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위태로운 대학교

2015.07.07GQ

지금 대학은 고등학교와 기업의 위태위태한 징검다리가 됐다. 돌과 돌 사이가 너무 멀어 아무나 건널 수도 없는데 떨어지면 영영 올라갈 길도 없어 보인다. <진격의 대학교>를 쓴 사회학자 오찬호는 이렇게 말했다.

 

<진격의 대학교>를 읽어보니 지금 대학생은 30대 직장인보다 엄혹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과장이 아닌가? 다 사실이었다. 이 정도인 줄 몰랐다는 반응이 가장 많다. 전작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도 대학생 얘기였다. 이전 것은 주장이 강했고 이번에는 르포에 가까웠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이제 이게 사실이라는 걸 다 안다.

비정규직의 인권 관련 수업 중 학생이 했던 “그렇다고 정규직을 날로 먹으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게 당연한 세대, 친구들이 있다. DNA 자체에 그런 게 새겨졌다. 경쟁 완전체다. 그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것 자체가 좀 없어 보이는 행동이다. 현실이니까. 예전에 “그렇게 공부 안 하면 대학 못 간다” 했을 때는 대졸자와 고졸자 사이의 차별이 있었다. 지금은 더 노골적이다. 비정규직 시위하는 걸 보면서 “저 봐라, 공부 안 해서 저런 짓 하고 있다” 는 얘기를 한다. 수많은 사람이 비정규직이 되는데도, 그런 가치관으로 자라는 거다. 어른들이 직무유기를 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 어른조차 다른 삶에 대한 가능성을 몰라서 아닐까? 더 나은 것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이성이 제대로 작동한다면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도 깊어져야 한다. 그들은 “너희는 왜 나처럼 돈을 벌지 않느냐”고 한다. 내가 어떤 것을 얻는 과정과 너의 노력, 성실, 열정을 동일선상에서 비교하면 안 된다는 걸 모른다. 끝없는 세대 갈등의 시작이다. 초혼 연령이 높아지고 출산율이 하락하는 것은 그런 나라에 대한 저항이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마주하면 어떤 느낌을 받나? 도올 김용옥 선생은 그들의 무감에 대한 충격을 말했다. 사회학 강의를 9년 정도 했다. 동일한 이야기를 매년 더 약한 버전으로 한다. 내가 살고 있는 경제 제도에 대한 의심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초현실적인 질문을 한다. “그런다고 자본주의가 없어집니까?” 물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과거보다 이런 질문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다른 생각을 갖고 있어도 굳이 논쟁을 펼치지 않는다. 취업에 도움이 안 되니까. 이 친구들은 민주주의가 훼손됐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가슴 아파하지도 않는다. 유명인이 쓰러졌다고 하면 걱정하지만 민주주의가 훼손됐는데도 가슴이 아프지는 않다. 그게 중요하다고 가르친 사람도 없고 경험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세월호 때도 기성 세대의 책임, 성장의 패러다임, 역사와의 인과관계를 추론하는 수업을 하려고 했다. 그때의 반응은 ‘안타깝고 슬프지만 그게 무슨 사회 구조의 문제냐’는 거였다. 경제 민주화, 재벌 경제 독식, 비정규직 같은 문제가 다 연결돼서 나타나는 문제인데 “그걸 왜 그렇게 연결시키느냐”고 음모론적으로 제기하는 거다.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여유가 없는 건가? 요즘 내가 느끼는 것은 나를 불온하게 보는 시선이다. 어느 순간 누군가의 발언을 정치적이라고 생각 해버린다. 사상적으로도 무장하고 있는 것이다.

방어적인 것을 논리적인 것으로 착각하는 건가? 지면 죽는다는 건 본능으로 아니까. 대학은 원래 사고에 균열을 일으키는 과정이었다. 거의 모든 대학이 경영학 위주로 바뀌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어느 순간까지는 이 친구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더 강한 균열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취업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졌다. 내가 죄를 짓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4년 전에 1학년이었던 학생이 내 수업을 굉장히 즐겼다. 공부도 잘했다. 그러다 공무원 시험 준비한다고 2년 휴학했다가 최근 학교로 돌아와서 내 수업을 다시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너무 즐거웠는데 이제는 적응이 안 된다.” 완전히 공무원 시험 모드가 돼 있으니까. 시험에는 답이 있는데 강의실에는 답이 없고 계속 달리 생각하라고 하니까. 결정적인 사례다.

