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불어 좋은 날 – 안성기

안성기는 어떤 바람도 원망하지 않는다.

흰색 셔츠와 푸른색 수트 모두 꼬르넬리아니, 벨트는 몽블랑, 자주색 니트 타이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트렌치코트는 안성기의 것. 한겨울보다 추운 봄이었다. 촬영 내내 안성기는 “춥다”는 말조차 먼저 꺼내는 법이 없었다.한 컷씩 촬영이 끝날 때마다 두꺼운 코트를 건네주어도 아주 천천히 입었다.
흰색 셔츠는 돌체앤 가바나. 트렌치 코트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직원이 <화장> 팸플릿을 건네주자 안성기는 아주 자세히 들여다봤다.) 전 며칠 전에 명필름에 가서 받았습니다. 아, 영화 봤어요? 부산국제영화제 버전을 봤겠네요. 칸에 출품한 버전과는 달라요. 칸에서 상영한 버전은 좀 늘어졌을 거예요. 길게.

뜬금없지만, 저희 아버지도 52년생이십니다. 하하. 원래 51년 12월 말일인데 한 살 더 먹으니까 1월 1일로 옮겨놨어요. 그러니까 용띠가 아니라 토끼띠예요. 그 몇 시간 차이로…. 참 애매해. 

<화장>에서 오십 대인 오 상무를 연기했습니다. 보면서 ‘오십 대와 육십 대의 간극은 넓지 않은 걸까?’ 생각했는데요. 배우는 자신의 나이보다 10년은 어린 인물을 연기해야 잘 녹아들어 가는 것 같아요. 진짜 자신의 나이대를 연기하면 감당을 못해요. 오히려 어색해요. 그런데 분장을 하고 노역을 연기하면 관객이 인정하고 봐줘서 이해가 되는 것이지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정말 이상해요.

오 상무는 대부분의 장면에 출연하며 거의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하지만 보고 있는 제 감정은 바람처럼 쉽게 움직였습니다. 보는 내내 영화 <축제>에서 연기하신 이준섭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오늘 좋은 관객을 만났네요. 정말 <화장>처럼 한 영화에서 90퍼센트 이상 출연한 건 처음이었어요. <화장>이나 <축제> 모두 연기가 점잖은 편이죠. 요즘은 그런 연기를 심심하다 여기는 것 같아요. 그러니 현장에서도 과한 연기를 요구하는 편이죠. 관객도 센 연기에 익숙하고요.

전 오히려 반가웠습니다. 장면에 묻힌 듯, 배경을 박차고 나오지 않는 연기를 오랜만에 보니, ‘새롭다’ 느꼈어요. 오구리 코헤이 감독님과 <잠자는 남자>를 찍을 때 숏의 크기를 어떻게 정하느냐 물어본 적이 있어요. 예를 들면 클로즈업과 풀숏 같은 걸 선택하는 방법 말이죠. 그때 감독님이 이렇게 말했어요. “배우와 배경 모두 돋보이지 않는 크기로 결정한다. 배경과 인물이 하나로 느껴지는 사이즈가 분명 있다.” 말은 그렇게 하셨지만, 결국 풀숏이 많았어요. 하하. 요즘은 ‘강조’를 강조해요. 하지만 분명 많은 배우가 “어떻게 하면 연기를 하지 않을까?” 고민할 거예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죠.

임권택 감독님은 또다시 안성기를 ‘선한 엘리트’로 선택했습니다. 많은 사람의 고정관념도 비슷한데요, 혹시 이제는 벗어나기 어렵다고 느끼지는 않으세요? 악한 역은 쉽지 않아요. 그런 역할이 올 때마다, 나로 인해 순화돼서 결국 영화에 도움이 안 돼요. <7광구>에서도 좀 더 악했어야 했는데…. 근데 내가 <악마를 보았다>같은 영화에 출연한다? (손사래를 치며) 어휴 난 못해요. 내가 좋아하는 건 촬영하면서 느끼는 즐거운 마음이에요. 악마 같은 감정을 갖는다면 촬영장에서 늘 힘들겠죠.

한국영화에서 선하면서도 유약한 남자의 등장을 <바람 불어 좋은 날>의 덕배에서 찾을 수 있을 텐데요. 난 그 영화가 뉴 웨이브의 시작점이라고 생각해요. 박정희 대통령이 죽고 나서 사회 자체도 많은 변화를 했어요. 만약 그 사건이 없었다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개봉이 어려웠을 거예요. 그전에는 사회 구조 때문에 생각을 틀에 맞춰서 하다 보니, 빠져나오기가 힘들었어요. 당시 많은 지식인이 그 영화를 통해 희망을 봤어요. 그들이 영화를 앞으로 해나가는 데 조그만 독려를 한 거죠. 개봉 이후 신인 감독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어요.

플롯이 정교한 영화입니다. 어우, 이야기는 정말! 그동안 시나리오를 많이 봤지만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진짜 완벽에 가까운 시나리오예요. 인물 배치와 교차 방식이 대단해요.

