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도 소통이 되나요?

소통이라는 단어가 빈번하다. 하지만 나 혹은 너의 말과 생각이 아니라 소통이 중심에 놓이면서, 소통이 무엇이었는지 헷갈리게 됐다.

정수진은 “한국 미술에서 많이 발견되는 ‘개인의 세계’에 빠져 있는 젊은 작가들을 중심으로, 도상들이 우글우글하면서 파편적이고 분열적인 서사들이 가득한 회화들의 효시(엄격한 자유로움, 정수진 전 리뷰, 이선영, 국립현대미술관 웹진 MU)”로 평가받는다. ‘탈중심’, ‘탈이성’ 같은 단어와 관계없이 ‘포스트모더니즘’이 농담으로도 쓰이던, 세기가 바뀌고 나서의 상당 기간 동안 정수진의 작품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현대미술은 으레 그림과 별 상관없는 말들의 잔치가 되곤 하지만, 정수진은 물러서지 않고 입장을 밝혔다.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의미냐”고 대놓고 물었고, 언젠가 그들의 의문에 대해 그녀는 이런 식으로 답했다. ‟반드시 무슨 의미인지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소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저는 오히려 이 그림은 나와 맞지 않는구나, 우리는 이렇게 다르구나 하는 불일치로부터 소통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즘 인스타그램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댓글 가운데 “우리 소통해요”가 있다. 대충 터놓고 지내자는 의도인 줄은 알겠어도 용법이 어색해서 눈에 띈다.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이 문장은 “우리 맞팔해요”와 가깝다. ‘소통’이라는 해시태그도 자주 발견된다. 소통으로 검색하면 약 1천만 건의 결과가 나온다. 각각 2천만 건이 넘는 ‘먹스타그램’과 ‘셀스타그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많은 양이다.

해시태그를 무차별 삽입하는 게시물에 선팔, 맞팔, 팔로워, 일상 등과 함께 삽입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얼굴 사진 공개를 ‘소통’이라고 부른다. 가볍게 찍은 얼굴 사진이나 웃기는 표정의 얼굴 사진은 찾아볼 수 없다. 문자나 전화가 아니라 대면하는 게 진짜 소통이라는 뜻일 리도 없고….

IT 산업의 발달과 함께 소통이 점점 더 강조되고 있다. 인터넷을 한다거나, 문자 메시지를 쓸 줄 아는 어른에게 “소통에 능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건 좀 된 얘기지만, SNS 계정을 개설한 어른에게 “적극적으로 소통한다”고 칭찬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새로운 IT 기술에 얼마나 빨리 적응하느냐가 얼마나 소통 능력이 뛰어난가를 가늠하는 기준으로 자리매김했다.

새로운 소통 방식은 새로운 논쟁을 낳았다. 이를테면 선배와 약속시간을 조정하다가 “다섯 시는 어려운데, 여섯 시는 어때요?”라는 문자를 보냈다. 선배는 “그래, 그럼 여섯 시에 보자” 고 답장했다. 여기에 ‘네’라고 답하지 않는 건 소통에 어긋나는 것인가 아닌가. 좀 더 민주적인 차원으로 옮겨간다면, 나와 페이스북 친구가 아닌, 내 친구의 친구인 인물이 내 글을 공유해서 정반대의 의견을 덧붙이는 경우. 이것은 소통을 넓히는 것인가, 쓸데없는 자기 증명인가.

IT 매체를 통해 불거지는 소통의 혼란은 아직도 한국인에게 유교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준다. 알다시피 조선시대에 유교는 하늘로부터 정당성을 부여받은 종교이자 학문이었으며, 무엇보다 도덕이었다. 유교국가란 도덕국가와 다르지 않았다. 헐버트 목사는 <대한제국의멸망>에서 조선인의 종교관을 이렇게 요약했다. “한국인은 사회 속에 어울려 있을 때는 유교적이며, 철학적일 때는 불교적이며, 어려움을 만날 때는 무속적이다.” 다른 건 몰라도 사회 속에 어울릴 때의 모습은 여전히 유효하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송호근 교수는 저서 <시민의 탄생>을 통해 유교가 무너지면서 근대적 개인이 등장하는 과정을 사회과학적으로 통찰한 바 있다. 그는 언문의 역할을 결정적인 것으로 봤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밀본의 지도자 정기준이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을 반박하면서 말했던 것과 같다. “백성이 글을 알면 읽게 되고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건 즐거운 일이다. 그 즐거움을 알게 되면 결국 그들은 지혜를 갖게 된다. 누구나 지혜를 가지면 쓰고 싶어진다. 무엇을 위해 쓰겠는가. 욕망이다. 그들의 욕망은 결국 정치를 향하게 돼있다. 국가의 정책에 관여하려 들 테고,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려 들 것이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것은 백성을 한문으로 쓰인 성리학적 질서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성은 언문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로 침투했다. 언어결정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언어의 힘이 명백히 드러나는 역사적 근거다. 하지만 언문이 조선을 근대로 이끄는 데 걸린 시간은 약 4백 년이었다. 물론 외세를 철저히 막은 덕이긴 했다. 지금의 한국 사회가 유교와 서먹해진 기간은 넉넉하게 갑오개혁을 기준으로 해도 약 120년이 지났을 뿐이다.