대학의 이런 분위기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버티고 있나? 그게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대자보로 표출됐다. 대학의 중심이 워낙 폭력적으로 변하니까 원래 있던 소수가 아날로그 감성을 선택한 경우다. 요즘 학교에서는 8학기 만에 졸업하는 친구가 절반밖에 안 된다. 40퍼센트 가까이 9학기를 다닌다. 모자라는 학점을 채우거나 휴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학점을 채우지 않고 신분을 연장하는 거다.

그렇게 얻을 수 있는 것은? 취업할 때 졸업 예정자만 뽑는 경우도 있다. 졸업자가 가도 뭔가 검증을 한다. “왜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안 했는가?” 뭔가 결함이 있는 듯한 느낌으로 묻는다. 그런 공포. 실제로 기업이 그렇게 하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그 공포가 이미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떻게든 결함을 없애야 하기 때문에 SNS를 세탁하는 것과 똑같은 거다.다른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거다. 여행조차 스펙으로 만들어야 하니까. 페이스북 같은데서 사라지는 친구도 많다. 취업이 안 되니까 중심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버티려면 집이 탄탄해야 한다. 하지만 정작 나도, 윗세대도 너무 힘드니까 별 감정이 없다. 청년 세대의 문제는 장기적으로 너무 큰 문제인데, 어른들도 힘드니까 오히려 얘들을 경쟁적으로 밀어내고 싶은 거다.

다른 나라도 이런가 하고 생각해보면. 일본도 취업률 심각하다는 얘기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런데 우리처럼 토익 시험을 다 보지는 않는다. 토익을 다 본다고 취업률이 늘어나는 건 상식적으로 안 맞는 얘기니까. 그러니까 사회에 철학이 좀 있으면 현실이 힘들어도 그 안에서 존엄성을 지킬 여지가 있다.

일본은 그래도 ‘개인’이라는 개념이 있지 않나? 한국은 개인이 개인으로 존재한 적이 없는 나라고. 한국에선 직위, 타이틀 없이는 개인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평등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개인은 존엄을 지킬 권리가 있는데 비정규직이 시위를 하면 “그러게 그때 왜 공부 안 했어?” 그러는 거다. 백화점에서 마스크 쓰고 일하니까 그만두라 그러고. 우리는 가까스로 평민이 되기 위해서 무수한 노력을 하고 있다.

점점 내 삶이 망가지고 있는 것 같다거나 회사에 가고 싶지 않다거나, 나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등의 질문을 받으면 뭐라고 대답하나? 이 루트를 포기하고 어떤 대안 공동체에 들어가서 사회와 고립되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적응하는 것을 그만두라는 게 아니다. 순리대로 살되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를 알면 그 길 자체가 조금 세련될 수 있다는 얘기다.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목표를 정하자는 거지,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가를 고민하자는 게 아니다.

논쟁의 경험조차 없기 때문에 늘 극단적인 것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거 아닐까? 지금 우리가 배우는 토론이라는 게 남을 제치는 방법이다. 퀴어 문화 축제에 반대하는 엄마들 사이트에 가보면 자신은 동성애에 대해 비판할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 자유가 세상에 어디 있나?

말하자면 전쟁 상황 아닌가? 소수와 약자는 유린당하거나 죽을 수밖에 없는 구조. 전쟁 시 살인은 살인 취급하지 않으니까. 전쟁 전이라면 평화적인 외교를 요구하겠지만, 전쟁 났으니까 피난가야 한다. 혹은 사교육, 대학, 취업, 지위로 무장을 해버리는 거다.

자꾸 원점으로 돌아간다.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꾸준히 말하는 것. 그런 사람을 조롱이라도 하지 말라는 거다. 세상의 균열, 다른 시각, 지향점과 비판점을 보려는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조롱의 개념은 무지 넓다. 지금 이게 하고 싶은데 나중에 하라는 것도 넓은 의미의 조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욕구는 지금 현실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전제가 있는 거니까. 그것만 하지 않더라도, 펜을 들고 있는 사람은 자기 독자가 있는 거다. 더 공격적으로 쓸 수 있고, 여론이 형성되면 정책으로 연결되는 거다.

지금 대학의 정서는 억울함 아닐까? 그래도 현장에서 희망을 발견한다면? 지금 현실이 지나치게 많은 걸 요구하고 있다는 공감대는 생긴 것 같다. 전에는 없었다. 경쟁이라는 게 잘난 놈이 뽑히는 게 아니고, 비슷한 사람을 밀어내는 개념이 됐다. 왜 안 되는지, 왜 힘든지에 대한 이유를 모르고 갈피도 못 잡는다. 자기에 대한 책망도 이미 포화됐다. 그걸 사회구조로 돌려야 한다. 바늘 구멍이 늘어나야 한다.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게 아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보는 것은 아주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다.

    에디터
    정우성
    그림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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