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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진 여자 친구와 다시 잤다

2015.09.11유지성

헤어진 여자를 다시 만났다. 딱 한 번만.

얼어붙었다. 피할까? 아직 못 본 것 같은데. 딴청을 피우며 생각한다. 여기는 시커멓게 어두운 곳. 모른 체하면 모른체 할 수 있는 넓은 곳. 하지만 거기서도 잘 보이는, 기어이 알아채고야 만 얼굴. 약속하고 만났다면 준비라도 했을지 모른다. 최소한 물어볼 것과 묻지 않을 것이라도.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도. “헤어진 여자친구 만나면 다 잔대”라는 말엔 대개 이 말로 응수했다. “그러면 안 만나면 되지.” 하지만 이렇게 말하진 않았다. “못 본 걸로 하면 되지.” 굳이 모르는 척 피하고 싶진 않았다. 굳이 누구에게 그럴 만큼 아득바득 증오하고 저주하며 헤어진 건 드물기도 했다.

마음을 기억하는 만큼 몸도 떠올리곤 했다. 이제 마음은 변했어도 몸은 그대로인가?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마음이 가까워 좋은 섹스가 있다면, 마음을 몰라 더 뜨거운 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 날은 대개 취해 있었고, 오늘도 역시 그렇다. 어딜 지나치며 만난 거라면 그저 인사나 하고 말았을 텐데, 여기는 모두가 기꺼이 친구가 되는 곳. 서로는 한때 친구보다 더 가까운 사이였으니, 그런 과정 또한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마침내 둘이 되는 곳. 우리는 다시 가까워졌다.

그렇지만 내 방으로 가기는 싫었다. 흔적은 남기 마련이고, 금세 지워질 낯선 여자의 얼굴도 아니었다. 여자의 방은 작았다. 누군가의 방문을 기대하고 꾸민 공간 같진 않았다. 그보단 진짜 이 여자의 어제와 오늘이 빽빽이 들어 있는 것 같은 방. 내가 가고 나면 과연 나의 흔적도 여기에 남을 것이다. 좀 이기적이라 미안한 마음. 비누도 쓰고, 새 칫솔도 빌렸다. 돌려줄 수는 없겠지만…. 씻고 바른 로션에선 몇 년 전 가까이 갈 때마다 나던 그 냄새가 그대로였다. 슬쩍 살펴봤지만, 방 어디에도 남자의 흔적은 없어 보였다. 아니, 딴 남자의 방에 여자의 흔적이 있으려나? 알아서 뭐 해. 종류별로 고르라며 호기롭게 꺼내는 (평소엔 마시지도 않는) 새 술, (나를 포함한) 남자애들이 트는 그렇고 그런 음악 대신 여자는 매일 마시는 차를 끓였다. 찻잔은 짝이 맞지 않았고, 식탁엔 의자도 하나뿐. 몇 개쯤 있는 흰 셔츠 대신 그 집에서 제일 큰 티셔츠를 얻어 입었다. 입고 온 내 옷은 이미 옷걸이에 걸려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해주곤 했다. 제발 옷 좀 아무 데나 놓지 말라는 핀잔과 함께. 지금 그런 핀잔은 없다. 그때 내가 사준 물건은 여기 아직 몇 개쯤 남아 있으려나?

그때와는 달라진 머리 모양으로, 그때보다 좁은 침대에서, 그때보다 어른이 되어, 그때는 미처 몰랐던 체위로, 그때보다 더 오래. 끝끝내 불을 완전히 끄고 누운 건, 이 밤을 완전히 잊을 자신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안 보여서일까? 적어도 그때는 나만 알고 있던, 여자가 내던 은밀한 소리가 더 잘 들렸다. 또한 촉감이야말로 가장 관계에 가까운 감각일 터, 꽉 움켜쥘 때도 쓱 쓰다듬을 때도 그 몸에서 변한 건 하나도 없었다. 헤어지기 직전의 심드렁했던 그 섹스, 밤낮없이 달라붙어 탐닉하던 여행지에서의 섹스, 한바탕 싸우고 전쟁하듯 쏟아 붓던 어떤 날의 섹스…. 다 생각나는 한편, 새롭게 찾아오는 이 흥분은 아마 다음이 없을 거라는 걸 서로가 또렷이 짐작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서로의 몸은 여전히 너무나 잘 아는 채로. 그 얼굴을 아침에 다시 봤다. 우리가 같이 지낼 때 매일같이 보던 깨끗한 얼굴. 어쩌면 그 모습을 처음 본 날, 연애를 결심했었는지도 모른다. 예쁘고 귀엽고 낮과 밤이 색달라서 그런 게 아니라, 약속처럼 받아들였으니까. 그 얼굴을 선뜻 가까이서 보여준다는 걸. 내일 밥 먹고 가라는 말, 맛있는 걸 해주겠다는 말은 어제까지만 유효한 얘기였을까? 꼭 요즘 내가 그렇게 하듯, 현관문 앞까지의 짧은 배웅. 혹시 전화번호는 그대로냐는 물음도, 잘 지내고 다음에 또 보자는 안부 인사도 없었다. 넓은 길이 뻥 뚫린 낯선 곳의 아침. 다시 찾아가긴 좀 어려운 골목과 집. 굳이 외워둘 이유도 없으니, 금세 그 동네를 떠났다. 이제 남은 사람은 흔적을 치울 테고, 떠나는 사람은 잠시나마 이 밤을 다시 한 번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완전히 지울 것이다.

    에디터
    유지성
    일러스트
    김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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