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편집은 장난이 아니야

2015.05.20GQ

저자가 쓴 글과 편집자가 매만진 글은 다르다. 하지만 자의식 과잉의 한국에서, 편집이라는 2차 창작 행위는 틀린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잡지 <더 뉴요커>는 2007년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풋내기들>의 원본을 편집자 고든 리시가 어떻게 편집했는지를 공개했다. 레이먼드 카버의 원본에는 엄청난 검은 줄이 그어져 있었고, 한 페이지에서 살아남은 건 고작 몇 줄에 불과했다. 이 빗금 쳐진 편집본을 받아든 레이먼드 카버의 마음과 얼굴에는 얼마나 많은 빗금이 드리웠을까.

사람들은 그렇게 지금의 편집된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을 읽는 중이다. 한국에서 편집자에 대해 갖고 있는 대중적인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어선지 이 편집본에는 꽤 관심이 몰렸다. 모종의 의아함을 깔고 있는 반응이었을 것이다. ‘편집자가 정말 이래도 되나?’

짧게 답하자면 ‘이래도 된다’. 한국에서 출판 편집자는 종종 교열, 교정자와 혼동된다. 오타를 수정하고, 비문을 다듬고, 맞춤법과 띄어 쓰기를 바로잡는 역할. 물론 편집의 영역에 속하는 업무지만, 편집이라는 전체 영역에서는 일부에 불과하다. 편집자의 역할을 제한하는 고정관념에는 특정 직능을 우월한 것으로 보는 인식이 작용한다. 동종업계의 한 직능을 중심으로 둔 채, 연관되는 다른 직능들을 부족한 재능으로 간주하고 그 직능의 고유한 전문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못된 습성의 사례가 도처에 넘쳐난다. 예컨대 이런 질문에 답해보면 어떨까. 학교 미술 교사는 현업 화가보다 저능할까. 운동 트레이너는 선수가 될 능력이 없는 사람일까. 코러스 가수는 단독으로 활동할 자질이 부족한 사람에 불과할까.

편집자의 사회적 위상이 예전과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저자와 견줄 때 상대적으로 홀대 받는 풍토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든 업계 종사자에게는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낮잡아 부르는 별명이 있다. 특히 여성 편집자는 한때 자신의 처지를 여급에 견주며 자조하던 시기가 있었다. 저자를 모시고 시중을 드는 접대부와 다를 게 없다는 탄식이었다.

가령 ‘쌤앤파커스’라는 출판사가 있다. ‘예를 들면’이 아니라 ‘가령’이다. 만약 쌤앤파커스가 송년 행사에서 편집자들에게 ‘업소’ 의상을 입히고 저자들을 대접하게 한다면, 이 출판사가 편집자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는 분명하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편집자를 내려다보는 배경에는 고루한 편견이 작용한다. 평론가는 작가처럼 창작을 하지 못할 때 선택하는 부러진 열정일 뿐이라는 편견처럼, 편집자 역시 작가에 이르지 못한 부족한 재능일 뿐이라는 편견. 그게 아니라면, 편집자란 작가를 지향하는 이들이 잠시 머무는 중간 지점에 불과하다는 편견.

이런 편견과 위계가 살아 있을 때, 편집의 가치는 미완의 글을 다듬는 과정에서 낮게 평가될 게 뻔하다. 어떤 유형의 저자는 자신의 글에서 문장 부호 하나 허락 없이 고치지 못하게 한다. 이때 편집자의 업무란 교정 등 편집 기술로 축소된다. 글쓰기에서 ‘편집자가 하는 일이 뭐 있느냐’는 식의 편견이 강화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내 글은 누구도 손댈 수 없어’ 유형의 저자는 자신과 편집자 사이의 위계가 적어도 글쓰기에 관해서는 편견이 아니라고 믿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가 ‘어디서 감히 내 글에 손을 대나’ 라고 생각할 때, 편집자는 ‘어디서 이런 쓰레기를 글이라고 하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저자는 지극히 아름다운 정원을 편집자의 손길이 망친다고 본다면, 편집자는 버릇없이 날뛰는 자의식 강한 아이를 달래고 얼러 말끔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고 볼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런 저자는 이미 대가이거나 자의식으로 망하거나 둘 중의 하나일 테니, 편집자와의 관계는 따로 고민하지 않아도 좋겠다.

그런가 하면, 저자와 편집자가 서로 침투해가며 글쓰기를 이끄는 ‘합작co-writing’ 관계도 많다. 이제는 꽤 유명한 얘기지만, 더글러스 애덤스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의 라디오 대본을 혼자서 작업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구상을 팀을 이룬 동료들과 철저하게 의논한 후에 한두 페이지 써내려가는 식으로 작업했다. <영혼의 길고 암울한 티타임>을 쓸 무렵에도, 담당 편집자인 수 프리스톤에게 소설의 구상과 관련된 질문을 던졌다. 수 프리스톤은 질문을 받고서 자신과 더글러스 애덤스가 새로운 모험을 떠나겠구나 생각하고,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기쁨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편집자에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일은 저자의 상상력을 관찰할 수 있도록 초대받는 동시에, 때로는 저자의 글쓰기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었으니까.

