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나는 힙스터다

2015.08.31정우영

힙스터가 가장 싫어하는 자신에 대한 수식은 힙스터다. 그것은 힙스터의 자의식이면서 매체의 호들갑과 어른의 질타에 의해 조장된 가상이기도 하다.

90년대생 100명의 사진과 인터뷰를 실은 지난 2015년 1월의 기사 ‘90년대생’ 에는 “지금 서울에서 힙스터란?”이라는 질문이 있었다. 상당수가 “힙스터가 뭔지 모르겠다”고 답했다. “‘힙합 갱스터’의 줄임말인가요?”하는 반문도 있었다. (밴드 검정치마의)조휴일이 힙스터에 관해 자신의 블로그에 쓴 글에 따르면 “힙스터가 뭔지 모르겠다”는 것이야말로 힙스터를 위해 준비된 최후의 답변이지만, 그가 말하는게 360도에 있다면 그들의 답변은 0도에 있다. 물론 힙스터가 뭔지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뜻밖에도, 힙스터 문외한의 답변에서 힙스터가 누구인가에 관한 힌트가 나온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하는 건 미덕이다. “모르겠는데요” 말고 “생각 좀 해볼게요”가 적절한 순간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힙스터라는 생소한 단어를 마주하고도, 누구에게 묻지도 검색해보지도 않았다. 힙스터는 알면서 모른 척은 해도 정말 모르지는 않는다. 적어도 힙스터는 호기심이 있으며 호기심을 해결해보려는 사람이다.

몇 년 전부터 힙스터가 소수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감각적으로는 지역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새로운 것에 ‘힙스터의 무엇’이라는 한마디가 덧붙었고, 문화적으로는 피치포크, 스키니 진, 픽시 바이크, 뿔테 안경 등과 함께 거론되었으며, 사회적으로는 ‘하위문화를 소비문 화로 소화하는 부류’, ‘유행을 피해다니면서 유행이 되는 부류’로 정의되었다.

그런데 최근 하나의 계기가 있었다. 밴드 혁오가 <무한도전>에 소개되고 음원 차트를 휩쓸면서, 힙스터들 사이에서 “우리만 알던 걸 뺐겼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무한도전>에 나온 다는 건 아이돌을 뛰어넘는 거대한 폭풍을 뜻하니까. 즉각 많은 사람이 힙스터를 욕하기 시작했다. 먼저 아는 게 자랑이냐고 목소리를 높였는데, 안타깝게도 그건 충분히 자랑이다. 정보화 사회라고 떠들면서 힙스터는 예외인가. 기껏해야 감식안이라고 하지만, 감식안이야말로 대단하다. 감식안에 속고 감식안을 후려칠 때 인사동의 맨홀 뚜껑이 만들어지고 지역사회에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악영향을 끼친다. 더군다나 젊은이에게, 새로운 것은 생명이다.

20대의 동어반복으로 삶은 구성된다. 20대 때 마음을 사로잡은 것, 옳다고 주장한 것, 깨지면서 배운 것이 뿌리처럼 영양분을 공급한다. 지금 사회적으로 이야기되는 ‘꼰대’는, 모르긴 몰라도 젊은 시절을 배반했다기보다 젊은 시절에도 충분히 새롭지 않았을 것이다. 이를테면 한국에는 없고 영미권에는 있는, ‘컬리지 록’ 같은 분야가 상징적이다. 대학생이 듣는 음악은 다른 대중음악과 다르다는, 진보적이라는 인정이 있었다. 컬리지 록에는 비트, 히피, 모드, 펑크 등 지난 세기 젊음의 수많았던 진보적인 지향이 함축되어 있다. 하지만 힙스터와 그들을 구분 짓는 차이 또한 분명하다. 소비문화의 기반에서 작동한다는 것과 남들과 다른 것을 피상적으로 좇아 취향으로 환원한다는 사회적인 관점에서의 한계다.

힙스터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비판할 때, 으레 젠트리피케이션을 예로 든다. 빈곤 계층이 사는 지역에 젊은 사람들이 몰리면서 지역에 활기가 생기면 중상류층이 이동해오고 지역민들은 떠나가는 현상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연남동, 해방촌, 성수동 등의 지역에서 몹시 활발히 진행 중이다. 그래서 힙스터가 젠트리피케이션의 주범이라는 해외의 분석틀 또한 그대로 가져 온다. 하지만 한국의 젠트리피케이션을 이끄는 건, 동네가 뜨기도 전에 동네를 채우는 부동산 업자, ‘물이 좋다’는 풍문을 좇아온 놀 데 라고는 없는 젊음, ‘오빠와 여자친구’다. 어쩌면 그들 보다도 그들이 보여주는 몰상식과 염치없는 행동이다. 기형적인 사회와 시민의 소양 부족에서 비롯되는 문제를 힙스터에게 덮어씌우는 건 아닌가. 힙스터는 원래 영향력을 끼칠 생각이 없는 부류고, 특히나 한국에서는 정말 영향력이 없는 소수다.

