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2015.08.06정우영

‘물의’를 일으킨 문제적 인물이 반사적으로 사과를 한다. 하지만 그게 진짜 사과가 아니란 건 듣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안다. 사과 잘~ 하는 것과 사과 잘하는 것은 꽤 다르다.

‘물의’는 한나라의 반고가 편찬한 역사서 <전한서>에 등장하는 말이다. 물의 자체가 나쁜 뜻은 아니다. 고사 속의 사기경은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겼는데, 때로는 덮개가 없는 수레를 타고 들판을 산책하고, 술에 취하면 큰 방울을 흔들면서 조가弔歌를 부르는 등 세상 ‘물의物議’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현대의 시각으로 보자면, “걘 좀 아티스트 같아”라는 식의 평판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게 ‘물의’이고, 그것이 기꺼운 사람이라면 신경쓰지 않을 시선이다.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는 “수고하셨습니다”처럼, 잘못을 저지른 유명인에게서 자동으로 튀어나온다. 최근에는 고영욱이 미성년자 성폭행으로 복역을 마치고 출소하는 현장에서, 바비킴이 기내난동혐의에 대한 첫 공판 후의 인터뷰에서 전해 들을 수 있었다. 고영욱은 그 정도 말로 넘길 수 없는 중범죄를 저질렀고, 바비킴은 좀 더 정확하게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어 보였지만 모두 그 한마디였다.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는 사과가 아닌 관습이 다. 문제적 인물이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진에는 하나같이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물의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기자가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라고 적고 있다.

정확히 혹은 세세히 말할 수 없을 때 관습적인 말이라도 꺼내놓는 상황을 모르지 않는다. 그때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만큼 적절한 말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사과하기로 마음먹었다면, ‘물의’라는 개념, 즉 다른 사람의 입방아로부터 사과를 진전시킬 수는 없다. ‘물의’에는 대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도덕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한국에는 사과도 없고 대응도 없다.

뇌과학자 정재승과 커뮤니케이션 컨설턴트 김재호는 공동 저서 <쿨하게 사과하라>에서 사과할 때 절대 쓰지 말아야 할 표현 세 가지를 소개한다. “미안해, 하지만”, “만약 그랬다면, 사과할게”, “실수가 있었습니다.” 그 정도는 누구나 안다고 코웃음칠 만한 제시어다. 그런데 당대의 문장가가 말한다. “이렇게 입장 표명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만든 것은 모두 내 탓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내 소설이 착하기만 하고 현실을 수용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어요.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아름답다는 것을 내 문장으로 증거하고 싶었고, 내가 느끼는 온기를 함께 나누는 사람이 내 독자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전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에 대해 소설가 신경숙은 처음에는 부정을, 두 번째는 이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이 입장이 “미안해, 하지만”이다.

“만약 그랬다면, 사과할게”도 보인다. “처음에는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모두 제 탓입니다. 습지가 없는데 왕골이 돋아나겠어요. 문장을 대조해보면서 이응준씨가 느닷없이 왜 이랬을까, 의문을 안 갖기로 했어요. 대조해보는 순간 나도 그걸 믿을 수가 없었어요.” 나도 믿을 수 없는, 그러니까 사과를 해야 하는 자신은 빠지면서 제 탓이라고 밝힌다. 표절 논란이 일어난 문장을 대조하는 와중에 이응준과의 사적인 관계에 대한 의문을 가졌다고 언급하면서 사과의 전제를 흐린다.

“실수가 있었습니다”도 빠지지 않는다. “어느 자식(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멀리 가서 제 역할을 다하는데, ‘전설’은 태어나면서 나한테 비수를 들이대더니 21년이 지나 나를 찌르는구나, 이제 내 품으로 돌아오라고 해서 가슴에 묻어야 할 것 같아요.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지, 질문으로 남겠죠.” 제 역할을 다하는 작품이 있고, 제 역할을 못하는 작품이 있으며, 후자는 질문으로 남을 것이라는 말로 그것을 누구도 진실을 모르는 예외적인 영역으로 넘긴다.

진정한 사과에는 먼저 잘못에 대한 인정이 필요하다. 하지만 스스로를 속이면서 속는 줄 모르는 게 인간이다. 인정은 생각보다 높은 지적, 인간적 성숙을 요구한다.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있는 사회적 성숙이 좀 더 현실적이다. 이 사건에서는 먼저 출판사 창비의 대응이 부족했다. “굳이 따진다면 오히려 신경숙 작가의 음악과 결부된 묘사가 더 비교 우위에 있다고 평가한다”고 말했으며, “인용 장면들은 두 작품 공히 전체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 않다”고 변호했다. 적어도 사회적 성숙은 ‘비교우위에 있는 문장이므로 표절이 아니다’, ‘주제와 상관없는 문장이라면 표절 운운할 수 없다’는 표절에 관한 상식과 배치되는 해명을 걸러내는 것이다.