그래서 소통이 언어가 아닌 사진으로 이루어지는 상황에 뜻밖의 기대를 걸어볼 수도 있겠다. 젊은 세대의 신조어를 한탄하거나 부적절한 한글 사용을 지적하던 게 불과 몇 년 전이었지만 SNS의 폭발과 함께 그것은 낡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존재하지 않는 국면이 됐다. 해시태그 ‘소통’을 위한 셀카를 두고 포토샵이 과하다고 비난은 할지언정 도덕과 연관 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미지를 통해 소통을 다른 차원에 놓으면서 유교적인 관습과 점차 멀어져가는 상황을 점쳐볼 수 있다.

그보다는 느리게 유교적인 의미의 언어 사용도 바뀌어갈 것이다. 언어가 지금과 비교해 아무리 해괴하게 바뀐대도 소통이라는 목적을 지양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 결과로서 집단 간 소통의 단절이 일어난다 해도 모든 분야가 전문화 되어 가는데 언어만 예외일 수 없다. 다만 한국의 시민사회에서 통용되는 소통의 의미는 좀 더 성숙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소통은 시대정신이다. 광고 잘하는 기술도 소통, 블로그 방문자 늘리는 방법도 소통, 한국의 최고 권력자가 가장 못하는 것도 소통이라고 한다. 글을 잘 쓰는 것과 리더십이 출중한 것까지도 이제는 소통을 위한 목적만이 남았다. 아름다운 문장을 쓴다거나 프로야구 감독 김성근처럼 아끼고 아껴서 칭찬 한마디를 하는 리더십은 사람들에게 문학처럼 소화되고 있다. 예외의 것, 너무 멀리 있는 것, 거의 가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소통은 마케팅 용어이기도 하다. 소통이라는 해시태그를 달면서 뭔가 따뜻하고 평화로운 기분에 휩싸였다면 소통의 여러 가지 의미 가운데 마치 그것이 행복의 열쇠인 것처럼 기업이 포장해놓은 맥락을 취한 것이다. 또한 힐링이 그랬듯이 전혀 상관없는 문제의 해소를 통해 진짜 문제가 해소되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잘 살고 있다는 안심을 얻는 것이다. SNS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소통이 아니라 소통 능력이라는 용어가 더 빈번하게 쓰이고, 소통 능력을 영어, 자격증, 봉사활동 옆에 쓸 수 있는 단어로 소비한다. 최근 들어 글쓰기 책이 비정상적으로 많이 출판되는 것도 이 텅빈 소통과 관련이 있다.

소통을 타인을 헤아리는 기술로 판단하는 오류다. <시민의 탄생>은 설명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체로 개인주의를 태동시킨 의식과 관행, 정신적 자질이 ‘근대적 개인’을 빚어낸 질료”이며, 이 “‘자아 중심주의’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이 ‘자아의 발견’은 개별 인간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을 낳았다”고. ‘자아의 발견’은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이해로 이어진다. 소통은 개인과 개인이 만나는 장이다. 개인이 먼저 관심을 둘 쪽은 ‘나’이지 소통이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소통과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 현대미술가라지만, 어떤 현대미술가의 개념은 소통에 관한 단초를 준다. 미술가 정수진은 다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라는 것이, 두 가지 극성에서 오는 모순을 탐구하는 영역이잖아요. 제가 보는 빨간색과 다른 사람이 보는 빨간색이 같은 느낌인지 알 수 없어요. 제가 인식하는 그것만이 진짜인 거죠. 하나의 절대적인 것이 있는지 아니면 내가 느끼거나 저 사람이 느끼거나 제3자가 느끼거나, 수백만의 사람이 느끼는 것이 다 다를 텐데, 그 다른 모든 것이 진실인지. 이 두 가지가 주는 모순을 해결하려다 보니 철학적인 쟁점이 생긴 것이라고 봐요. 그런 것들에 대한 관심이 그림에 반영되는 것이에요. 과연 저 밖에 또 다른 것이 있을까.(작가 정수진과의 인터뷰, 최진이, 하나은행)”

내가 틀릴 수 있는 가능성, 나아가 인간이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긍정하는 부정의 정신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의 소통 능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나’와의 건강한 관계로 인해 자기 부정이 힘겹지 않은 사람일 테다. 인간의 정서와 가까운 첨단의 소통 방법이 앞으로 얼마든지 나오겠지만, 소통의 출발이 ‘나’라는 건 변치 않을 것이다. 해시태그 ‘나’는 검색 결과에 여자 스팸 사진만 나오니 시간 낭비할 필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