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LETTER – TV 없이 살 수 있어?

E.L.

집을 짓기로 정하고 나니 고민이 생겼다. 방에 따로 TV를 둘지 말지. 틀었다 하면 저러다 눈 다치지 싶게 흰자를 뒤집고, 치아 파절이 걱정되도록 말을 씹어 돌리는 드라마 속 여자들, 딱 오 분만 귀여운 영유아들, 누가누가 더 흠이 많은지를 겨루는 고부간, 얼마나 한심한지 다투다 서로 지치는 뉴스들, 관절이 헐거워지고 성대가 까지도록 춤추고 노래하는 동이족 처자들, 먹다 죽을 음식 남녀들이 내 육신을 탈탈 털고 있어서.

TV를 보는 게 전세계적인 의무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평생은 대중 미디어의 영향에 대한 개인적 경험으로 쓰인다. TV의 사회 중심 역할이 전 보다 증대되진 않았다 하나 쉬는 날, TV를 안 보면 아침과 저녁 약속 시간 사이를 무엇으로든 채워야 한다. TV를 볼지 말지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배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새삼 배운다.

다들 모인 자리엔 집에 TV가 없다는 사람이 꼭 있다. TV를 아예 안 본다는 위인도 흔하다. 그게 TV에서 나오는 저급한 대화엔 안 끼겠다거나, TV 얘기 하는 사람 IQ 레벨이 저급하단 소리로 들리진 않는다. 화면 조정시간부터 애국가까지 다 보는 사람도 사실 없고. 또 요새 누가 대화할 때 <안나 카레니나>의 캐릭터 발전이나 플롯 진행을 분석하고 자빠졌나? 그래도 사람들이 전날 본 프로야구 얘길 할 때마다 성냥도 다 못 팔고 TV도 못 본 외로운 노점상 같은 기분이 들긴 한다. 진공 속 삶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들끼리의 진정한 상호작용, 모임의 빈 공간에 쥐어짜넣는 주제의 필요성을 알기엔 열도 부족하고 관심도 달랐다. 친구의 멍청한 표정을 보며 저게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선 어떻게 비칠지 상상할 때는 있었지만. 아무튼 이젠 TV의 해악을 피해 산중에 숨은 서산대사라 해도 “TV가 없어서 아직 노태우 정부 시절인 줄 알았어,” “TV를 못봐서 각목으로 네 머릴 뽀갠 게 그렇게 나쁜 일인지 몰랐어”라곤 말하지 못할 것이다.

좋든 나쁘든 텔레비전은 삶의 일부이며 전부. 음극선은 우리가 머무는 공기이자 날씨. 나는 TV를 통해 책과는 다른 지식을 배웠다. 처음 흑백의 TV에서 <혹성 탈출>을 보았을 땐 아예 혹성에서 살았다. 언덕과 냇물과 작은 나무 다리에 이름을 붙이고 역사를 재구성했다. 누가 총명한 침팬지였는지는 기억 안 나지만, 그것 없인 그때의 인생에 뭔가 빠져 있을 것이다. 아직도 나는 TV가 만든 세트 안에 갇혀 산다.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고, (화면을 닮은) 창문으로 달아나는 법도 모른다. 이 슬픈 이야기의 결말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잡음 내는 이 사각형 괴물을 삶에서 퇴출시키지 못하고 끝없는 TV의 입구로 들어간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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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KOREA 편집장] 2001년부터 GQ KOREA 편집장을 맡고 있음. 잡지를 통해 문화와 스타일을 다루어온 그 시간 동안, 정작 자신이 얼마나 세속적인지 허무하게 깨닫게 됨. 그래도 잡지 만드는 일을 너무 좋아해서 해보지 않은 ‘여타의 것’들에 대한 어떤 아쉬움도 없음.