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YLE

알레시오 포치, 그뿐이다

2015.04.04GQ

쇼트 블루종, 화이트 진 Dior Homme 이어링 Givenchy By Riccardo Tisci.

데님 베스트 Ralph Rauren Purple Label 크롭트 진 Levi’s 실버 목걸이 Saint Laurent .

오버사이즈 니트, 쇼츠 Acne Studios 앙고라 양말 Calzedonia.

프린트 톱, 쇼츠 Christopher Shannon 골드 링 Acne Studios.

니트 베스트 Prada 데님 와이드 팬츠 Christophe Lemaire.

스웨이드 베스트, 코듀로이 쇼츠 Acne Studios.

밀라노 말펜자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저녁 8시에 파리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다. 러시아워를 감안해도 10시엔 그의 이름으로 예약된 방에 체크인을 했어야 하지만, 알레시오는 자정이 다 되도록 호텔에 오지 않았다. 11시를 넘기면서 과장을 좀 보태 3초 간격으로 에이전시의 담당자에게 문자를 보냈고, 온갖 추측과 불행한 예감이 뒤섞인 질문에 대한 답은 참으로 간단하게 돌아왔다. “He is Not a child!” 애가 아니라고? 애가 아니어서 문제인 걸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였을까? 알레시오 포치는 열아홉 살이다. 그 나이답게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듯한 몸은 그렇다 치고,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하고 부유하며, 밤에는 양쪽 무릎에 각각 다른 혈통의 여자를 앉히고 있을 것 같은 야한 분위기는 그가 파리의 밤을 순순히 지나칠 리 없다는 의심을 부추기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6시, 정해진 콜 타임보다 몇 분 앞서 그는 호텔 캉봉의 로비에 차분히 앉 아 있었다. 새벽의 호텔 로비는 어젯밤의 온갖 비밀을 숨긴 채 지치고 쓸쓸한 어둠에 느릿하게 파묻혀 있었고, 그 한복판에서 만난 알레시오 포치는 예상과는 달리, 수줍고 건강하고 밝았다. 낡은 가죽 블루종과 엉거주춤하게 내려 입은 화이트 진, 번쩍이는 하이톱 차림의 평범한 요즘 청년. 베르사체와 지방시 캠페인 모델로 얻은 유명세, 밤 비행기로 도시 사이를 오가는 분주하고 매력적인 삶, 원하는 건 오래 망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풍족한 돈, 이 모두 다른 사람의 얘기 같았 다. 다만 오른쪽 뺨의 날카롭고 깊게 파인 상처만 그를 만나기 전 기대한 비밀스럽고 어두운 매혹을 다시 기억나게 했다. 새벽부터 왕성한 식욕으로 초콜릿 범벅의 팽 오 쇼콜라를 두 개째 입에 밀어 넣는 그에게 상처에 대해 물었을 때, 알레시오는 입가의 빵 부스러기를 털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삼각형 모양으로 접어놓은 칵테일 냅킨은 그대로 두고 손등으로 입술을 툭툭 터는 모습은 거칠었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뭔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는 어쩐지 산 꼭대기의 콘돌이나 먼 바다의 돌고래가 생각나게 했다. “다섯 살 때 우리 집 고양이에게 긁힌 상처예요. 내가 그녀에게 스트레스를 많이 줬나 봐요. 뺨을 이렇게 해놓고 자기도 놀랐는지 한동안 날 피했어요. 지금은 제일 친한 친구예요. 우린 두 살 차이거든요. 고양이는 올해 열일곱 살이 됐어요. 그때 그 일을 엄마에게 고자질하지 않은 건 잘한 것 같아요. 덕분에 서로 믿는 사이가 됐죠. 엄청난 일을 함께 겪었으니까.” 촬영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그에게 어젯밤의 일은 묻지 않았다. 이제 몇 시간 후면 그는 파리 외곽의 허허벌판에서 여름 옷을 입고 지구에서 제일 멋진 표정을 지어야 한다. 오후에 눈이 올 거란 예보도 전하지 않았다. 엄청난 일을 함께 겪기 전엔 신뢰가 필요한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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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님 베스트 Ami 베이지 팬츠 Dries Van Noten.