최근에 화제가 된 사과문은 유명 논객인 한윤형으로부터 나왔다. 그에게 데이트 폭력을 당했다는 한 여성이 블로그를 통해 폭로한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이어서 한윤형은 이 폭로에 대한 해명글을 올렸다. 그 첫 문장이다. “제 구여친이 자신의 블로그에 서술한 저의 데이트 폭력에 대한 사과 및 해명서입니다.” 신뢰를 구하는 글에 어떻게 ‘구여친’이라는 편의적인 표현을 쓸 수 있을까. 구여친이라고 친근하게 부를 만한 서술이 이어지지도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저는 피해자와 연애를 할 당시에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과거에도 몇 번이고 사과를 했지만 다시 한 번 피해자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연단에 올라 사과문을 읽는 듯하다. 이미 공적인 사안이 됐다는 건 중요치 않다. 가해자가 ‘피해자’라고 부르는 어색한 광경은 무엇이며, 건조한 사과도 과연 사과일까. 무엇보다 여성이 제기한 폭력 사건이었다. 학대 여성이 침묵을 깨는 데는 사회적 낙인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그녀는 구체적으로 이를 언급했다. 한윤형은 자신의 미래를 걸고 폭로를 택한 피해자를 향해 섣부른 사과를 택했고, 적절치 못한 대응이었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사과문을 첨삭한 이미지가 오히려 적절한 대응을 보여준다. 한윤형의 해명문에서 사실관계와 다르다고 서술한 모든 부분이 삭제되고 “저는 피해자와 연애를 할 당시에 데이트 폭력을 행사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피해자에게 사과를 드립니다. 제가 책임을 질 수 있는 방식에 대해 의논하고 고민해보겠습니다”라는 문장만 남겼다. 곧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합니다.” (한윤형의 해명글에 대한 그녀의 반박글이 있었고, 현재 그는 “모든 상황을 사과드리고,” “자신을 깊게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겠다”고 밝힌 상태다.)

하지만 대응에 관한 상식은 죄를 지은 유명인도 부족하지만, 그들을 대하는 한국인도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에 유명인이 일으킨 물의에 관해 농담 따먹기 하는 것과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과 소통할 때의 상식이 어떻게 같은가. SNS와 댓글창, 트위터에서 자주 펼쳐지는 지옥은, 세대가 바뀌어서라기보다 지금까지 확인할 길 없었던 사람들의 대응 미숙을 이제는 볼 수 있게 된 결과다. 여기에서도 저녁이 없는 삶은 그 밑천을 드러낸다. 눈은 높아졌지만 그것을 감당할 자존감을 견고하게 다지는 절대적인 시간은 부족해지면서, 한국인은 들으면서 이해하기보다는 말해서 단정짓고 싶어 한다. 역으로 사회적 발언권을 가진 사람들은 그의 글이 누굴 이기거나 자신을 증명하는 것보다는 일에 가깝다는 상식이 부족하다. 대응은 먼저 사회적인 의미의 일을 잘하려는 노력이다.

이기호의 소설 <사과는 잘해요>는 죄를 짓기에 앞서 자백해야 했던 두 명의 주인공이 다른 사람의 사과를 대신해주는 일을 하는 카프카적 사건을 다룬다. 소위 ‘앵버리 장사’를 하는 불법 시설에 갇힌 그들은 죄를 말하지 않으면 무차별적 폭력을 당하는 상황에 처한다. 죄를 말해도 맞지만 조금은 덜 맞는다. 일단은 하지 않은 일을 자백하고 나중에 죄를 저지르는 대응은 그렇게 탄생한다. 무조건 사과부터 하고 덜 맞는 게 대응이라고 배운 그들은 다른 사람의 사과를 대신해주는 방법 또한 대신 맞아주는 것이라고 여긴다.

피학적 폭력의 내면화라고 부를 수 있을 이 끔찍한 가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응은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회를 통해 적절한 대응을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과 학교와 어른의 교육을 통해 사과를 배우는 게 먼저다. 그러고 보면 미안해하는 마음은 그의 대응이 미숙해도 알아차리곤 했다. 반성도 사과도 비판도 대응도 빠진 말이 산을 이루었어도 그것만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에디터
    정우영
    일러스트
    문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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