저자와 편집자의 관계를 아예 새롭게 실험하는 경우도 있다. 기존 잡지의 틈새를 파고드는 엉뚱한 글들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문예지 <맥스위니스>는 ‘편집의 마술’을 보여주는 글을 정기적으로 싣겠다고 공표했다. 투고된 원고의 편집 ‘전과 후’를 제시하는 방식, 그러니까 원래 원고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훨씬 근사해진 최종 원고를 함께 게재해, 여백, 어조, 명료성 등을 매만지는 편집의 영예로운 과정을 조명하는 기획이었다.

물론 모든 저자는 서로 다른 개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편집자는 먼저 저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파악한 다음, 각자에게 어울리는 상황의 글쓰기를 돌보는 게 맞다. 모든 저자가 더글러스 애덤스처럼 작업하지 않고, 모든 잡지가 <맥스위니스>처럼 원고를 게재하진 않으므로, 이런 작업 방식을 일반화하면 곤란하겠지만, 저자와 편집자의 협력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실마리를 얻는 사례로는 충분하다.

저자가 편집자와의 관계에서 그의 위상을 어떻게 보는가는 사소한 태도를 통해 드러난다. 얼마 전 ‘절필’을 선언한 고종석의 글쓰기 강의를 책으로 만든 <고종석의 문장>이 한 예다. 분명 저자는 고종석이지만, 고종석의 다른 책과 달리 이 책은 편집자가 ‘쓴’ 책이라고도 보는 게 논리적으로 맞다. 그럼에도 표지에 고종석이란 이름만 박혀 있는 것은 못내 어색하고 아쉽다.

한편 저자와 편집자의 합작에서, 침투 양상에 따라 저자와 편집자의 자의식이 어디까지 유지되는가의 문제도 흥미롭다. 지금 이 글의 필자는 분명 박준석이지만, 독자가 읽는 글은 편집된 글이다. 이 글의 경우에는 보통 두 번의 편집을 거친다. 필자가 쓴 초고는 최초의 독자라고 할 수 있는 눈 밝은 지인의 편집을 거친다. 이렇게 일차 편집된 초고는 다시 < GQ > 담당 편집자의 이차 편집을 거친다. 당연히 협력과 조율 과정에는 오해와 굴절과 갈등과 긴장이 따른다. 필자는 (< GQ >에 한정되는 이야기지만) 두 번의 편집을 대체로 그대로 받아들이는 편이다. 최종 수정을 편집자에게 맡기는 것이다.

‘한 글자도 고칠 수 없다’라고 할 만큼 글쓰기에 관한 자의식이 강한 편이 아니라서, 두 명의 비판적 독자의 의견을 흡수하는 과정을 즐긴다. ‘즐긴다’고 말하는 건 이 과정에서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글에서 책임질 문제가 생기면 그건 온전히 필자가 감당할 일이지만, 늘 그렇듯 잦은 비판 혹은 어쩌다 드문 칭찬이 들려올 때, 그것에 어떻게 응대하면 좋을지에는 미묘한 고민이 뒤따른다. ‘합작’ 관계에 있는 1차, 2차 편집자를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필자의 응대 방식과 태도에서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일상의 글쓰기에서도 어렵지 않게 이 고민의 과정을 실험할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믿을 만한’ 지인에게 자신이 쓴 글의 편집을 청할 것, 그것을 그대로 자신의 글로 받아들일 것, 그 글에 대한 반응을 통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내적 움직임에 응대할 것. 자의식 과잉인 이 사회에서 자아를 납작하게 줄여주는 일상 실험의 하나로 권한다.

그런데 저자와 편집자의 바람직한 합작 관계를 위해서는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다. 보조적인, 주변적인, 매개적인 직능으로 분류되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직업이 많다. 책과 관련해서는 언뜻 사서와 번역가와 편집자가 떠오른다. 흔히 이들의 직업을 논할 때면, 그 직업의 이상적인 상을 제시하고 그에 걸맞은 자질을 요구한다. 하지만 이들의 처우는, 대접은 어떤가. 자질은 이상으로 끌어올리면서 처우는 현실로 끌어내리는 모순이 여전하다. 경제적인 보상만이 아니다. 수많은 문학상의 심사위원과 주요 문예지의 ‘편집위원’ 자리는 온통 평론가로 채워져 있다. 대체 그 자리에 편집자가 들어가면 안 되는 이유가 뭔지 이 해할 수 없다. 해당 직능의 전문성을 직업적으로 제대로 대접하지 않고, 필요할 때만 인간적으로 듣기 좋은 말로 접대하는 현실은 이제 끝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준비되어 있다.

    에디터
    글/ 박준석(문학평론가)
    일러스트레이션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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