컬렉션이 끝나고 3일 후에 여기서 촬영인데 왜 파리에 남지 않았죠? 좀 쉬고 싶었지만 밀라노에서 일이 있었어요. 이 촬영이 끝나면 밤 비행기로 다시 또 밀라노에 가야 해요. 놀고 싶을 때도 많지만 난 일을 해야 돼요. 모델 일을 시작할 땐 좋은 것만 생각했어요. 멋진 사람들을 만나고 비싼 옷을 입는 식의 화려하고 빛나는 것들요. 그런데 어떨 땐 너무 힘들어요. 스케줄이 정말로 많거든요. 밤 비행기에서 자다 깨면 다른 도시에 있는 삶이 이젠 익숙해요.

밤 비행기에선 무슨 생각을 해요? 가족들, 특히 남동생. 걘 이제 열네 살이 됐어요. 형이 필요한 나이죠. 곁에 없으니까 멀리서도 해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늘 고민해요. 또 고향 생각을 많이 해요. 브레시아라고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출신이거든요. 아, 축구 관련 게임도 자주 생각해요. 엑스박스 피파 게임은 매년 꼭 사요. 보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날 땐, 우울하지 않으려고 노력도 하죠.

개에게 물렸을 때, 벌에게 쏘였을 때, 괜히 슬퍼질 때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하면 우울하지 않다는 노래도 있잖아요. 맞아요. 아기 고양이 수염, 잘 닦인 구리 주전자…, 이런 가사였죠. 난 고향과 엄마가 해주는 음식, 정말로 웃기는 이탈리아 배우 체코 잘로네, BMW 자동차 같은 걸 생각해야겠네요.

음악은요? 클래식이랑 메탈 빼고는 다 좋아해요.

이 일을 하기 전엔 어땠어요? 시골에 살고 경제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탈리아 밖으로는 한 번도 못 나가본 평범한 남자애였어요. 키는 좀 컸죠. 내가 특별하다고는 한 번도 생각 안 했어요. 우리 마을엔 핸섬한 남자가 많으니까. 정말 멋진 중년도 많고.

그런데도 그 마을에서 혼자 톱모델이 됐죠. 어느 날 쇼핑몰에 놀러 갔다가 모델 에이전시 부커에게 스카우트 됐어요.

뭐라고 하던가요? 정확하게 기억해요. 내 안에 뭔가가 보인다고 했어요.

첫 촬영은 어땠어요? 2013년에 처음으로 화보를 찍었어요. 처음으로 맡은 큰일이라 아버지가 함께 갔는데 사진가가 아버지를 보더니 둘이 같이 찍자고 그 자리에서 콘셉트를 바꿨어요. 엄청나게 부끄러웠지만 나중엔 재미있었어요.

그 촬영에서 당신의 뭔가가 콸콸 나왔나요? 그보다는 처음으로 런웨이에 섰을 때 뭔가를 느꼈어요. 돌체 앤 가바나 쇼였는데 뭐랄까, 정말이지….

그 뭔가가 뭐였어요? 아드레날린.

아드레날린 하면 누가 뭐래도 지방시죠. 게다가 지방시의 리카르도 티시 덕분에 더 유명해졌잖아요. 리카르도를 만난 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에요. 그는 모든 면에서 굉장해요. 우상처럼 생각한 사람이어서 처음 만났을 땐 좀 긴장했어요. 두렵기도 했고. 하지만 같이 일하고 자주 보니까 지금은 친구가 됐어요.

그런데 아까부터 뭐든 정말 잘 먹네요. 당신은 또래 모델들에 비해서 체격이 좋은 편이죠? 근육도 많고 어깨도 넓죠. 요즘은 마른 모델들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텐데. 맞아요. 요즘 모델들은 정말 말랐어요. 그래서 처음 일을 시작할 땐 고민이 많았어요. 근육이 너무 많은 건 아닐까? 살을 빼야 하나? 하지만 지금은 내 몸에 만족해요.

