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망한 감독 전성시대

2015.06.03GQ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면 영화감독은 어떻게 될까? 어쩐 일인지 다음 작품을 하기 어렵지 않다.

 

영화감독 A가 만든 영화는 흥행에 실패했다. 유명 배우를 캐스팅했고, 제작비가 많이 들었다. 하지만 손익분기점에 못 미쳤다. A는 낙담했다. 개봉한 지 두 달 후 그를 만났다. “망하니까 책(시나리오)이 더 많이 들어와요. 이상해요.”

비단 A만 그런 건 아니었다. 몇몇 감독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총 세 편의 영화를 찍은 영화감독 B. 그의 입봉 작품은 크게 흥행 하지는 못했지만 평이 좋았다. 두 번째 영화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세 번째 영화는 비평, 흥행 모두 실패했다. B가 말한다. “두 번째 영화가 성공했을 때는 책이 거의 안 들어왔지만, 이번에 망하니까 여기저기서 책 주겠다고 한다. 너무 많이 들어와서 이젠 전부 거절한다.” 시나리오는 돌고 돈다. 여러 번의 각색을 거치고, 많은 감독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 그러다 갑자기 투자가 돼서 영화가 제작될 수도 있고 영영 만들어지지 않는 시나리오도 허다하다. 영화는 선택하고 선택 받는 우연의 연속이다.

오손 웰스는 말했다. “영화감독은 우연을 창조하는 사람이다.” 한 쇼트에 들어간 수많은 요소 – 연기, 의상, 대사, 앵글, 음악 등을 보통 감독이 선택한다. 그것들이 모여 우연의 조합이 되고 영화가 된다. 그렇다면 질문. 꼭 감독의 선택이어야 하나? 대답.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누가 말했는지 모를 그 빤한 말보다 증거가 있다. 아주 오랫동안 영화가 스스로 쌓아온 이름은 대부분 감독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예술적 성취와 스티븐 스필버그의 압도적인 흥행 기록은 두 감독의 이름을 영화판 밖에도 알렸다. 언젠가 이준익 감독에게 영화감독은 대체 뭘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감독은 제작자가 준 여러 개의 시나리오 중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골라. 의상팀이 의상을 준비해오면 그중에서 예쁜 옷을 골라. 옷을 입고 배우가 연기를 해. 연기를 잘하려고 노력할 것 아냐? 그중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연기를 골라. 그리고 말해. 오케이! 어때? 감독이란 직업이 얼마나 쉽냐고! 그냥 골라. 그게 다야.”(그의 말투를 살리고자 존댓말을 생략했다.) 영화감독은 오직 선택만으로 창조하는 유일한 예술가가 아닐까?

다시 질문. 영화감독이 예술가라면 영화도 예술인가? 영화가 만들어진 순간부터 논의된 쟁점이다. 사람들은 합당한 선에서 합의를 봤다. ‘대중예술’. 얼마나 근사한 정반합의 결과인가? 총인구 5천만 명 중에서 1천만 명이 1만원씩을 지불하는 상업 ‘예술’이다. 그 어떤 예술도 이정도로 많은 사람이 빅맥 세트보다 비싼 돈을 내며 경험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보편적인 예술. 수많은 사람이 느끼기에 1만원과 교환해도 아깝지 않을 만큼의 ‘감정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꽤 넓은 과녁을 준비해야 한다. 가족, 우정, 사랑, 평화, 지구 평화, 우주 평화, 은하계 평화, 4차원 평화, 5차원 평화, 결국 다시 가족. (말하자면 <인터스텔라>.)

보는 사람은 불특정한 대중이다. 그렇다면 만드는 쪽은 어떤가. 대중이 볼 예술이니까 만드는 사람도 폭 넓은 ‘대중’이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만드는 사람이 다양해야 과녁도 넓힐 수 있다는 논리. 이건 요즘 영화 제작 상황으로 이어진다. 시나리오는 대중을 상대로 모니터링을 거치고 그 결과를 참고해 수정한다. 투자자의 조언에 따라 좀 더 자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도 넣는다. 배우는 캐스팅되기 전에 이야기 와 분량에 대해 말한다. 그건 캐스팅의 조건이 다. 수정은 계속된다. 영화는 다듬어진다. 반들반들, 거친 면이 사라진다. 대중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관객은 감정을 공유하고 영화는 많은 표를 얻는다.

이쯤에서 ‘그래서 한국영화가 엇비슷하다, 거기서 거기다’라는 비판이 시작된다. 한데 이 말은 좀 지겹다. 영화에서 신선한 시도가 가능 하려면 투자자를 설득해야 한다.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다. 하지만 투자자는 기존의 흥행 공식을 예시로 들며 손익분기점을 넘기 위한 여러 가지 데이터를 제시한다. 수십억의 돈을 지키려는 노력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쉽지 않다. 그러니까 도통 해법을 찾기 어렵다. 영화가 선택의 결과라면, 영화를 선택하는 건 돈이다. 과연 이 문제는 영화만의 일인가?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마찬가지다. 영화에만 돈에 종속되지 말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비슷비슷한 영화를 좋아할 수는 없어도,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 이해할 수는 있다.