힙스터가 자본주의의 초상이라는 비판을 힙스터 또한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에서 힙스터를 다루는 모든 글에 인용되는 ‘아메리칸 어패럴 브이넥’은 안 산다. 유행이 지났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에서 브이넥이 가진 맥락을 좋아할 리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취향의 괴물이라고 정의하고, 소비밖에 모른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인간의 결정은 그리 간단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남들과 다른 옷을 찾는 와중에도, 자신이 사는 곳의 맥락, 내게 어울리는 옷, 내가 가진 옷과 어울리는 옷, 이 옷을 입었을 때 어떻게 보일지를 가늠한다. 이것이 비단 자본주의 사회에서만 이루어지는 일일까.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이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본 사람들이다. 소비를 통해 배우는 것이지만, 이때의 소비를 돈만 쓰는 것으로 보는 건 너무 편협하다. 새로운 것은 빤하지 않은 걸 수없이 소비하면서 만들어진다. 자신만의 새로운 옷을 만들고 싶은데 스파 브랜드의 옷만 구매한다? 고심하면서 정확해지는 소비를 감추고 소비 자체를 죄악시하면서 엉터리 문화가 만들어진다.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사진을 시안 삼아 자신이 입지 않을 옷을 생산한다.

힙스터는 신자유주의 사회라는 한계 안에서의 젊은이들의 모색으로 보인다. 물론 그들이 만들어놓은 환경이 아니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자신들의 혁명과 달리 동기도 전망도 형편없다고 비난한다. 지금의 혁명은 다분히 ‘힙스터스러운’ 애플과 구글에서 시작되고 있는데. 너그러이 보자면 바보가 되지 않는 게 젊음인가, 부조리하지 않은 게 젊음인가 싶지만, 힙스터를  용하는 어른은 흔치 않다. 

다만 없다고는 할 수 없어서 다행이다. 2003년에 문을 열어 지금까지 지속하고 있는 홍대 앞의 바이자 라이브 클럽이자 커뮤니티인 공간이 있다. 이 공간은 일본의 한 밴드를 중심으로 일본 음악을 찾아 듣는 모임에서 출발했다. 차트에 등장하는 영미권 음악만 들어도 힙스터였던 시절에, 일본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대안적이었으며 힙스터에 가까웠다. 그리고 2005년, 그들은 또 한 번 새로운 길을 찾는다. 한 명의 사장이 운영하던 공간을 협동조합 형태로 전환했다. 조합원들이 번갈아가면서 바를 지키고, 최소한의 임금만 받았으며, 각자 이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일을 기획하고 실행했다. 거창한 뜻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 반사회성으로 미루어보건대 지금의 힙스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새로운 걸 좇는다는 자의식이 있었으며, 유행하는 것들에 배타적이었고, 이상과는 달리 결국 소비지향으로 흐르는 모순을 갖고 있었다. 지금에 와서는 특별한 발상도 아니지만, 당시 그 골목에서 술집을 운영하던 점주가 했던 말이 당시의 시각을 대표한다. “협동조합? 장사가 무슨 장난인 줄 알아?”

그의 말처럼 장사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 공간의 일부였던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끊긴게 치명적이었다. 힙스터들은 나이를 먹어갔다. 불가피하게 더 이상 뿌리가 자라지 않았다. 애초에 수익은 바라지 않았기에 논외로 한다고 해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사라져갔다. 하지만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노력으로 젊은 시절을 보낸 어른에게, 새로운 것은 반짝이는 것만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오래된 걸 지키는 게 새로웠다. 국세청에 따르면, “2012년 폐업한 개인사업자는 83만 3195개로, 절반 이상이 3년을 버티지 못하고 셔터를 내렸다.”

이 공간은 매년 예닐곱 개 이상의 자체 기획 이벤트를 진행하고, 스무살 이상 차이나는 어른과 젊은이가 모두 찾으며, 여전히 협동조합 체제를 고수하고 있다. 조합원 가운데 한 사람은 말했다. “어렸을 때 이 모임 저 모임, 새로운 모임을 많이 기웃거렸죠. 그러면서 생긴 콤플렉스인데, 제가 참여한 모임은 다 망한다는 거예 요. 이곳도 그렇게 될 조짐이 보여서 덜컥 겁이 났지만, 벌써 12년이나 했네요.” ‘장난’에 분노하던 그 술집 사장은 5년 전 가게를 넘기고 이 골목을 떠났다.

조휴일은 틀렸다. 최후의 힙스터의 발언은 “힙스터가 뭔지 모르겠다”라기보다 “나는 힙스터다”다. 알면서 모르는척 하는 게 아니라, 내가 힙스터라는 걸 알고 있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간다는 실천이자 입장이다. 호기심이 넘치고 새로운 것에 관대한 사람과 칠 수 있는 게 ‘장난’이고, 장난이야말로 자본주의에 숨을 틔운다.

    에디터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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