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졌다! 크래프트 맥주

부산, 순창, 울산, 천안, 파주, 음성…. 자고 일어나면 크래프트 맥주 공장이 터를 다지고 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1 지난 4월 4일, 가로수길 퐁당 크래프트 비어 컴퍼니에선 ‘Sour Talk’이라는 이름의 맥주포럼이 열렸다. 우리나라 전체 맥주 시장에서 크래프트 맥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1퍼센트. 그중에서도 사워 맥주(신맛이 강한 맥주)가 차 지하는 비중은 극미하다. 그래도 내로라하는 양조장의 담당자들과 애호가들이 모여 사워 맥주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2 성수동 이마트 주류 코너. 이곳에는 ‘크래 프트 맥주’ 코너가 따로 마련돼 있는데 해당 선 반이 차지하는 크기가 전체 맥주의 ¼ 가까이 된다. 이마트가 지분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는 주류 유통회사 신세계 L&B는 자체적으로 크 래프트 맥주 수입에 나섰다. 지난해 말 이마트 에서 선보인 크래프트 맥주는 약 18종이다.

#3 지난 3월,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자체적으로 개발한 브랜드 ‘아크비어’의 유통을 시작했다. 횡성의 세븐브로이도 이달 병맥주를 출시했다. 순창에 위치한 장앤크래프트브루어리도 다음 달 병맥주 출시를 앞두고 있다. 케그로 유통되는 크래프트 맥주는 훨씬 활발하다. 크래프트 브루어리는 브루펍(양조장과 펍을 겸하는 곳)을 포함해 어림잡아 스무 군데가 훌쩍 넘어간다. 펍에 가면 생전 처음 보는 레이블의 국내 양조 맥주들이 넘쳐나는 이유다.

 

우리나라 크래프트 맥주(소규모 양조장의 개성을 담은 맥주)의 꿈틀거림이 심상치 않다. 위 세 가지 사례에서 보듯, 열풍은 다양한 진원지에서 감지된다. 전문적으로 크래프트 맥주를 만드는 일에 뛰어든 사람이 많아졌고, 크래프 트 맥주를 아는 사람도, 마시는 사람도 늘어났다. 크래프트 맥주 문화를 키워가려는 선두주 자들의 노력도 발견된다. 왜, 갑자기, 모두가 크래프트 맥주를 이야기하게 된 걸까?

시발점은 2012년경부터 경리단길의 몇몇 펍에서 자체적으로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크래프트웍스탭하우스, 더부쓰 등 경리단 길의 펍들은 자체 레시피를 브루어리에 위탁해 맥주를 양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4년 주세법 개정으로 열풍은 펍 단위에서 브루어리 단위로 증폭됐다. 지난해 말부터는 새로 설비를 갖춘 브루어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곳에서 자체 생산하는 맥주와 펍에서 주문받아 제작하는 맥주의 종류까지 합치면, 우리나라 크래프트 맥주의 종류는 대기업 소주 브랜드와 맥주 브랜드를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많다.

이들이 갑자기 우르르 등장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2014년 1월, 주세법이 꽉 틀어막고 있던 양조장 설립에 숨통이 좀 트이면서 돈과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기 때문이다. 브루어리가 설비를 갖추고 맥주를 생산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대략 6개월에서 1년. 2014년 초부터 준비하기 시작한 브루어리들이 지금 꽃을 피우기 시작한 셈이다. 자본력도 쏠리고 있다.

크래프트 맥주 붐을 취재하면서 관계자들에게 반복해서 들은 말이 있다. 지난 2002년의 소규모 양조장의 ‘반짝’ 인기를 답습하고 싶지 않다는 것. 그때 투자를 했다가 눈물을 머금고 사업을 접은 사람이 꽤 많다. 아직 단단해지지 못한 시장에 섣불리 발을 디디면서 생긴 일이다. 그러지 않기 위해선 몇 가지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 잔치에 굳은 얼굴로 들어서는 격일지 몰라도, 실수를 막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크래프트 맥주에 대한 이해를 다지는 일은 가장 기본이다. 맥주 양조 기술은 독일이 우세할지 몰라도, 독특한 브랜드로 실험적인 맥주를 만드는 ‘크래프트’ 문화 자체는 미국이 단연 앞서 있다. 우리나라도 미국식 크래프트 맥주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하지만 크래프트 맥주라는 용어의 맥락은 미국과 좀 다르다. 대기업이 만드는 밋밋한 맥주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상황에서 크래프트 맥주는 맥주 자체의 독특함에 방점을 찍는다기보다는 “거대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드는 맥주라는 부분에 좀 더 무게를 실어야 한다”고 크래프트 펍 ‘사계’ 강대인 매니저는 말했다. 덧붙여 크래프트 맥주가 에일 맥주와 등가로 이해되고 있는 상황도 아쉽다고 전한다. “크래프트 맥주가 다 에일은 아닙니다. 이해를 위해 둘의 맛 차이를 종종 규정하지만, 라거와 에일의 맥주 맛이 정확히 차이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머릿속을 유연하게 한다면 크래프트 맥주를 더 품을 수 있을 것이라는 조언이다.