모델이 되고 유명해지고 나니 뭐가 제일 달라졌나요? 많은 게 바뀌었죠. 우선은 여러 도시를 오가며 살아요. 에이전시가 파리나 뉴욕 말고 런던, 바르셀로나, 함부르크, 코펜하겐, 스톡홀름에도 있거든요. 대도시에 오래 머무는 경우도 많은데 요즘 느끼는 건 인생은 참 쉽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살기로 했어요. 촬영장에 이렇게 맛있는 타코가 있고 레드 와인이 한 병 있는 것, 이런 매일의 사소한 일들도 다 감사해요.

고향의 친구들과 비교했을 때, 당신이 더 잘살고 있는 것 같나요. 난 아직 충분히 젊고, 행복해요. 매일이 완벽한 하루를 보낸 기분으로 지나가요. 하지만 이런 마음이 얼마나 갈지 궁금하긴 해요. 불안한 건 아니고요. 걱정은 안 하니까.

일이 없을 땐 뭘 해요? 운동이요.

제일 좋아하는 취미는요? 음, 그것도 운동이요.

내년에 스무 살이 되네요. 꿈에 대해서 고민할 나이죠. 죽을 때, 내가 한 일들을 후회하지 않는 게 유일한 꿈이에요.

그럼 지금 당장의 꿈에 대해서도 말해볼까요? 제일 갖고 싶은 것 세가지만 말해봐요. 사르디니아 해변의 별장, 두카티 몬스터, 거미 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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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장식 피케, 플라워 팬츠 Givenchy By Riccardo Tisci.

촬영 내내 날씨는 이미 마음이 떠난 애인처럼 차가웠다. 모든 도시에서 일어나는 이상 기온 현상은 프랑스의 시골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알레시오는 거위털 패딩을 입은 촬영팀 사이에서 보테가 베네타의 니트 레깅스 하나만 입고 치약광고 모델처럼 웃었다. 그때 그의 가슴 위에 아이스크림을 올려두어도 조금도 녹지 않았을 게 틀림없다. 그는 연신 괜찮다고 말했지만 몸을 떨고 있었고, 조금 겸연쩍어했지만 모두에게 정중하고 친절했다. 촬영 중간에 머그컵에 담은 레드 와인을 건넸다. 단숨에 와인을 마신 알레시오는 점심 시간이 아직 남은 걸 확인하고는 구석에서 블루종을 어깨에 덮고 잠이 들었다. 깨어났을 때 그는 훨씬 더 생기가 넘쳤다. 아직 눈이 남아 있는 날씨에 슬리브리스를 입는 건, 아주 전형적인 일은 아니지만 그다지 대수로운 일도 아니라는 반응이었다. 열아홉의 알레시오 포치에게 모델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스릴이 넘친다. 누군가에게 얻어터지거나 총을 맞을 위험은 없지만, 거기엔 늘 예상 못했던 변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야말로 젊은 남자에게는 최고의 아드레날린이다. 서울로 돌아와 알레시오에게서 간단한 메일을 받았다. “따뜻하고 재미있고 웃긴 촬영 고마웠어요. 우리 정말 잘한 것 같죠?” 말미에 ‘사랑을 담아’, 또는 ‘진심으로’ 같은 맺음말은 없었다. 거기엔 알레시오 포치, 라고만 적혀 있었다.

슬리브리스 피케 Christopher ShannonAmi 가죽 벨트 Kili Watch.

슬리브리스 피케 Christopher ShannonAmi 가죽 벨트 Kili Watch.

    에디터
    강지영, 박나나
    포토그래퍼
    유영규
    모델
    Alessio Pozzi At Request Model
    그루머
    Frederic Kebbabi At B-Agency
    캐스팅
    박인영
    로케이션
    배우리
    어시스턴트
    정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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