‘노숙’같은 시가 그때의 내 자신을 유체이탈 상태로 본 건데, 죽음을 그 시처럼 모든 인간적인 이해득실을 다 거친 고요와 맑음과 투명의 상태, 그저 슬프거나 서러운 것을 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신비스런 것으로 여겼어요.

‘고요로 깊어지소서’라고 써주신 책을 출판사를 통해 받았는데요. 고요는 우선 혼자여야 합니다. 선생도 그러시겠지만, 혼자가 되는 일만큼 어려운 것도 없는 요즘입니다. 그 가운데서 고요로 깊어진다는 건 뭘까요. 고요라는 말을 발음이라도 한번 해보는 것, 고요라는 말을 한번 써보기라고 하는 일, 들어보는 일. 고요를 말하면, 문득 서늘하고 차가운 뭔가가 슥 지나가는 걸 한번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