비온 뒤 죽순 솟듯이 생겨나는 브루어리들이 과연 다양성을 담보하느냐도 생각해볼 문제다. 우리나라 크래프트 맥주 시장은 좁다. 다양성으로 시장을 키우지 않는다면, 작은 파이를 놓고 서로 출혈 경쟁을 하는 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 브루어리들은 다양한 이름으로 맥주를 만들고 있지만, 페일 에일과 IPA로 쏠리는 경향이 있다. 2000년 초반 당시의 양조장들이 필스너, 바이젠, 둔켈(일명 ‘필바둔’) 세 가지 독일 맥주로 양조가 치우쳤던 것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의 쏠림이다. 쏠리는 무게중심을 잡는 건 양조장들의 의식에서 시작된다.

브루어리의 다양성을 위해선 설비의 다양성도 필요하다. 김포에 개인 브루어리를 준비중인 스티븐 박 역시 이 부분을 지적한다. “맥주 품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장비가 7이고 재료가 3이라고 생각합니다. 설비에 따라 맥주의 한계도 달라진다고 봐야죠. 최근 생기는 브루어리의 설비는 중국의 두 개 업체와 국내 업체 한 군데에 많이 기대고 있어요. 이 설비는 양조 과정에서 미세하지만 독특한, 공통된 특징을 남기기도 합니다. 최근 브루어리를 확장한 더부쓰의 경우 국내에 없었던 희소한 장비를 들여왔는데, 이 장비 덕에 바이젠을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기반이 생겼어요.” 다양한 설비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가파르게 증가하는 브루어리의 개수는 숫자에 불과해진다는 뜻이다. 음성의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는 병입 시설과 브루잉 탱크와 연결된 파이프로 시설 차별화를 이루고 있다. “맥주 생산은 사소한 공정 수백개로 이뤄져, 작은 것과 타협하는 순간 맛이 달라진다.” 스티븐 박이 힘주어 보태는 말이다.

맥주의 다양성을 방해하는 허들은 하나 더 있다. 맥주를 구성하는 맥아와 홉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상업 양조용 맥아는 미국 한 군데, 독일 한 군데 업체에서 대부분 수입하고 홉의 수입업체도 한정적이다. 생강, 오미자, 복분자 등을 활용해 맥주에 한국적인 개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많지만, 맥주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맥아와 홉의 다양성에 갈증을 느끼는 전문가가 많다. 코리아크래프트브류어리의 브루마스터 마크 헤이먼은 이렇게 말했다. “식재료는 첨가물 기능만 하기 때문에 정말 한국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개성 있는 맥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 고유의 맥아, 효모, 홉 등을 활용한 맥주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효모 실험실을 운영하는 이유도 이것이고, 한국 토양의 특성을 반영한 홉 재배도 시작했습니다.”

주세법 역시 여전한 돌부리다. 개정 이후 완화된 부분이 많지만, 맥주의 원가를 포함해 세금을 매기는 종가세 형식의 체계는 생산 투자를 가로막고 있다. 파주에 브루어리를 짓고 있는 크래프트원의 정현철 대표는 “좋은 재료를 쓸수록, 장비의 성능을 높일수록 세금이 늘어나는 구조라서 답답한 측면도 있어요. 수입 크래프트 맥주와 가격 경쟁력에서 밀릴 수 있다는 뜻이죠”라고 말한다. 보틀 숍(맥주 소매점)에서 음식을 팔거나 맥주 음용이 불가능하도록 제한한 법 체계 역시 크래프트 맥주 활성화의 걸림돌이라고 설명한다.

브루어리가 증가하는 만큼 크래프트 맥주 소비도 함께 증가할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다. 지금은 가장 큰 규모의 브루어리 하나에서 총력을 다해 크래프트 맥주를 생산한다면, 전체 크래프트 맥주 소비량을 모두 커버할 수 있을 정도다. 전체 소비량에 비해 브루어리가 과하게 많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부산 갈매기브루잉의 대표 스테판 터코트는 크래프트 펍이 더 많아지길 기대하고 있다. “미국과 달리, 한국은 브루어리에 위탁 양조하는 맥주가 많은 것 같아요. 브루어리가 직접 만들고 병입하는 맥주들이 앞으로 더 많아져야겠죠.” 퐁당 크래프트 비어펍의 이승용 대표는 “실험 삼아 맥주를 만들어보던 시기는 지났어요. 이젠 기회를 꽉 잡으면서도, 조심해서 전진해야 할 시기”라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