이런 말씀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다들 배우 안성기를 다정다감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전 오히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별로 없으신 건 아닐지 생각해봤습니다. 사람에 대한 기대가 적다고 할까요? 호인으로 평가받는 사람 중엔 타인에 대해 관심도 적고, 화도 잘 안 내고, 이성적이고….  냉정하고.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그러셔서…. 하하 맞아요. 비슷해요. 다들 나보고 왜 화를 안 내느냐 그러는데 일단 내가 발끈하는 시간이 좀 늦어요. 화가 느리게 생겨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역지사지예요.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언제나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하다 보니까 그냥 모든 게 덤덤하게 지나가요. 내가 가끔 표현하는 말이 있어요. “그냥 이러고 있지 뭐.” (소파에 뒤로 한껏 기대고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냥 이러고 있는 거지 뭐.

하하하. 내가 너무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도 있어요. 아니면 모든 게 다 복잡하니까, 좀 가만히 있자는 감정도 있어요. (오랫동안 생각하고) 그래, 내가 에디터 분 아버지와 비슷하네요. 큰 문제에선 덜 움직여요.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하지만.

흰색 셔츠와 푸른색 수트 모두 꼬르넬리아니, 벨트는 몽블랑, 자주색 니트 타이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감정이 폭발하는 게 어려워서 연기할 때 힘들었던 적은 없으세요?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게 잘 우는 배우예요. 남자가 우는 게 많이 필요할까 생각도 해요. “안 울고 표현하는 게 좋은 것 아닌가?” 나름대로 논리를 만들어놓고. 하하. 감정을 퍼내는 열기가 부러울 때가 있어요. 근본적으로 그게 잘 안 돼요.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안 울었으니까. 예전에 우리 촬영팀이 죽었을 때 눈물이 줄줄줄 나오더라고요. 그때 말고는 최근에 운 적이 없어요. 근데 내가 눈 검사를 받아보니까 진짜 눈물샘에 눈물이 적대요. 유쾌하면서 울지 않고 슬픈 <라디오 스타> 식의 감정을 좋아해요.

‘봄’ 같은 영화입니다. 실제 안성기와 박중훈의 관계를 그대로 끌고 온 것 같고요. 영화 찍는 내내 아이가 된 것 같았어요. 행복했고요. 이준익 감독이 배우들의 연기를 잘 엮은 것 같아요.

제게 영화감독은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배우 안성기는 감독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요? 연출과 현장 진행을 분리해놓고 감독은 연출, 현장은 제작팀에서 전담하는 방식이 있어요. 정경분리처럼. 아니면 감독이 모든 걸 ‘감독’하는 방식도 있고요. 경영자처럼. 이 둘 중 하나를 확실하게 선택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어느 쪽의 편을 들 수는 없지만,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경영자의 면모는 꼭 필요해요. 감독이 생각하는 수준이 100이고, 90까지가 마지노선이라면, 80만 나올 때 계속 90이 되려고 너무 애를 쓰니까 나중에 시간이 없어요. 퀄리티만 목표로 하지 말고 시간도 염두에 뒀으면 좋겠어요.

요즘도 특별한 목표는 없으세요? 좋은 영화 해야죠.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시죠? 그렇지! 가정이 평안하고 행복한 것.

아아, 영화 찍는 과정을 말씀드린 거였는데요. 아아! 물론이지. 결과보다도 영화를 찍는 하루하루가 중요하죠. 사실 인생은 지나갈 뿐 별거 없는 것 같아요. 지나고 나니까 벌써 내가 여기까지 왔네 하고 확인하고, 더 이상은 힘들겠구나 한계를 아는 거예요. 이제 마무리를 잘해야죠. 아무도 모르게 세월을 잘살아야죠. 그것도 참 힘들어요. 나이 많은 사람이 뭘 하려는 의지는 다른 사람들을 굉장히 불편하게 할 수 있어요. 너무 눈에 많이 띄기도 하고요. 나는 영화 현장을 좋아하지만 나만 좋아해선 안 돼요.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날 좋아하느냐가 중요하죠. 나이 든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하는 지점이에요. 예민할 필요는 없지만, 섬세해야 해요. 분위기가 이상하면 피해줘야죠. 

<화장>을 관통하는 오 상무의 감정에서 가장 큰 기둥은 의무감입니다. 그게 그대로 안성기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까 가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내겐 정말 가정이 중요해요. 내가 결혼을 늦게 한 것도 가족을 굶기지 않고 먹여살리고 싶어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가정이 흔들리고는 모든 일이 잘될 수 없어요. 같이 일했던 분이 양쪽으로 갈려 있는데, 그 기준이 있어요. 가정을 탄탄하게 한 분들은 지금도 잘살고, 그걸 지키지 못했던 분들은 형편없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가족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입거나 불편하면 안 돼요. 요즘은 아이와 예능 프로그램에 많이들 나오는데, 난 잘 모르겠어요. 그것이 정도라고 생각 안 해요. 하지만 세상이 많이 바뀌었죠. 가만히 있어도 트위터로 노출이 쉽게 되잖아요. 그래도 스스로 보여줄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집에 계신 시간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거실에선 뭘 유심히 보세요? 보광동의 교회 십자가가 잘 보여요. 뒤쪽의 관악산을 뚜렷하게 보고 싶은데 황사, 미세먼지 때문에 안 보이는 날이 더 많아요.

이제 촬영하러 밖에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죄송스럽게도 바람이 심하고, 꽃샘추위가 한창입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에요. 괜찮아요. 황사 바람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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