흥행에 실패한 감독도 관계자들에게 이해 받고 있다. 캐스팅이 문제였다면, 그 선택은 전부 감독이 했을까? 아닐 수도 있다. 대기업 투자 배급사에는 캐스팅 팀이 따로 있고 영화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편집이 문제였다면 그 선택은 ‘합의’가 문제였을 수도 있다. 어떤 영화 편집실엔 많은 사람이 앉아 있다. 감독, 프로듀서, 투자배급사 직원. 감독은 편집을 ‘허락’ 받으며 한다. 연기가 문제였다면 이런 경우도 있다. 어떤 배우는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으면 촬영을 거부한다. 그런 현장은 감독보다 배우의 입김이 더 세다. 관계자들은 모든 문제가 감독의 책임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게다가 이런 시스템 위에서 영화를 찍어야 한다면 감독의 역량이 꼭 크지 않아도 된다. 아니, 오히려 감독이 자신의 능력을 내세워 주도적으로 선택하려고 한다면 제작자는 곤란하다.

그렇다면 감독이 영화의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할까? 그건 구시대적인 발상일 수 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감독이 제왕적 결정을 할까요? 감독 혼자 만든다고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아요. 제작사와 감독은 파트너에요. 함께 좋은 영화를 만들려고 노력하는데, ‘이건 내(감독) 영화야, 아무도 건들 수 없어, 라고 주장하는 건 말도 안 되죠.” 여러 편의 조감독을 하고 이제 막 첫 작품을 준비하는 신인감독 C는 제작사에 대한 신뢰가 영화의 완성도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분명 훌륭한 제작자의 역량이 감독의 부족한 부분을 채운 경우가 많다. 영화사 명필름과 씨네2000, 비단길은 제작자의 능력으로 좋은 영화를 발굴한다. C가 말한다. “나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제작사가 있을까요?”

어떤 예술도 동일성을 추구하지 않는다. 대중예술도 결국 ‘예술’이라면 응당 다양성을 향하는 게 자연스럽다. 신인감독 C가 말한 나쁜 영화의 범주에는 베끼고, 낡고, 비슷한 영화도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스타 감독들은 대부분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다. 남들과 비슷하지 않은 자신만의 선택을 지키기 위해서다.(물론 경제적인 이득도 포함되어 있다.) 그들은 자신이 세운 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감독이면서 ‘스타’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꾸준히 새로운 연출 방식을 제시하고, 대중들의 동의를 얻을 때 받는 훈장이다. 한데 그 시작은 어떻게 가능 했을까? 한 명의 이름이 떠오른다. 차승재. 영화 제작지인 그는 자신이 만든 영화 제작사 싸이더스를 통해 김성수, 허진호, 유하, 장준환, 봉준호, 최동훈, 한재림을 입봉시켰다. 신인감독 각각의 선택을 지지하고, 커다란 울타리가 돼서 외부 침입을 막았다. 말하자면 그건 오래된 낭만 한국영화의 추억(이라고 적고 싶지 않지만 벌써 10년도 지난 일)이다.

A는 말한다.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수준이 형편없어요. 어디서 우라까이(베낀다는 일본말, 영화계 은어)한 이야기예요. 이런 시나리오를 주고받는 건 의미 없어요. 우리가 왜 영화를 하는지, 왜 영화를 시작했는지 모두 잊어버린 것 같아요. 돈만 벌려고 영화 시작한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되겠어요? 우리 모두 ‘좋은’ 영화에 감동을 받았으니까 영화를 시작한 거 아닌가요?” 감독에게 선택권을 줄 때 좋은 영화가 나올까? 견고한 시스템으로 만들면 흥행에 성공할까? 좋은 영화는 대체 어떻게 만들어지나?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일화. 그는 칸 영화제에서 상영하는 영화들이 예술성을 보장하는 위대한 작품들인지 의심했다. 정성일은 <리베라시옹> 기자에게 물었다. 기자의 답. “영화가 자기 돈을 들여서 예술을 하면 그건 별로 존경받을 만한 일이 아니야. 그건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러나 여기 온 감독들은 돈밖에 모르는 제작자를 꼬이고, 재미밖에 모르는 대중들을 홀리면서, 기어이 자기 이야기를 찍어서 우리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을 만든 거야. 그건 위대한 일이지. 그리고 그게 자본주의 시대에 어울리는 승리지.” (정성일, 정우열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 이다> 바다출판사) 영화에 기대하는 건 이해와 논리가 아니다. 선택의 일관성, 그것을 위한 투쟁, 끝내 쟁취한 합의로 만든 황홀한 이야기와 이미지. 그런 것이 가득한 ‘좋은’ 영화를 봤을 때 영화는 꿈이 된다. 그때서야 영화를 만들고 싶다. 지금 한국영화는 만들고 싶은 꿈인가? 새로운 꿈이 없다면 좋은 영화도 없다.

    에디터
    양승철
    ILLUSTRATION
    MUN SU 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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